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좀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꿈인가?’
그래. 이건 꿈일 것이다.
며칠째 반복되던 알 수 없는 불안이 빚어낸 아주 지독한 악몽.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끔찍한 일이 연달아 벌어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꿈이라면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레오나드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말한 순간부터일까.
어쩌면 마차 안에서 잠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깨어나면 아직도 마차 안일지도 몰라.
아니지. 아예 황궁을 떠나온 것부터가 꿈일지도. 2차 산사태 같은 건 아예 없었던 일인 거야.
사실 오두막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잘 있었고 연구는 제대로 진행이 되고 있고…….
“로레이나.”
불쑥 들린 음성에 다시금 눈물이 터질 뻔했다. 따스한 체온이 조심스레 팔을 감쌌다.
대답이 없는 내가 이상했던지 레오나드가 제 품에서 나를 떼어내며 물었다.
“왜 그래. 괜찮아?”
……아니야. 인정하자. 그럴 리가 없잖아.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한 감각이 절대로 꿈일 리 없었다. 이게 허상일 리 없어.
눈앞에 놓인 것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공포에 쫓겨 도망쳐온 곳이 또 다른 공포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실,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지금 바로 레오나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일 터였다.
나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뼈저리게 겪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 들켜버렸네요.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한 건데.”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절대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입꼬리를 있는 힘껏 빼 당기자 얼추 그 비슷한 얼굴은 만들어진 것 같았다.
“사실, 레오나드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몰래 나갔다 왔거든요.”
입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선택한 것은 어쩌면 현 상황에서 가장 최악일지도 모를 방법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도무지 말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유일한 빛이었을 내가, 사실은 다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걸.
나와 있는 순간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게 꿈만 같다고 말했던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주고 싶은 거?”
“네. 그동안 레오나드한테 너무 받기만 했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주고 싶었어요.”
궁금한 눈치인 레오나드를 보며 나는 수제용품점에서 산 선물들을 꺼냈다.
원래부터 밖을 나간 목적이 이것들이었던 것처럼.
“하나는 손수건이고 하나는 목걸이에요. 손수건에 글귀를 새길 수 있다고 해서 제가 나름 고민해서 정했어요.”
“크루시아?”
“네. 우리가 같이 간 유일한 축제잖아요. 담긴 의미가 좋기도 하고. 아, 그리고 이 목걸이는…….”
나는 앞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들어 보였다.
그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에 걸린 사파이어 목걸이가 드러났다.
“저랑 같은 거예요. 여기 버튼을 누르면 보석이 반으로 갈라지는데, 안에 그림을 넣을 수 있다고 해서…….”
거기까지 말한 순간, 다시금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마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선물이지 않은가.
내가 왜 보자마자 이것들로 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 초상화를 넣었어요. 시간이 얼마 없었고 간단한 느낌이라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비슷하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이 말하고 있었던 거다.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저 그림을 보고서라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 * *
잠깐 나갔다 온 것을 그리 빨리 눈치챌 줄 몰랐다며 너스레를 떨던 로레이나는 갑자기 피곤하니 데이트는 다음에 하자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왜 울었냐는 말에는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진짜 제대로 준비해서 깜짝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다 망쳐버렸잖아요.’
‘그게 섭섭해서 그런 가봐요.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니었는데 진짜 왜 그랬지. 창피해라.’
눈썹을 늘어뜨리며 볼을 긁적이는 모습을 회상하던 레오나드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잇새로 한숨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누굴 바보로 아나.”
속일 것을 속여야지.
물론 로레이나의 거짓말은 그럴듯했다.
손수건에 새겨진 글귀나 목걸이 속 초상화는 한순간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레오나드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던 로레이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도 하얗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혈색 없이 창백하게 질린 낯.
살짝만 치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 같이 잘게 떨리던 몸.
자신을 보자 안심한 듯 묘하게 일그러지던 얼굴이 일순 흐려지는가 싶더니 눈물을 뱉어냈다.
그래서였다. 다급히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던 것은.
늘 품에 쏙 들어오던 몸은 평소보다도 왜소했고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런 표정을 해 놓고 고작 깜짝 파티를 망쳐서 그런 거라고? 어림없는 소리였다.
계속 창밖을 보던 레오나드는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로레이나를 붙들고 더 물고 늘어질 수도 있었으나 레오나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레오나드가 뭐라고 하든 로레이나는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로레이나의 온몸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연기를 하면서 입을 닫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로레이나에게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레오나드에게 피해가 가는 일일 때.
