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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97화 (97/144)

#97화

머리가 멍해졌다.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래도 편지 마지막 줄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로레이나 아멜리오인 이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본 것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으니 굳이 말하자면 제럴드가 잘못된 정보를 적어주었다는 건데…….

‘……이것도 말도 안 되기는 마찬가지지.’

제럴드가 레오나드 옆에서 일상을 기록한 세월이 몇 년인데 이런 걸 틀린다고?

그리고 하필 틀린 이름이 여주인공 이름인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 이게 사실이라는 건데.

‘이게 도대체……무슨…….’

너무 어이가 없는 상황에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셀리아라니. 30년이나 이른 여주인공의 등장이었다.

‘……이렇게까지 바뀔 수도 있는 건가?’

원작이 틀어진 것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건 경우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엑스트라 하나가 살기 위해 몸부림 좀 쳤다고 여주인공이 몇십 년이나 일찍 태어난단 말이야?’

원작이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누가 그냥 설정만 가져가서 소설 자체를 다시 쓴 정도인데요.

물론 셀리아가 아이작 데프론의 양녀가 되었다는 소식도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그건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선량한 여주인공이 알고 보니 사실은 흑막이었다더라-와 같은 전개는 소설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쯤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도 심하잖아.’

그러면 원작에서는 왜 그렇게 레오나드에게 헌신적이었던 건데?

레오나드가 차갑게 쏘아붙이며 밀어내도 금방 웃으면서 다시금 찾아왔잖아.

바라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행복뿐이라고. 그렇게 다정하게 속삭였잖아.

‘안녕하세요, 폐하! 오늘은 저주를 풀 마음이 좀 드시나요?’

‘세상에. 날씨 좀 보세요. 저주를 풀기 딱 좋은 날이네요.’

‘사실 저 되게 예쁘거든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주를 풀면 바로 보일 텐데!’

‘제발 네 저주 좀 풀자’는 말을 여러 방식으로 외치며 방긋 웃던 셀리아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오나드는 그런 셀리아를 열심히 밀어냈고.

모진 말은 물론이고 가끔은 저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의성이 다분한 무시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그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셀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런 사람이 사실은 흑막이라…….’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무슨.

로맨스가 다 얼어 죽었네. 이거 사실 장르가 공포, 스릴러 뭐 이런 거 아니야?

게다가 지금 생각해 보니 제목이 <크루시아>인 것도 이상했다.

셀리아도 아니고 레오나드가 주인공인 1인칭 소설인데 웬 변함없는 사랑?

‘셀리아를 염두에 두고 지은 건가? 레오나드가 아무리 밀어내도 셀리아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생각은 다시금 ‘셀리아는 착한 사람이다’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셀리아가 아이작 데프론에게 붙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물론 가능성은 있었다. 데프론 공작이 아무것도 모르는 셀리아를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아주 우연히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거였고.

‘하지만 하필 그 이름일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이름이 똑같은 경우가 두 번이나 생기는 건 우연이 아니지.’

나는 이미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엘레노아의 일기장에서 보았다.

그때야 처음이었으니 우연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하필 원작 여주인공 이름이 이렇게 등장한다고?

셀리아라는 이름은 그렇게 흔한 이름도 아닌데?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명백한 상황이었다.

‘그럼 로브를 쓴 그 여자도 셀리아였던 건가?’

원작이 너무 틀어져 버려서 알고 있는 것 중 뭐가 맞는 것인지 분간하는 것이 힘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난데없이 이름 모를 마녀가 튀어나왔다고 믿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 여자는 둘 중 하나겠지. 셀리아든가 이사벨이든가.

‘아무래도 일기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메리. 내가 가져온 짐 어디에 있어?”

“옆 방에 폐하의 짐과 같이 놓아두었어요. 뭐 갖다 드릴까요?”

“응. 가서 어머니 일기장 좀 가져다줘. 어떤 건지 알지?”

“백작가를 떠나오실 때 집사님이 챙겨주신 거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그거야.”

