#88화
언제 이런 적이 있었지?
여자의 말에 대답하는 와중에도 머리는 비슷한 기억을 찾아 헤매었다.
“왜?”
“아가씨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잖아.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대화는 여전히 이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헛웃음을 뱉던 황당함 대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께름칙함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원하던 기억을 찾아내었다.
‘영애. 하얀 손수건에 묻은 얼룩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요?’
말끝에 이어지는 낮은 웃음소리.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 어딘가 찝찝한 기분.
그래. 데프론 공작저를 방문한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날의 일을 재현이라도 하듯 불쑥 엄습한 오싹함에 살짝 몸을 떠는 나를 보며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아 알려주는 거야.”
아이작 데프론이 그랬던 것처럼.
“아까 그랬던가. 내 로브로는 몸을 보호할 수 없을 거라고?”
여자가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나는 내 앞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보며 가만히 숨을 삼켰다.
예전 기억에 잠식당한 탓일까. 어쩐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누군가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것처럼 시야가 아득했다.
“그것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넌 모르겠지만, 나는 이깟 로브 따위 없어도 상관없거든.”
그래서 알지 못했다.
어느덧 여자가 나를 칭하는 호칭이 달라졌다는 것도, 말투가 묘한 혐오감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도.
천천히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여자의 입술이 잡혔다. 짙은 호선을 그리는 붉은빛이 문장을 뱉었다.
“내 걱정할 시간에 네 몸이나 챙기는 게 어때?”
그것이 지독히도 인위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쯤, 여자가 내 손목을 틀어쥐었다.
“하나뿐인 보호막도 다 사라져가잖아.”
“아앗……지금 무슨…….”
생각보다 센 힘에 내가 신음하는 것을 본 기사들이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뭐라 크게 소리를 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놈 옆에 있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읏.”
“그런 말은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나 해야지.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기사들에게 밀려나기는커녕 아까보다 더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설마 네가 하프 엘프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니? 고작 그런 것으로 피할 수 있다고?”
안에 담긴 내용만큼이나 믿을 수 없도록 차갑게.
“그 생명력 가득한 남자도 제 아들에게 떨어진 저주 때문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는데. 너 따위가?”
“…….”
“바보 같기는.”
비웃듯이 중얼거린 여자는 마지막 말을 끝내자마자 내 손목을 놓고 떨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사들이 여자와 내 사이를 가르고 주위를 감쌌다.
이제 제법 안전해졌음에도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저주라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비명이 나올 정도로 다친 손목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명히 ‘저주’였다.
레오나드의 저주에 관해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자는 내가 처한 상황까지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내가 살기 위해 레오나드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도대체 어떻게?
지금 현재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레오나드뿐이었다.
게다가 칼리드가 죽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것도 레오나드의 측근들뿐이다.
당사자들밖에 모르는 것들을 오늘 처음 보는 여자가 어떻게…….
아니, 잠깐만. 당사자라고?’
“……빨리 저 여자 좀 잡아주세요! 도망 못 가게!”
정확히 답을 내리지 못한 무언가를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이 열리고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자는 이런 나를 조롱하듯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골목 코너를 돌았다.
기사들이 재빨리 쫓아갔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코너를 돌자마자 여자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흔적도 없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사들은 여자가 엄청난 실력자였을 것이라며, 그렇게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몸놀림을 가진 것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여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한 나는 알았다.
아니다. 단순히 몸놀림이 좋은 게 아니었다.
‘그건 마법이었어.’
여자가 사라진 순간, 그리고 그녀가 기사들의 말을 가르고 말을 내뱉은 순간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낯설지만 분명히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글자가 사라진 일기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말이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여자의 정체 또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 알고 마법까지 부릴 수 있는 사람. 내가 알기로는 이 세계에서 딱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셀리아였고 다른 하나는…….
‘이사벨이지.’
후자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일단 그러했다.
문제는 원작에서 외양이 언급되지 않는 이 두 사람 전부, 아까 그 여자라고 보기에 말이 안 된다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었다.
우선, 셀리아가 등장하기에는 그 시점이 너무 빨랐다.
원작이 시작되려면 아직 30년 정도가 남았는데 벌써 등장한다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점인데?
‘아무리 변수가 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빠르잖아.’
