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허억…헉…….”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정원에 사람의 인영이 급하게 뛰어들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마냥 다소 급박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데프론 공작저임을 생각했을 때 낯선 이는 아니었다.
안도했다는 듯 숨을 들이쉬는 그림자의 주인공은 이 저택의 작은 주인이었으므로.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에녹 데프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너무 많은 말을 들었던 탓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내용을 다 들은 것은 아니었다.
에녹이 지하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대화가 한참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였으니까.
에녹은 제 숨소리가 어느 정도 잦아들 때까지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을 뒤집은 혼란은 폭풍우를 만난 바다 마냥 좀처럼 잠잠해지지를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나직한 한숨을 흘린 에녹이 이마를 짚었다.
지하로 내려가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발견하기 전까지 에녹은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렇게 쫓던 암살자의 흔적을 찾아내었다는 쾌감과 동시에 그 암살자 뒤에 누가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에서 어떤 비밀을 알게 될지 걱정되어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정말 맹세코, 에녹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문 안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에녹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내놓고 나오는 공손한 어조가 몹시도 낯설었다.
‘누구랑 이야기하고 계신 거지?’
처음에는 로레이나의 암살 시도가 있던 날, 용케 살아남아 도망쳤던 암살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아이작 데프론이 존댓말을 쓰는 상대였다.
물론 평소에도 좋은 사람 행세를 위해 존댓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품은 마음이 어떠하건 간에 저렇게 예의를 차려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작이 그렇게까지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카일룸 제국 내에서 레오나드와 제럴드 정도인데, 그 둘은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데프론 공작저에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이작과 뜻을 함께하지 않을 사람을 꼽으라면 그 둘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혹시나 다른 국가의 세력까지 끌어들인 건가 하는 생각에 에녹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그거 하나 찾는데 그렇게 오래 걸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가장 신성한 공간에 피어난다고 했잖아.’
생소한 목소리였다. 아니, 낯설긴 하지만 사실은 이미 들어본 목소리였다.
에녹은 저 다소 높은 음성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래. 그 여자였다. 셀리아 데프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에녹의 여동생.
왜 아이작이 양녀에게 저렇게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일단 대화 내용을 들어보자면 그들은 어떤 ‘꽃’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꽃.
이어지는 아이작과 셀리아의 대화에 에녹은 그것이 자신이 찾던 데프론 공작가의 보물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마법에 관한 것을 찾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확답을 얻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 여자는 도대체 뭔데 자신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이 제 아비를 저렇게 벌벌 떨게끔 만드는 걸까.
에녹이 그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쯤,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은 생각보다 강력한 것이어서 어쩌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 예외가 된 대상도…….’
‘어떻게든 끌어들여서 완전하게 만든다는 걸.’
꼭 그런 사람이 이미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에 에녹이 고개를 갸우뚱한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대로 몸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에 에녹은 깨달았다.
‘들켰구나.’
에녹은 그 즉시 자리를 피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물론 안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더 있었으면 다른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뭔가 시도도 해 보기 전에 끝났을지 몰라.’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더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동안 그토록 고민하던 것을 알아내었으니 지금은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잠시 생각하던 에녹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책을 끝내고 이제야 돌아가는 양 그렇게.
‘날이 밝자마자 편지를 써야겠어.’
아무래도 황궁에서 결정을 내리길 기다릴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 * *
“……이나.”
“…….”
“로레이나.”
“으음…….”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눈은 잘 떠지지 않았다.
어젯밤에 너무 울었기 때문일까.
한참을 깜빡여도 좀처럼 빛이 들어오지 않던 시야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트였다.
이윽고 눈앞에 보인 건 자기 전까지도 보았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레오나드?”
“응, 나야.”
나직이 대꾸한 레오나드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눈가를 찌르던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이 살갗을 스치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멍하니 적막 속에 있자니 지난 밤 있었던 일이 다 꿈처럼 느껴졌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그 손길을 받고 있던 나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환한 빛에 슬쩍 몸을 일으켰다.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몇 시예요?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난…….”
“아니야. 그냥 누워있어.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 그래.”
“그래도 오늘 오두막에 같이 가보기로 했잖아요. 슬슬 일어나야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네?”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레오나드가 나를 도로 눕히며 입을 열었다.