사실 둘 중 어느 것인지를 알아내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어쨌든 간에 레오나드는 꼭 알 필요가 있었으므로.
레오나드가 침대 모서리에 털썩 앉자 그에 맞추기라도 한 듯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들어와.”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이아나였다.
닫히는 문이 일으키는 바람에 갈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하얀 얼굴에 언뜻 보이는 초조함을 훑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산은 어떻대? 올라가서 살펴도 괜찮다고 하던가?”
“네. 내일 아침이면 올라가 봐도 될 것 같아요. 로레이나가 말한 부근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게 정말인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수색 중에 3차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몇 시간 동안 살핀 결과 지반도 꽤 튼튼해서 적어도 내일까지는 괜찮을 것 같다고 들었어요.”
“다행이군.”
그 말을 끝으로 레오나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방 안에 꽤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지나자 귓가에 펜으로 뭔가를 쓰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레오나드가 종이에 기록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길어질수록 다이아나의 긴장은 배가 되었다.
사실, 아까부터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느라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레오나드가 산을 살피러 올라간 기사들을 두고, 굳이 여관에 남아있던 다이아나를 불렀다는 점도 물론 정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다이아나. 혹시 폐하께서 아까 제가 외출한 것에 대해 물으시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세요.’
‘네? 아까 데이트 나간 거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일찍 들어…….’
‘제발. 부탁이에요.’
레오나드에게 오기 전 만났던 로레이나는 퍽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다 설명하겠다며 일단은 그렇게 말해달라는데, 그 간절함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이아나는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그에 대해 물어볼까 봐 마음을 졸였다. 레오나드는 상대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주의해야만 했다.
제발 이대로 나가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다이아나는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하늘은 다이아나의 편이 아니었다.
고군분투하는 제 후손이 가여웠던 것인지 신은 그녀에게 어떤 자비도 허용하지 않았다.
곧 직격탄이 날아들었다.
“로레이나가 아까 외출했다고 하던데. 같이 갔었어?”
“아니요. 나갈 준비를 하고 있길래 메리와 같이 도와주기는 했는데, 같이 가지는 않았어요. 로레이나가 저는 그냥 여관에 남아있으라고 했거든요.”
말을 잘 끝마친 다이아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일단 괜찮았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하, 심장 떨려서 못 해 먹겠네.’
일이 잘 마무리되면 돌아가서 칵테일이라도 한잔해야지. 도저히 맨정신으로 잠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후일을 생각하며 다이아나가 마음을 다독이는 와중에도 레오나드의 질문은 이어졌다.
“그래? 그럼 누구랑 같이 간 건지 알아?”
“기사들 몇이랑 같이 간 것 같더라고요.”
“기사들 몇? 직속 시녀는?”
“메리는 여관에서 저랑 있었어요.”
“메리도 안 데리고 나갔다고?”
“네. 로레이나가 그러겠다고 하던걸요.”
메리와 다이아나가 여관에 남아있는 것을 본 사람이 많았다.
둘이서 로레이나가 데이트를 잘할까 걱정하며 호들갑을 꽤 떨었으니 기억하는 사람도 꽤 될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메리도 갔다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에 거짓을 섞지 않는 편이 좋았다.
지금같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날아들더라도 말이다.
“메리까지 떼놓고, 로레이나는 뭐 하러 나간 건데?”
식은땀을 흘리던 다이아나의 몸이 굳었다. 고개가 삐그덕-하는 기괴한 내며 움직였다.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들어찼다.
‘……그걸 왜 나한테?’
로레이나와 만나기로 한 것은 레오나드가 아니었던가.
둘이서 뭘 할지 이야기하는 것은 다이아나도 얼핏 들었으니 그것이 거짓일 리는 없었다.
혼란스러운 다이나아에 비해 레오나드는 꽤 태연한 얼굴이었다. 정말 모르는 것을 물었다는 듯.
그제야 다이아나는 단순히 둘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 넘겨짚었던 것이 생각보다 큰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레오나드의 얼굴은 마치…….
‘오빠가 서면으로 보고했을 때 같잖아.’
로레이나가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레오나드를 봐온 다이아나에게는 꽤 익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로레이나는 저주의 예외 대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네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이사벨이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이 맹점이 되어 인간과 이종족, 둘 중 어디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않는 로레이나는 저주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분명 제럴드가 그랬었다.
그 증거로 레오나드 역시 로레이나와 함께 있을 때는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레오나드와 대화하면서 다이아나 역시 그 효과를 봤기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