그리고 내가 알던 셀리아와는 성격이 너무 달랐다.
원작의 셀리아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 그 여자는 셀리아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좀 있었다. 성격만 보자면 오히려 이사벨에 가깝지.
‘하지만 이사벨은 이미 죽었잖아.’
그것도 300년 전에. 그런 사람이 사실은 살아있었다고? 원작의 숨겨놓은 이야기라도 되는 걸까?
그렇지만 원작에서 이사벨이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 어쩌면 완결까지 읽은 것은 아니니 후반부에 나올 예정이었을지도.’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사벨의 등장도 너무 빠르잖아. 이것도 30년은 더 지나야 하는데…….
‘하, 머리 아파.’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덜덜 떨렸다.
여자가 누구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결코 그녀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원작이 틀어져 버렸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더는 상황을 쉽게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주는 공포감이 온몸을 세게 짓눌렀다. 나를 죽일 듯이 조여오는 감각에 그대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인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냐니? 고작 그런 것으로는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고? 보호막이 사라져 간다고?
마지막으로 레오나드 옆에 있으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냐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여자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건 다 개소리여야 했으니까.
여자가 쥐었던 팔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욱신거렸다.
여전히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불쑥 떠오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저 중에 나를 죽일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참 한결같기도 하지.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나는 4년 전 그 파티장에서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딘가 숨을 곳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어딘가.
그것에 내가 익숙한 얼굴을 떠올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 당신을 만나러 가야겠다.
“……백작님!”
내가 갑작스레 걸음을 옮기자 놀란 기사들이 다급히 내 뒤를 따라왔다.
괜찮으시냐며 물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해 줄 정신은 없었다.
언제 이렇게 서둘러 움직였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다리를 내딛는데, 정작 움직이는 속도는 너무 더뎠다.
그것이 내 조급한 마음 탓인지 아니면 아까부터 자꾸만 쳐지는 몸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눈앞에 떠나온 여관이 보였고 나는 곧바로 성큼성큼 걸어가 레오나드가 묵고 있는 방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시야에 잡힌 익숙한 붉은빛에 온몸을 집어삼킬 듯 커졌던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갔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대상을 잘못 찾은 분노였다.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예요? 한참 찾았잖아요!”
내가 소리치는 것에 놀란 것인지 레오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오나드에게 화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 많이 늦은 것도 아니었고 그 또한 무슨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레오나드가 그 여자를 불러 나에게 겁을 주라 시킨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이렇게까지 그에게 화를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그가 옆에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섭섭하고 눈물이 나서.
그래서 자꾸만 고집을 부리고 어리광을 피우게 되었다.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어떻게든 나를 지켜줄 거라고 했잖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작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무언가가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그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레오나드가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큼지막한 손이 내 뒤통수로 향하고 다른 팔은 내 허리를 감쌌다.
여전히 잘게 떨리던 몸이 너른 품에 푹 안겼다.
“미안해.”
“…….”
“울지 마. 내가 다 잘못했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면서 레오나드가 그렇게 속삭였다.
어이없게도 그것에 또 화가 났다. 당신이 사과를 왜 해, 지금.
하지만 이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하는 손길에 그 말은 쏙 들어갔다.
지금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고집이고 어리광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알겠어.”
“내 옆에 항상 있어야 해요. 알죠?”
“당연한 말을.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낮은 웃음소리가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진정이 되자 제대로 안정을 찾고 싶은 본능이 앞서 레오나드의 등을 마주 안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레오나드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가득 들어찼다.
레오나드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마주해 왔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언제나 나를 품어줄 것 같은 눈빛을 보며 결심했다.
좋아. 레오나드에게 다 털어놓고 같이 고민을 좀 해 보자.
하지만 그보다는 레오나드가 입을 연 것이 먼저였다.
아까부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레오나드가 나를 불렀다.
“로레이나.”
내가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다리던 눈치였기에 나는 레오나드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실수였다.
기껏 다독였던 마음속 불안이 순식간에 몸을 집어삼켜 버렸다.
결과적으로는 꼭 겪었어야 할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적어도 이런 시기에, 이런 식으로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 갔었어? 북부 도착하면 데이트하자고 해 놓고.”
“…….”
“방에 가도 없어서 기사들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나와 있었던 일을 잊어버린 줄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얼굴인 레오나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