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보던 아이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사벨 데프론은 늘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제멋대로였다.
물론 앞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것이라는 건 상자 속에 누워있던 이사벨을 공작저로 옮겨오면서 각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다루기 힘들 줄은 몰랐다.
이렇게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설설 기기 위해서 이사벨을 깨운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달랐으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처음에는 이사벨이 선조가 남긴 보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이 방에 남아있는 글귀나 이사벨이 데프론 공작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았을 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아이작은 이사벨이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던 말을 기억했다.
‘은발에 녹안이라. 딱 봐도 데프론이군.’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은 한 글자마다 온갖 안 좋은 감정들이 묻어났다.
불쾌, 혐오, 증오, 원망, 멸시.
살이 떨릴 정도의 그 시선을 받아내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서로가 이렇게 싫어함을 드러내는데 ‘보물’이라고 지칭했을 리가 없다고.
아니나 다를까, 데프론 공작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마침 타이밍 좋게도 이사벨이 그 보물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그 ‘꽃’은 어떻게 되었어? 찾았어?”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작가의 보물은 어떤 특별한 꽃이었다. 사실 공작가만의 보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긴 했다.
공작가에 내려오는 정보에 따르면 그 꽃은 누군가가 항상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이작 역시 그 꽃이 어디에 피어있는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 꽃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긴 했다.
꽃이 있는 장소에 대한 설명이 다소 모호하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그거 하나 찾는데 그렇게 오래 걸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가장 신성한 공간에 피어난다고 했잖아.”
“그 설명만으로는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짓씹는 이사벨을 보며 아이작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왜 저 여자가 그 꽃을 찾으려고 하는 거지?’
기존에 읽었던 설명에 의하면 그 꽃은 ‘아브로고’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꽃’이었다.
보랏빛 꽃잎을 가지고 있으며, 멀리서 보아도 한없이 반짝인다는 아름다운 생김새를 생각해 보면 누군가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만…….
‘이사벨 데프론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
왜 세상에 남은 마지막 마녀로 유명했던 여자가, 자신의 약점이 될 물건을 굳이 세상에 들춰내려고 하는가.
그런 건 곧바로 잘라내고 꽁꽁 묻어 어딘가로 치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금 머리를 내밀려고 하면 나오지 못하게 또다시 밟아주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벨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아이작이 원하는 것은 하루빨리 레오나드를 없애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었다.
이사벨이 역시 그의 계획에 동참해 주었기에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서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할 때 아이작 역시 아사벨에게 들은 것이 있었으니까.
‘분명 칼리드와 엘레노아. 이 두 사람에게 유감이 있다고 했었지.’
그녀가 칼리드를 원망한다는 것은 제국의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벨이 아멜리오 백작 부인이었던 엘레노아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핏줄이 레오나드와 로레이나라는 점에서 아이작에게는 이미 충분히 이득이었기에 굳이 알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귀족 회의 날 슬쩍 떠보았을 때 로레이나 역시 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으니, 이사벨이 직접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아이작이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하고 넘겼다.
그가 에녹에게는 이사벨에 대한 것을 끝까지 공개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나저나 좀 이상하단 말이야.’
아이작이 보기에 이사벨은 이미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종족들은 아직 이사벨의 존재에 대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둘을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제 아비 못지않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레오나드가 거슬린다면 로레이나만 없애버려도 되는 일 아닌가.
‘평생의 반려’는 이종족이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들었다.
그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은 익히 들었으니 반려의 언약을 맺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것을 이사벨 역시 알 텐데도 그녀는 자꾸만 미지근하게 굴었다.
꼭 레오나드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닌 것처럼.
불쑥 든 생각에 아이작이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려던 그때, 이사벨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브로고를 찾으면 뿌리째 그대로 들고 와. 가진 힘만큼 예민한 꽃이니까.”
“그 꽃으로 무언가를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그러니 조심히 들고 오라는 거야.”
“그래 봤자 꽃 아닙니까. 약재라도 만드실 생각…….”
아이작이 저도 모르게 불만을 표출하며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이사벨이 갑작스레 들고 있던 찻잔을 아이작 쪽을 내던졌다.
당연하게도 아이작의 몫이었다.
다행히 찻잔은 아이작의 바로 옆을 지나, 뒤쪽의 벽에 맞고 떨어졌다.
쨍그랑.
