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왜 기억하지 못하시는 거지?’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로레이나와의 일을 잊어버리는 레오나드라니.
당황스러운 상황에 갈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마냥 거세게 흔들렸다.
그것을 볼 수는 없지만, 다이아나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던지 레오나드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 움직임에 다이아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해. 로레이나가 왜 나갔는지.”
“저는……몰라요. 그냥 일이 있어서 나간다고만 들었…….”
“다이아나.”
나직한 부름에 다이아나가 입을 다물었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거짓말을 아주 싫어해.”
“…….”
“그것이 설사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긋한 것 같으면서도 살갗이 베일 듯 차가운 목소리.
그 안에 여실히 드러난 분노에 다이아나의 몸이 다시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래.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은 사실 이런 사람이었다.
로레이나를 만난 이후로 다소 무른 모습을 자주 보이긴 했으나 그것도 다 로레이나 앞에서일 뿐이었다.
이 넓은 세계에 홀로 남은 드래곤.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
이 땅이 인정한, 카일룸 제국의 하나뿐인 주인.
그 엄청난 중압감에 짓눌리는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견디며 300년을 보낸 이였다.
요즘 누그러진 듯 보여서 레오나드가 보통의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로레이나는 그가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다이아나에게는 아니었다.
지상에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생명체.
그에 걸맞게 흘러나오는 위압감과 살기에 다이아나의 어깨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똑바로 생각해, 다이아나.”
“…….”
“네가 모시는 이는 누구지?”
그 질문 앞에 다이아나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문 일에 상관없이 제법 자유분방하게 다닌다고 해도 그녀 역시 헨티슨이었다.
레오나드, 즉 데르키안 황가의 안정적인 황권 복구는 헨티슨 가문이 가장 바라오던 것이었다.
어느 날, 헨티슨 가의 선조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부터 레오나드의 보호를 명 받은 순간부터 쭉 이어져 온 염원.
단순한 다툼 때문이라면 모를까, 레오나드의 저주에 연관된 일이라면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로레이나.’
속으로 작게 되뇐 다이아나가 결국 천천히 입을 뗐다.
“실은…….”
* * *
나는 감겨 있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어느새 어두운 빛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너무 지친 나머지 기절하듯 잠든 모양이었다.
레오나드와 헤어져 방에 돌아오자마자 펑펑 울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
잠시 멍하니 천장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닥친 탓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까 로브를 쓴 여자가 뱉은 말은 정리해 보자면 이러했다.
첫 번째, 하나뿐인 보호막이 사라져간다.
‘……보호막이라.’
보호막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레오나드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투가 아니었는데.
꽤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단 첫 번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넘기자.
두 번째, 그놈 옆에 있어도 살 수 없다.
이건 의미하는 게 너무 명확해서 모를 수가 없었고 나 역시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애초에 나는 레오나드 옆에 있으면 반드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크니까 옆에 있으려고 한 거였지. 그러니 이것도 넘기고.
‘이제 마지막…….’
그런 말은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 하라고 했던가. 그 말이 자꾸만 거슬렸다.
꼭 내가 저주 때문에 죽는다는 말 같아서. 레오나드의 아버지인 칼리드처럼 말이다.
나는 하프 엘프라서 저주의 영향을 안 받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그럴 거면 진즉에 죽었어야지. 내가 빙의된 지 벌써 6년째인데.’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가 빙의하기 전의 로레이나가 12살까지 살아있었던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앞의 두 가지는 그렇다고 쳐도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여자의 말을 의식하고 있는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저주의 예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바로 일이 터지지 않았던가.
나와 이야기했던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레오나드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나에 대한 건 조금도 놓치지 않던 레오나드였다.
4년 전 아멜리오 백작저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나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잖아.
지금까지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지, 잠깐.
‘정말로 한 번도 없었나?’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던 기억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다.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북부에서 레오나드와 재회했을 때 다리가 이미 나은 것을 봤으면서 다음날 모르는 듯 굴었던 것.
소원권을 하나 썼으면서 여전히 두 개가 남아있다고 말했던 것.
전부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다. 레오나드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그런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이런 위기가 닥치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웃으며 보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바보 같게도 나는 그때의 행복감에 젖어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 정말 이제는 행복해지는 줄 알았는데.
‘……와. 정말 나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러는 걸까.
이만큼 애를 썼으면 되었잖아요. 왜 기껏 찾은 살길마저 없애려고 해.
‘이번 생에서라도 좀 제대로 살아보려고 그랬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걸까.
몸에 힘이 빠져서 나는 일어나려던 것을 관두고 침대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침대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나는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있었…….’
