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92화 (92/144)

#92화

눈앞에 보인 광경에 녹색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연스레 로레이나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날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던 발걸음. 거의 다 잡았다가 공작저 가까이 와서 놓쳐버렸던 암살자 하나.

‘설마 이런 곳에 흔적이 남아있을 줄이야.’

정원 구석에 있는, 사용인들도 잘 드나들지 않는 외딴 건물이라.

그야말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무언가를 하기에 제격인 장소가 아닌가.

여기라면 다친 암살자가 에녹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었던 것도 말이 되었다.

그 증거로 핏자국은 한곳에 그치지 않고 꽤 여러 군데 남아있었다.

복도 바닥은 깨끗한 것을 보아하니 벽면에 튄 것까지는 차마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알고도 그냥 둘 수밖에 없었거나.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 핏자국 하나 때문에 벽지를 다 뜯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까.

에녹은 핏자국이 이어지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향한 길 끝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핏자국 역시 거기서 끊겼다.

‘내려가서 살펴봐야겠네.’

그 상황에서 에녹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잘하면 며칠간 머릿속을 괴롭힌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무리 외진 곳이라고 한들 여기는 데프론 공작저 내부였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인 아이작 데프론이었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 두 가지는 에녹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로레이나에게 도움 될 거리가 없어 헤매던 에녹은 굳이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에녹은 생전 처음 와보는 공간에 발을 디뎠다.

탁탁탁-.

딱딱한 바닥에 신발 밑창이 닿는 소리가 다소 짧은 간격으로 들려왔다.

그와 비슷한 속도로 뛰는 심장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 * *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이작이 제 앞에 있는 긴 은발 머리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 반짝이는 머리카락의 주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주해 오는 녹색 눈동자가 제법 싱그러운 빛을 머금었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었다.

“내가?”

“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래 보여?”

싱긋 웃어 보인 여자가 명확한 답은 내놓지 않고 되물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불평 한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연회장에서 보인 모습과는 상반되는 태도였지만 둘 중 누구도 이것이 잘못되었다 여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뜻 오만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아이작을 보는 시선에는 묘한 우월감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예. 원래 이곳에 오시는 걸 안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말은 정확히 해야지. 나는 여기 오는 걸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 집 자체를 싫어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역겨운 거고.”

“…….”

“여기 있었을 때 기억이라곤 다 개 같은 것들뿐이니까. 여긴 어떻게 그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지?”

“300년 동안 비어있어서 그럴 겁니다. 불편하시면 지금이라도 바꾸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래 봤자 여기는 거지같을 거야. 그냥 빨리 일을 끝내고 여기를 나가면 해결될…….”

날이 선 말투로 중얼거리며 지하실을 둘러보던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래로 깔린 눈이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짙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짧은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금 눈에 초점이 맞춰진 여자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생각해 보니 여길 나간 후에도 개 같은 건 마찬가지였었네, 짜증나게.”

자신이 말을 걸기 전까지와는 달리 기분 나쁜 기색이 다분한 얼굴에 아이작은 숨을 죽이며 눈치를 살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오래전 일을 더듬는 말투에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 아이작은 알지 못했다.

아이작은 그저 공작저를 둘러보다 우연히 발견한 이곳에서, 정말 우연히도 선조가 남긴 글귀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벽에 꽤 급하게 써 내려간 글자는 오래되었던 탓에 희미해져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절대로 수도 북부에 있는 산에는 접근하지 말 것.’

적혀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면 아이작은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차피 북부는 별 관심도 없던 땅이었다.

수도 내라고 해 봤자 겨우 경계선에 걸쳐있는 끝자락이었고 늦가을만 되어도 날이 매우 추워지는 곳이었기에 뭘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한 보석이나 자원이 나오는 광산이 있는 것도, 농사를 할 수 있는 광활한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이 허약해진 귀족들이 요양을 하러 가야 하는데 먼 곳으로 가기는 싫을 때 가끔가다 오는 곳일 뿐.

물론 경치가 나쁜 편은 아니라 관광을 오기도 하지만 그뿐이었다.

북부에는 아이작의 환심을 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런 글귀까지 보았는데 굳이 북부에 갈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불결하고 불온한 힘이 담겨 있으니 조심할 것.’

보통 사람이라면 ‘불결하고 불온한’에 주목했을 테지만 아이작은 달랐다.

