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도련님?”
뒤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촛불로 앞을 밝히며 공작저를 거닐던 에녹이 뒤를 돌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데프론 공작저를 총관리하는 집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고 어둠에 내려앉은 공작저를 거니는 작은 주인을 보던 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자신을 부른 것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에녹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잠이 잘 안 오길래 산책하려고 나왔어.”
“아,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저는 염려치 마세요. 정원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응. 그러려고.”
“그럼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야. 이만 쉬러 가.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
“그래도…….”
“괜찮다니까.”
에녹이 한사코 거절하자 결국 집사가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집사는 몸을 돌려 사라졌고 잠시 뒤 복도에는 다시 에녹만이 남았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온 공간에 에녹의 미소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늘 밝던 녹색 눈동자가 답지 않게 굳어있었다.
오늘 낮에, 그러니까 연회장에서 본 조금 이상한 장면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오늘부로 그의 공식적인 동생이 된 셀리아가 소개를 마친 이후에 말이다.
꽤 괜찮은 반응 속에서 첫 등장을 마치고 상석에서 내려온 그녀 주위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데프론 공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꽤 컸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데프론 공작가에 들어온 양녀였기 때문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카일룸 제국의 유일한 공녀였던 다이아나 헨티슨과 황제의 비서관 로레이나 아멜리오 때문이었다.
사교계의 결혼 시장에 공작가의 딸만큼 이목을 끄는 존재는 없었고, 마침 혼인적령기였던 다이아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이아나를 상대로 헨티슨 가에 혼담을 제의할 수는 없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대부분 남작가였을 당시의 헨티슨 가를 무시해왔으니, 그런 가문에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영지에만 박혀있고 수도로 올라오지 않는 남작가에서 설마 데르키안 황가의 핏줄을 보호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물론 꽤 교류했거나 아예 교류가 없었던 이들도 있었고, 예전에 무시했더라도 철면피로 구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다이아나와의 혼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신분 상승으로 인해 자신에게 몰려들 사람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다이아나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 기사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그에 귀족들의 시선은 황제의 비서관으로 임명된 로레이나에게 돌려졌다.
하지만 그 관심도 머지않아 사라졌다.
소문에 의하면 비서관에게 쏟아지는 황제의 총애가 대단하다는데, 굳이 로레이나를 건드려서 이종족 황제의 눈 밖에 나고 싶은 마음은 귀족 중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셀리아 데프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귀족들이 몰려든 것쯤이야 에녹에게는 갑작스레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놀랍지 않았다.
문제는 댄스 타임 중 셀리아가 사라지면서부터였다.
첫 춤이 끝난 이후로 셀리아는 연회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에녹이 꽤 자주 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간 거지?’
말을 걸어오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한 에녹은 그대로 연회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이작이 그냥 양딸을 들였을 리는 없었다. 그 이유가 공작가의 방계이기 때문일 리는 더더욱 없었고.
아이작은 뒤늦게 방계를 챙길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셀리아 데프론에게는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계속 주시해야 해.’
레오나드와 로레이나가 수도를 떠난 시점에서 에녹은 아이작을 살필 유일한 눈이었다.
물론 그쪽에서도 따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을 테지만, 에녹이 직접 나서는 것과는 정보의 질이 다를 테니까.
이중 첩자 제안은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에녹은 결국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지금까지의 과오에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막을 기회.
물론 제 선조들이 300년 동안 어딘가에 살아있을 레오나드를 죽이기 위해 쥐 잡듯이 전국을 뒤졌던 것이며, 수도 북부에서 로레이나를 암살하려 한 일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그럼에도 최대한 무엇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예전에 무도회장에서 다이아나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부터 그러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하셔야겠네요. 이대로면 둘 다 놓치실 거예요.’
‘뭘 선택하기로 하셨는데요?’
이날 에녹은 결론을 내렸다.
로레이나와 함께 할 수 없다면 로레이나의 행복이라도 빌어주기로.
중간에 로레이나가 황궁을 나온 탓에 헛된 욕심을 품기는 했었지만…….
‘……이제는 잊어버려야지.’
그 강렬했던 기억들은 모두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것이 어찌 되었든 자신의 아버지인 아이작 데프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로레이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봐도 셀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빈 휴게실도 다 열어봤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가문에 배정된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 이미 사용자가 있는 휴게실 문까지 벌컥 열면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에녹은 휴게실이 있는 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금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에서는 옅은 한숨이 터졌다.
갑자기 지금 스스로의 모습이 몹시도 우스워 보이는 까닭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아무리 아이작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었다고 한들 셀리아는 그저 에녹 또래일 뿐이었다.
어쩌면 너무 과민 반응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럴 시간에 아버지를 살피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그렇게 에녹이 자책하며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토록 찾던 이의 음성이 들렸다.
“오라버니?”
재빨리 뒤를 돌자 응접실에서 막 나온 것인지 셀리아가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실내인데, 순간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긴 은발이 허공에서 찰랑거렸다.
어디선가 일순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저를 찾으러 오셨나요?”
“아, 네…….”
말꼬리를 늘이며 답한 에녹의 시선이 힐끗 셀리아가 나온 응접실 안쪽으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게 들린 ‘오라버니’라는 호칭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였다.
“거기에서 쉬고 있었던 건가요?”
“네. 이런 큰 자리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더라고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나요?”
연이어 묻는 말에 싱긋 웃던 낯에 살짝 그림자가 지다가 사라졌다.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본 셀리아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겪어본 일에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처, 첫 곡을 추고 나서부터 여기 있었어요. 앗, 혹시 이러면 안 되는 거였나요?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조금 더 쉬어도 괜찮아요.”
싱긋 웃어 보인 에녹이 다시 뒤를 돌아 연회장으로 향했다.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한 걸음은 인파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세게 뛰었다.
하마터면 너무 놀라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할 뻔했으니까.
그것은 그때를 회상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인지 정원을 걷던 에녹이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문제가.
그 휴게실은 이미 에녹이 셀리아를 찾기 위해 한차례 살폈던 방이었다.
꽤 수련한 에녹에게도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곳이었단 말이다.
그런 곳에서 계속 쉬었노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오는 셀리아의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꼭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아니,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아이작은 마법에 관련된 무언가를 찾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작이 찾던 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도 있나?’
아이작이 중얼거린 말대로라면 꽤 오래전부터 세상에 존재한 것 같았으니 몇백 년은 살았다는 건데.
마법의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어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이라면 저 여자는 도대체…….
생각에 잠겨 걷던 에녹은 어느 순간부터 발목에 풀들이 사락사락 걸리던 느낌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정처 없던 걸음은 어느새 정원을 벗어나 다시금 저택으로 들어와 있었다.
물론 에녹이 평소 발걸음하던 곳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낯선 풍경에 에녹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황궁을 나와 비어있던 데프론 공작저에 온 지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공작저는 에녹에게 어려운 곳이었다.
그동안 워낙 돌아다닐 일이 많았던 탓에 공작저 내부를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공작저에 전해 내려온다는 보물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고, 황궁을 나온 로레이나를 따라 수도 북부에도 다녀오고.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더라도 에녹은 이곳에 좀처럼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매번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되는 곳에서 마음을 편히 놓고 있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계속 기억을 곱씹던 에녹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더 생각해 봤자 떠오를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설사 어떤 곳인지 안다고 한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에녹은 산책을 마치고 이만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몸을 돌리다 우연히 본 벽면에 붉은 얼룩이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게 뭐지?’
갑작스레 시선이 닿은 얼룩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불을 비춰보자 분명하게 보였다.
‘……손자국이네.’
꼭 핏자국 같은 선명한 색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