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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96화 (96/144)

#96화

다이아나가 방에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작게 노크를 한 뒤 방으로 들어선 다이아나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다이아나한테 부탁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설마 직접 약 먹는 걸 도와주는 것일 줄이야.’

어쩐지 안 해도 될 일을 시킨 것 같아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 민망하게 뭐 이런 것까지 부탁하고 그래.

“약 갖다줘서 고마워요. 알아서 먹을 테니 인제 그만 가서 일해도 괜찮아요. 다이아나 바쁘잖아요.”

“아니요. 오늘 제 임무는 로레이나를 챙기는 일이에요. 폐하께서 직접 시키신 일인 걸요.”

“그렇다고 다른 일을 안 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제 말이 맞죠?”

“아, 그게…….”

정곡을 찔렸는지 다이아나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헨티슨 공작가가 레오나드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다이아나는 신입 기사다.

날 돌보는 일로 본래 업무에서 빠지는 건 다른 기사들에게 일종의 특혜로 보일 수 있었다.

나한테는 전속 시녀인 메리도 있으니 분명 말이 나올 텐데 레오나드가 그렇게 두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일단 다이아나가 그러길 원하지 않았을 테고.’

다이아나의 성격상 이를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나를 돌보다가 레오나드가 오면 그제야 본래 업무를 하러 갈 것이 분명했다.

원래 여기에 도움이 되려고 온 것인데 허약한 몸 때문에 되레 짐이 된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마음이 불편한데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시간 모자를 텐데 가 봐요. 제가 못 가서 기사들이 반으로 나누어졌잖아요.”

“로레이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괜찮아요. 기사들이 다 알아서 할 거예요. 그냥 몸 빨리 낫도록 편히 쉬면 돼요. 그것을 제가 돕는 게 폐하의 명령이었으니까.”

“폐하께는 제가 나중에 말할 테니 다이아나야말로 신경 쓰지 말아요. 저는 메리를 부르면 되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다이아나도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내가 한 말에 미처 반박하지 못했던 것을 보아하니 할 일이 많다는 건 사실인 듯했으니까.

그러니 성큼성큼 다가온 다이아나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은 것은, 전혀 예상했던 바가 아니었다.

“다, 다이아나?”

“제발요. 제가 돕게 해 줘요.”

“왜 이래요? 그만 일어나세요!”

놀란 나머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다이아나가 손을 뻗어 만류했다.

“부탁이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로레이나한테는 미안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한 일이요?”

고개를 갸웃하자 다이아나가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긴장했는지 바닥에 내려놓은 손이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제가 폐하께 다 말했거든요.”

“무엇을요?”

“로레이나가 저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었던 거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정말 미안해요.”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다이아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레오나드가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다이아나가 말한 거였구나.’

뭐,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굳이 누군가 레오나드에게 말한다면 다이아나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걸 생각해서 다이아나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거였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레오나드에게 말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레오나드 일인데 당사자가 모르면 안 되지. 지난밤 레오나드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일이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괜찮아요.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었어요.”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될 바에야 차라리 먼저 아는 것이 낫다는 것도.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알겠죠?”

다이아나의 손을 잡으며 토닥이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축 처져있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 사실, 다이아나에게는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나와 친해졌다고 한들 평생을 알았던 레오나드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헨티슨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레오나드를 위해 힘썼고 그건 다이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내 말 때문에 레오나드를 거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래. 그게 맞는 건데 다이아나는 이해를 바라지 않고 사과를 건넸다.

솔직히 그래서 조금 놀랐다.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기도 했고.

“고마워요.”

“……뭐가요? 저 지금 엄청 잘못한 상황인데.”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고마워요. 제 막무가내식 부탁을 못 들어줬다고 사과하는 거잖아요.”

다이아나는 좀처럼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는 더 설명하는 대신 약을 먹기 위해 누워있던 몸을 살짝 일으켰다.

생각해 보면 ‘로레이나 아멜리오’로 살게 된 후부터는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았다.

그것이 본래 로레이나의 인연이든 아니면 내가 새로 만들어간 인연이든 간에.

그중 다이아나는 후자였다. 오로지 내가 만든 인연.

그런 사람이 여럿인데 아무도 없는 이전 세계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다니.