일단 내가 읽은 부분은 다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만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몰랐다.

글씨 이외에 다른 숨겨진 단서가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자 무언가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더는 묻는 말이 없었고 메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메리가 노트 하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메리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요.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메리가 일기장을 내밀었다.

메리가 왜 그런 얼굴이었는지는 일기장을 받아든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작게 중얼거린 말에 메리가 뛸 듯이 몸을 움직이며 손을 내저었다.

“제,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백작님! 가지러 갔을 때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있었어요!”

“진정해, 메리. 네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아니까.”

알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게 변해버린 일기장은 여기 있는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런 변화는 누군가가 손을 쓴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새것처럼 깔끔했던 일기장은 그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기라도 하는 마냥 겉표지 색이 바래있었다.

제법 보라색까지 돌던 갈색 표지에 회색기가 섞였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옆면을 보자 안에 종이들 역시 누렇게 변해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그전까지 봤던 것들이 다 꿈인 것만 같아서.

‘……일단 열어보자.’

일기장 속 글씨가 사라지는 것도 봤는데 일기장이 갑자기 낡은 것쯤이야.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마법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기존에 존재했다는 건 알았으니 이 세계 사람들은 꽤 잘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마법과는 영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다 온 나는 아니지.’

그래도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떠올릴 정도는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 희한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이제는 무슨 일이 터져도 제법 담담할 것 같…….

“……콜록. 콜록!”

“로레이나, 괜찮아요?”

“콜록!”

나는 다이아나의 말에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연이어 기침했다.

목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목이 칼칼했다.

‘이번 감기 진짜 독하네.’

약 먹고 좀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도로 아파지다니.

아까부터 머리도 울리고 어쩐지 가슴이 불에 덴 것처럼 홧홧거리기도 하는 것이, 확실히 뭔가 좀 이상했다.

‘……토할 것 같아.’

아무래도 빨리 살펴보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레오나드의 말 때문이 아니라 정말 지금은 한 발자국 걸을 힘도 없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내쉬며 일기장을 펼쳤다.

이러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럴 일은 없었다.

일기장을 편 순간, 심장이 저 심연 밑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졌으니까.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일기장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일기장은 백지였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는 양 깔끔한 백지.

‘와, 뭐 이런 일이…….’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친 느낌이었다.

왜 나머지 글자들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몸이 떨리고 심장이 세게 뛰는지.

“우욱.”

누군가 뇌를 잡고 흔들기라도 하는 마냥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살려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럼에도 차마 그 말을 뱉을 수 없었던 것은 그를 대신해서 목을 역류한 무언가 때문이었다.

“우욱. 콜록콜록…….”

나는 재빨리 한쪽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토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몸 상태 진짜 거지 같네.

“메리, 미안한데 나 손수건 좀.”

“…….”

“그리고 좀 씻어야 할 것 같으니까 준비도…….”

속이 다시금 울렁거려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는 다이아나와 메리의 표정이 좀, 아니 많이 이상했다.

꼭 심각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로, 로레이나.”

“네?”

“피, 피가……!”

피라고? 다이아나의 손짓에 내가 다시금 고개를 내린 순간이었다.

미처 막지 못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더니 일기장 위로 떨어졌다.

투두둑-.

그때 알았다. 하얀 종이를 물들이는 선명한 붉은색이 이토록 강렬하다는 것도.

아까부터 코끝을 찌를 듯 퍼지는 혈향도.

‘왜 갑자기 피가…….’

하지만 이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는가 싶더니 애써 몸을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가 힘없이 무너진 탓이었다.

“백작님!”

“로레이나!”

다이아나와 메리가 소리치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큰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그중 무엇도 잘 와닿지 않았다. 떠나기 전 밝게 웃던 레오나드의 얼굴만 떠올랐다.

‘다녀오면 못한 데이트 하자.’

큰소리를 내며 닫히던 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본래 자리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밑으로 꺼졌다.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의지를 꺾은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 어떡하지.’

약속 못 지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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