레오나드가 황궁에 유유히 들어왔던 날,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가.

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에게도 저런 힘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이렇게 허망하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고.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았다는 양 비를 내리는 하늘도, 생기를 되찾은 황궁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지내왔던 황궁을 떠나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한데, 그 모든 것들이 아이작의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본래부터 네 자리가 아니었으니 어서 이곳에서 나가라고.

그래서 아이작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그런 와중에 눈에 들어온 그 글귀는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았다.

그는 아직 무도회도, 귀족 회의도 시작되지 않았던 어느 날을 기억했다.

북부 산을 헤매다 발견한 오두막.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커다란 상자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눈앞의 여자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무도 잘 찾지 않았던 산에 300년 동안 잠든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것이-.

“……이사벨 님.”

지금까지도 카일룸 제국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는 것도.

꽤 오랜만에 불린 제 이름에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물론 아이작이 처음부터 눈앞의 여자가 그 ‘이사벨’임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여자, 아니 이사벨이 가진 힘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물론 마지막 순혈 드래곤이었던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을 죽여 버렸다는 기록을 생각하면 한참 못 미치는 힘이긴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말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력을 가졌다고 한들 그렇게 큰 힘을 소모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왜 이런 정보가 하필 데프론 공작저 깊숙한 곳에 남아있었던 걸까 의아했다. 그러나 이는 그 뒤에 알게 된 사실 때문에 금방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지금껏 베일에 싸여있던 마녀 이사벨의 정체가 데프론 공작가의 사생아였다든가 같은.

“이사벨 님.”

아이작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았는지 다시금 고개를 돌린 이사벨은 찻잔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위태롭게 걸린 찻잔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그 바람에 안에 담겨 있던 찻물이 밖으로 흘러 넘실거렸다. 하지만 찻물이 바닥으로 흐르는 일은 없었다.

이사벨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도로 주워 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찻물이 손에 잡히는 양 직접 들어 옮겨서.

그 모습을 보던 아이작이 슬슬 치미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연회 중간에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이네.”

“중요한 문제이니 대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까와 달리 낮아진 목소리에 찻잔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곧 방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애초부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듯.

“왜? 불결한 힘을 썼다고 뭐라고 하려고? 너도 데프론이다, 이거야?”

녹색 눈이 날카로운 빛을 띠더니 이내 살기를 머금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아이작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려고 했던 본능을 지우고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물어보는 건데? 난 인간 따위에게 내가 어디 갔는지 일일이 보고 할 생각 없어.”

‘……인간 따위라.’

그러는 저도 인간이면서. 아이작이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말을 곱씹었다.

이사벨은 늘 자신은 인간이 아닌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꼭 어디선가 인간이 아닌 것들과 어울렸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와 동시에 불쑥 떠오른 두 얼굴에 아이작은 입술을 짓씹으며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연회 중간에 사라지셨길래 여쭈어본 것뿐입니다.”

“그래? 그러면 말 안 해도 상관없는 거지?”

“예. 수도 북부에 가지 않으셨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시금 찻잔에 집중하던 손이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찰나에 모든 것을 알아챈 아이작의 잇새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북부에 가셨군요.”

“잠깐 갔다 왔어. 마력의 파장으로 인한 산사태 때문인지, 요새 오두막 근처에 접근하는 새끼들이 많더라고. 얼굴이나 좀 볼까 해서.”

“혹시 누군가 만나셨습니까? 황제라던가 아멜리오 백작이라든가…….”

“아쉽게도 데르키안은 못 만났어.”

그 말은 후자는 만났다는 말이었다. 그렇게나 신신당부했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제가 당분간은 북부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그쪽으로 향했다고요.”

“…….”

“얼굴 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고 제가 몇 번이나…….”

“내 얼굴은 안 보였으니 걱정하지 마. 착실하게 로브로 가리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일을 망칠 뻔했다.

잠시 벌렁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린 아이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가서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그냥 몇 마디만 해 줬어. 행복한 듯 웃고 다니는 것이 거슬려서 말이야.”

오두막을 살피고 내려와 길가를 거닐다 로레이나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처음에는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줄 것인지 명백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아니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미소가 기억 속 누군가와 기가 막히게 닮아 있었던 것도.

“자기 미래가 어떠한지, 딱 그 정도만 알려주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