‘아직 멀었구나.’

지금까지만 해도 이전 생에 비하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그러니 나는 만족했다.

설사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내가 원작처럼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만큼이나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하나면 나쁘지 않았다.

“약 좀 줄래요?”

“아, 여기요!”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다이아나가 물컵과 약을 건네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어제 쓰러졌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어제보다는 조금 괜찮은 거 같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꿀꺽꿀꺽.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앉아 물컵을 받아 약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아직 알약 형태의 약은 없는 모양이었던지 가루약이었다.

생각보다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나를 보던 다이아나가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렸다.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폐하가 왜 걱정하셨는지 알겠네요.”

“네?”

“얼굴이 너무 창백하잖아요. 식은땀도 흘리고.”

“아무래도 감기가 심하게 걸렸나 봐요.”

“하긴 요새 일이 너무 많았죠. 산에 안 올라가고 쉬길 잘했어요. 같이 갔다가는 오두막까지 도착도 못 하고 쓰러졌을 거예요.”

“하하하…….”

나는 물컵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나 심각해 보이나? 거울을 안 봐서 잘 모르겠다.

약도 먹었겠다, 잠시 다이아나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고 곧 메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백작님, 다이아나 님.”

“좋은 아침이야, 메리. 나 보러 온 거야?”

“당연히 와야죠. 제가 백작님 시녀인걸요. 어젯밤부터 오고 싶었는데 못 온 거라고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메리가 입술을 툭 내밀었다. 왜 못 왔는지는 알만했다.

‘안에 레오나드가 있으니 기사들이 들여 보내주지 않았겠지.’

그리고 설사 내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제는 메리를 만나기 좀 곤란했다.

펑펑 우느라 부어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백작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제가 이럴 때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같이 작게 웃던 메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그리고…….”

주섬주섬 옷 주머니를 뒤지던 메리가 하얀색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기사님들이 이거 백작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이게 뭐야?”

“전해드리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 헨티슨 공작님이 보내신 거라고 하셨어요.”

‘제럴드가? 아, 설마 내가 부탁한 편지인가?’

황궁을 떠나오기 전 제럴드에게 데프론 공작을 살펴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편지를 받아들었다.

설마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어쩐지. 생일 연회를 그냥 열 리가 없지.’

소문에 의하면 엄청 성대하게 연다던데 지금 상황에 그렇게까지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깨끗한 이미지에 목메는 아이작 데프론이 굳이 욕먹는 일을 자처하진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서둘러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보낸 시점을 생각했을 때 분명 그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편지를 펼치자 초반에는 북부에 잘 도착했냐는 인사말이 적혀있었다.

정성스럽게 적어준 제럴드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읽을 시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최대한 빨리 넘겼다.

본론은 편지지 중간쯤 이르자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좀 뜻밖이었다.

“양녀……?”

아이작 데프론이 양녀를 들였다고 한다. 연회 중간에 귀족들에게 소개했다고.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힌 일인데 더 놀랄 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공작 가의 먼 방계라고 합니다. 우연히 찾아내었다고 하더군요. 이제라도 양녀로 들여 잘 돌볼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대로 쥐고 있던 편지지를 구겼다.

혹시라도 안에 적힌 글자가 망가질까 그리 세게 쥐지는 않았지만.

‘……거짓말.’

방계는 무슨. 그랬다면 데프론 공작저가 그렇게 비어있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설사 양녀로 들인 여자가 정말로 방계였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작 데프론은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방계를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돌보는 것도 할까 말까인데 양녀로 들인다고?

그렇게 성대하게 연 연회에서 귀족들에게 자랑하듯 소개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구겨진 편지지를 다시금 펼쳤다.

제럴드가 보낸 편지에는 죄가 없고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이걸 끝까지 읽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편지 후반부를 향해 고개를 내린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애써 핀 편지지가 다시금 손에 처참하게 구겨졌다.

“백작님, 왜 그러세요?”

“편지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대요?”

메리와 다이아나가 연달아 물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손아귀를 벗어나 바닥에 떨어진 편지뭉치를 바라보았다.

편지 끝자락에 있던 낯설면서도 익숙한 글자가 잔상처럼 남아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름이 셀리아 데프론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의 여주인공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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