순간, 잠결에 겪은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울다 지쳐 바닥에 쓰러진 나에게 누군가 다급히 다가오던 것. 숨 쉬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뱉던 안도의 한숨.
그리고 조심스레 나를 안아 침대에 눕혀주던 손길까지.
마치 영화 필름처럼 한 장면씩 조각난 채로 떠오르는 기억에 굳은 사이 문이 열렸다.
밤공기를 가르고 등장한 것은 당연하게도 방금 떠오른 기억 속의 주인공이었다.
잇새로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 이름이 새어 나왔다.
“……레오나드.”
“일어났어?”
문을 닫은 레오나드가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다. 손에는 하얀 물수건이 들려 있었다.
내가 오늘 낮에 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레오나드가 나를 눕히더니 이마에 수건을 올렸다.
제법 익숙한 모양새였다.
‘……어쩐지 이마가 촉촉한 것 같더라니.’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 몸에 열이 좀 올랐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꽤 식어있었다.
아마 계속 이렇게 간호를 해 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쳤었던 팔도 다 나아있었고.
나는 내 이마에 얹어져 있을 고급 손수건을 생각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쓰라고 준 게 아니었는데…….”
“알아.”
그 말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뭘 알겠다는 건지. 하지만 장난이라도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레오나드가 어쩐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에.
다소 무른 구석이 있던 평소와 달리 그의 기운이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레오나드가 언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무언가 감정 조절이 힘든 일이 있을 때였다.
가령 지금처럼 뭔가에 화가 나 있을 때라던가.
“걱정 많이 했어요?”
“……그걸 말이라고.”
어느새 내 한쪽 손을 그러쥐고 있던 레오나드가 손등에 입을 맞추며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너무 조용하길래 방에 들어와 봤는데 바닥에 쓰러져 있지를 않나-.”
오랜 기간 한곳에 머물러 있던 입술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닿더니.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는 데다가 식은땀까지 흘리고. 너는 내가 얼마나…….”
이내 손바닥에 진득한 감각을 남기고서야 떨어졌다.
“아니, 말해 줘도 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꽤나 다급함이 실린 행동이었다. 그렇게라도 불안감을 덜려는 것처럼.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말 안 했어. 쓰러질 정도였으면 그전에도 아팠을 텐데.”
나는 대답 없이 웃었다. 레오나드의 말이 맞았다.
황궁을 떠나오기 전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 계속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 숨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로 아프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행복해서 그런 것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랬으면서 참 우습기도 하지.
사실 내가 지금껏 보아오던 것이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리 고통에 허덕이는 꼴이라니.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나았을까.’
여자의 말을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갔더라면.
처음부터 레오나드와 같이 움직여서 그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라졌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훑는 모습에 입에서 작게 헛웃음이 터졌다.
‘그럴 리가.’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지금.
하지만 아직도 나는 레오나드에게 이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를 전해서 저 얼굴이 슬픈 듯 일그러지는 건 볼 수 없…….
“로레이나.”
“네.”
“혹시 나한테 할 말 없어?”
어쩐지 평소보다 낮게 깔린 음성에 고개를 들자 레오나드가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붉은 눈에 슬픈 빛이 감도는 것도.
그것을 보는 순간,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아, 다 들었구나.’
그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당황한 것인지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레오나드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늘어뜨렸다.
바로 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일단 치료부터 하자. 이야기는 그 후에 들을게.”
“……치료요?”
“응. 아까보다 많이 내리긴 했는데 아직도 열이 있어.”
레오나드가 여전히 물수건이 얹어져 있는 내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의외네요.”
“뭐가?”
“진즉에 치료했을 줄 알았거든요. 4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독 때문에 망가졌던 입술이 다음날 일어나자 거짓말처럼 나아있었지.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의 축복 덕분이라며 웃었는데.
“아, 왜 빨리 안 낫게 해 줬냐고 뭐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네가 싫어할까 봐.”
레오나드가 내 손을 매만지며 시선을 피했다. 어리둥절한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싫어한다고요, 제가?”
“그때도 몰래 했었다고 화냈었잖아.”
“난 또 뭐라고. 그때는 싫어한 게 아니라 처음이어서 그런 거거든요.”
“그럼 키스해도 돼?”
“…….”
“하게 해 줘. 응?”
어차피 치료할 생각이었으면서 갑자기 왜 묻나 싶었지만, 레오나드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맞닿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레오나드가 아직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면, 잠깐 정도는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마음대로 해요.”
나도 바라던 바니까. 작게 속삭임과 동시에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과 함께 입술이 맞닿았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새 이마 위에 있던 물수건이 떨어졌던 것도. 볼 위로 떨어져 흐르던 것이 누구의 눈물이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