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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98화 (98/144)

#98화

레오나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레이나가 말한 부근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우려했던 3차 산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이 그를 돕기라도 한 듯 날씨도 맑았다.

중간중간 산사태로 망가진 길이 있기는 했지만 못 지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과정이 지나치게 순조로웠다. 마음이 급했던 레오나드에게는 퍽 다행인 일이었다.

‘괜찮을까.’

침대에 누워있을 로레이나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도 로레이나는 아팠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아예 색채가 없는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봄날의 꽃송이 같던 달콤한 머리카락은 생기를 잃고 푸석푸석했다.

근래 로레이나의 모습을 그리던 레오나드가 머리를 짚었다.

여관을 떠나오기 전 나누었던 대화가 절로 떠오른 탓이었다.

‘레오나드.’

‘다녀와요. 몸조심하고요.’

최대한 빨리 다녀오려 급하게 방을 나서긴 했지만 레오나드는 모르지 않았다.

첫 번째 말이 끝나고 두 번째 말을 뱉기 전까지 짧지 않은 간극이 있었다는 것을.

무언가 생각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다분하던 그 순간을.

‘하려던 말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곧바로 물었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로레이나는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서, 먼저 말해 주는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불러놓고 저 스스로도 놀란 것 같은 얼굴이었던 사람을 붙잡고 독촉할 생각도 없었다.

이런 일은 돌아가서 차근차근 대화해 보는 편이 나았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옆에서 걷던 기사가 뱉은 말이 레오나드를 상념에서 건져 올렸다.

고개를 들자 다른 사람이 말했던 대로 커다란 나무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두막이 있군.”

“오두막이 보이십니까?”

“그래. 저기 있잖아.”

레오나드가 턱짓으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하지만 기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에 장난하냐고 뭐라 하려던 레오나드는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다 비슷한 감정을 흘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하지만 저렇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못 볼 수가 있지?

오두막은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꽤 컸다.

짙은 갈색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곳에서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기사들이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데다가 이들이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을 할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이 산에 올라올 수 없었다.

아니, 레오나드의 사람이 되는 것부터 불가능했다.

“일단 내가 들어가 보겠다.”

“혼자 가시려는 겁니까? 안 됩니다, 폐하!”

“여기 나 말고 저 오두막이 보이는 사람 있나? 그럼 같이 들어가지.”

“그건…….”

기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려 아까부터 종이를 들고 머뭇거리던 남자를 보았다.

로레이나도 없고 제럴드도 없으니 임시로 온 기록관이었다.

“나한테만 오두막이 보였다고 적어. 다른 기사들한테는 안 보였다고.”

“……네!”

“꼼꼼하게 기록해야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믿어.”

“명심하겠습니다.”

사각사각. 펜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레오나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저 오두막에 무언가가 있다.

머리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굴러갔다.

‘분명 저 오두막을 봤다고 한 사람이 셋이었지.’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로레이나 아멜리오. 에녹 데프론. 이렇게 셋.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것이 이 셋에게만 보이는 것이라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셋만의 공통점이 있다거나.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종족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좋은 예시도 있었지만, 에녹이 포함된 이상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뭘까.’

이 셋을 잇는 무언가는.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레오나드는 오두막 바로 앞에 도달했다.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뻗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특유의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머리를 어지럽혔다.

문을 조금 더 밀기 위해 레오나드가 팔을 뻗었다.

혹시 몰라 레오나드를 따라 움직이던 기사들이 그것을 보며 멈칫했다.

그들에게는 레오나드가 허공에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기사들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레오나드는 조심스레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당연하게도, 그와 동시에 레오나드의 시야에서 기사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기사들에게는 여전히 레오나드가 보였고 레오나드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밖에서도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기사라고 한들 직접 보지 않으면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레오나드였고.

‘방심하더라도 위험한 일은 안 생기겠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기사들의 모습에 레오나드는 밖의 상황에 관심을 끊었다.