하마터면 찻잔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을 뻔했던 상황에 아이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멍청하기는. 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 평범한 꽃이 아니라 아브로고라고. 마법을 무력화시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
“예전에는 최고급 갑옷에 필수로 들어가던 재료라 상상도 못 할 금액으로 비싸게 거래되던 꽃이야. 100년에 한 번 피는 거라 그만큼 더 비싸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 갑옷을 입으면 마법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거군요.”
“갑옷뿐만이 아니야. 꽃을 사용한 물건은 근처에 두기만 해도 효력이 있어. 그 일대에 일종의 보호막이 형성되는 셈이야.”
생각보다 강력한 힘에 아이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더더욱 세상에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영구적인 겁니까?”
“글쎄. 꽃 하나를 통째로 쓰면 그럴지도 모르지. 워낙 귀한 물건이라 그런 적은 없었지만.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이사벨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입가에는 언제나 그러했듯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법은 생각보다 강력한 것이어서 어쩌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 예외가 된 대상도…….”
“…….”
“어떻게든 끌어들여서 완전하게 만든다는 걸.”
완벽한 해결책을 만들지 않는 이상 영원히.
말을 마친 이사벨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더니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이리저리 굴리던 눈이 어느 한 곳에 못 박히기라도 한 듯 고정되었다.
톡톡톡. 진한 갈색 계열의 나무로 된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는 거야? 황제 쪽에 사람이라도 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시녀 중에 몇몇 섞어놓았으니 괜찮습니다.”
“그래 봤자 집무실 근처에도 못 가는 것들 아니야? 물어오는 정보가 영 시원치 않은데.”
“안 그래도 그것이 걱정되어서 손을 써놓았습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뭘 어떻게 했는데?”
이어지는 질문에 아까와는 달리 아이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살짝 움츠려 있던 어깨 또한 곧게 펴졌다.
“믿을 만한 사람을 황궁으로 들여보낼 생각이거든요.”
“믿을 만한 사람? 누구?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 사람을 데르키안이 곁에 둘 리도 없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에 잠깐 망설이던 아이작은 결국 계획하고 있던 바를 털어놓았다.
“에녹을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게 할 생각입니다.”
“에녹? 네 아들인 에녹 데프론을 말하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그 애한테 말은 한 거고?”
“물론입니다. 에녹이 직접 하겠다고 말했는걸요.”
“흐음.”
이사벨이 나직한 탄성을 뱉었다.
그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하실 안에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도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한 곳을 향해 있었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작이 몸을 돌렸을 때 등 뒤로 이사벨이 물었다.
“너는 그 애를 얼마만큼 믿어?”
“…….”
“정말 완전한 네 편이라고 생각해?”
이사벨이 보고 있던 것은 지하실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분명 그곳에 눈이 박혀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마치 문 너머에 누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설마…….”
불길한 기분이 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이작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손을 뻗어 문을 확 열었다.
분명 자신은 확인하는 입장인데 마치 무언가를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했던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며 은발이며, 그 어떠한 것도.
그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사벨이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톡톡톡.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소리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방 안을 울렸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러신 겁니까.”
아이작이 이번에는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대화 중에도 자신을 보지 않고 그 너머를 보았던 행동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문밖에 있는 누군가를 살피던 것이든 아니면 그저 대화 상대를 농락하기 위해서이든 간에.
그리고 이어지는 말과 입술을 말아 올리는 이사벨의 모습에 아이작은 후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네가 너무 경계를 안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아무리 여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조심 좀 해야 하지 않겠어?”
이사벨은 시선을 살짝 내려 화를 참듯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느릿하게 훑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마디가 희게 붉어졌다.
눈앞의 상대가 순혈 드래곤도 죽였다던 마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사실 놀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애초에 이사벨은 그런 종류의 장난에 흥미가 없었다.
놀리는 것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되어야 재미있는 법이다.
옆을 지나는 벌레에게 연기까지 하며 장난을 치는 인간은 없다. 이사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치면 그대로 죽어버릴 인간에게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에녹 데프론이군.’
이사벨은 방금까지 문 앞에 선명하게 느껴지던 기척을 곱씹었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숨긴 모양이었으나 이사벨에게는 어린아이가 탁자 밑으로 머리만 넣고 다 숨었다고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수련 좀 했다고 그쪽을 본 것을 눈치채고 부리나케 몸을 숨기던 기척을 생각하며 이사벨은 웃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