“너는 그냥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혼자 다녀올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할 말이라는 게 이거예요?”
“응.”
레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뱉는 말에는 어떠한 망설임이나 흔들림도 없었다.
그것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 오두막을 본 건 여기서 나뿐인데 나 없이 어떻게 하려고?
“말도 안 돼요. 당연히 저도 같이 가야…….”
말을 하며 한쪽 발을 바닥에 내린 순간이었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가 싶더니 몸이 저절로 침대에 내려앉았다.
미끄러질 뻔한 것을 재빨리 받아낸 레오나드가 내 어깨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옅은 한숨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런 몸으로 산을 오르겠다고?”
이어지는 음성에는 걱정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받은 나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방금 일어나서 이런 상태인 줄 몰랐어요.”
“이제라도 어떤 상태인지 알았으면 다시 누워. 아까처럼 갑자기 움직일 생각은 하지 말고.”
“어차피 내가 가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 오두막을 본 건 나랑 에녹뿐이라고요. 혼자 갔는데,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그럼 그때 다시 와서 널 데리고 가면 그만이야.”
“왜 굳이 그런 수고를 해요? 이해가 안 가요.”
레오나드만 왔다 갔다 하는 거면 모를까 기사들까지 같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한 번으로 끝날 일을 왜 두 번 움직이게 만드느냔 말이야.
‘게다가 나 때문에 인력이 나누어져야 하잖아.’
레오나드가 나만 여관에 두고 갈 리는 없었다. 분명 호위 기사들을 배치하고 가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비효율적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혹시 내가 아파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
잠시 뜸을 들이던 레오나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나를 살피는 듯했던 시선 역시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고작이라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레오나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적안이 나를 질책이라도 하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봐도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이건 너무 비효율적…….”
“그놈의 효율, 효율.”
짓씹듯이 중얼거린 레오나드가 내 어깨를 잡은 손을 놓더니 양 뺨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제발 네 몸 좀 생각하라고-.”
이어지는 말은 숨을 내뱉는 것에 맞춰 조금씩 끊어져서 들렸다.
“내가 그렇게…….”
“…….”
“그렇게 말했는데.”
큼지막한 손에 의해 얼굴이 위로 향한 나는 자연스럽게 적안을 눈에 담았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쩐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화가 잔뜩 났는지 활활 타오르는 눈이 슬픈 빛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황궁으로 올라가던 중 어느 여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내가 미안해요.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불안한 일이 많은데 레오나드와의 사이까지 틀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레오나드가 언제 어떤 기억을 잊게 될지 모르잖아.’
그러니 지금부터는 되도록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었다.
어느 정도 잊더라도 그 안에 행복한 순간만 남아있을 수 있도록.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정신 차리자.
‘이건 최악의 경우고 가장 급한 건 데프론 공작을 막고 레오나드의 저주를 푸는 일이야.’
내가 알기로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건 셀리아뿐이지만, 원작에는 없던 일이 생겼으니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저주를 풀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생겼을지도.
그렇게 되면 더는 저주 때문에 레오나드가 고통받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그 오두막에 가봐야 해.’
이건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그 오두막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멀쩡히 있던 오두막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황궁으로 돌아간 사이에 오두막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문양…….’
나는 오두막 벽에 가득했던 알 수 없는 그림과 문양들을 기억했다.
그것들을 해독하면 무언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오나드 말 따라 이 몸으로 산을 오를 수는 없으니…….
“레오나드.”
“왜…….”
“키스해 줘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나를 껴안다시피 가까이 있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갑자기 무슨…….”
“아, 생각해 보니 굳이 키스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재빨리 대꾸한 나는 레오나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뺨을 감싸 내 쪽으로 끌었다.
쪽-.
부드러운 것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레오나드를 보며 나는 말갛게 웃었다.
“음. 역시 이걸로는 안 되는 모양이네요.”
“…….”
“조금 더 하면 나아질 것도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일순 시야가 뒤집히는가 싶더니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천장을 가리며 레오나드가 성큼 다가왔다.
“……그래. 조금 더 하면 너도 알겠지.”
뭘 알 거라는 거지?
알 수 없는 말에 살짝 의아했으나 곧 그 생각은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부딪혀오는 입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