이제부터는 오두막 안을 살펴볼 차례였다.

일단 오두막 내부는 생각보다 어두웠다. 벽지와 바닥 모두 다 검은색에 가까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방안에 짙게 깔린 어둠이 좀먹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말 그대로 어두운 계열의 공간 때문인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던 것은 큼지막한 상자였다.

레오나드는 한눈에 그것이 로레이나가 말한 이상한 느낌의 상자임을 알아보았다.

‘들어가면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커다란 상자가 있어요.’

‘그런데 느낌이 좀 뭐랄까.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해요.’

‘꼭 안에 사람이 누워있다가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요.’

로레이나가 말했던 것처럼 상자 뚜껑은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보기에 그것은 상자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온통 어두컴컴한 공간과 달리 제법 밝은 색채를 띠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그 용도로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쓴 것 같았지만.

저건 어떻게 봐도…….

‘……관 같잖아.’

애초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라니.

누가 봐도 관이 아닌가. 그러니 더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것일 터였다.

레오나드가 보기에도 저 상자는 사람이 누워있다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라.’

순간 헛웃음이 터졌지만, 그것을 웃음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이 단순히 상상이나 허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레오나드는 알았다.

‘어쩌면 마녀였을지도 몰라요.’

어젯밤 로레이나는 그날 낮에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았다.

선물을 사고 왔다가 로브를 쓴 여자를 만났으며 그 여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말을 마친 그녀가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알기로 이 세상에는 현존하는 마녀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저주를 풀기 위해 3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찾고 또 찾았다.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로 돌아다녔고 상상 이상의 많은 사람이 힘을 썼다.

그러니 지금처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난데없이 등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이렇게 쉽게 나타날 것이었으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레오나드에게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를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을 때는 나오지 않다가 저주를 풀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갑작스레 나타난 마녀라니.

그래. 꼭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내 저주를 풀어줄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했었나.’

로레이나는 어쩌면 그녀가 레오나드에게 호의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원래 알던 이야기와는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운명은 과연 운명인 모양이라고.

하지만 레오나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런 사람이 내 앞에는 코빼기도 모습을 안 비치고 로레이나만 보고 사라져?’

게다가 하필 그 타이밍이라니. 누가 봐도 로레이나가 혼자 있는 때를 노린 것 같지 않은가.

로레이나의 말대로라면 그 정체 모를 여자가 가장 먼저 찾았어야 하는 사람은 레오나드였다.

애꿎은 로레이나가 아니라.

그리고 로레이나를 찾아와 감히 그따위 말을 지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는 충분히 경계의 대상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적안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모습을 그리다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로레이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레오나드는 손가락으로 옆에 놓인 테이블을 느릿하게 쓸었다.

로레이나가 말한 대로 방에 있는 물건에서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꼭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 같아서 레오나드는 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일단 계속 살펴봐야지.’

그래도 자신에게 오두막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더라면 몸이 아픈 로레이나를 데리고 이곳에 다시 왔어야 했을 테니까.

침대에서 일어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좀처럼 몸을 가누지를 못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눈앞이 아찔했다.

‘빨리 살피고 돌아가자.’

레오나드는 테이블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상자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새겨진 그림과 여러 가지 문양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레오나드는 조용히 종이와 펜을 꺼내었다.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으니 똑같이 그려서 연구원들에게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리 복잡한 그림은 아니었고 일종의 수식 같은 것이었으니 따라 그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양까지 완벽하게 종이에 그린 레오나드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벽 한구석에 새겨진 작은 글씨들을 본 탓이었다.

‘이게 뭐지?’

다른 그림이나 문양들과 달리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크기를 보았을 때 일종의 비밀 표식 같아 보였다.

레오나드는 저도 모르게 벽에 새겨진 작은 글씨들을 읽었다.

“이사벨, 엘레노아…….”

그것의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칼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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