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기절했던 레오나드는 저 멀리 황궁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마차의 덜컹거림에 맞춰 눈을 떴다.
혹시라도 또 레오나드가 스스로를 해할까 싶어 다이아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아까와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로레이나를 안고 하염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황궁에 도착한 레오나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로레이나를 안고 곧장 침실 쪽으로 향했다.
미리 언질도 주지 않고 일정을 앞당겨 돌아온 주인 덕에 황궁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상황에 관해 뭐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복도를 거니는 레오나드는 제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지 간에 금방이라도 목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설사 그것이 신이라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가 내뿜는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가끔 숨쉬기 버거울 때가 있었다만, 지금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였다.
온몸을 찢어발길 것 같은 날카로운 기운에 황궁의 사용인들은 제 목이 붙어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며 재빨리 움직였다.
비교적 빠르게 레오나드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다 처리한 사용인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혹시라도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칠까, 시선을 내리자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긴 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분홍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늘 봄의 기운을 뿌리고 다니던 여자는 꼭 죽은 것만 같았다.
얼굴은 지나치리만치 창백했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일 정도로 왜소했다.
레오나드만큼은 아니지만 로레이나와 붙어있던 시간이 길었던 이들도 꽤 있었기에 모두 무슨 일인가 하고 초조한 기색이었다.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는 짐작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침실까지 가는 것도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레오나드에게 설명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결국 모든 뒤처리를 한 것은 그의 뒤를 따르던 다이아나였다.
“폐하께서 나중에 다 설명해주실 거예요. 일단은 각자 하던 일을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폐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 올 수 있도록 대기하시고요.”
“……저, 백작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누군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에 서둘러 레오나드를 뒤따라가려던 다이아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목이 메는지 돌아오는 답이 느렸다.
“그러길 바라야죠.”
* * * 다,임,공,유,금,지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다시 생기를 띄기 시작했던 황궁의 활기차고 발랄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황제의 비서관으로 잘 알려진 하프 엘프가 황제와 함께 북부로 향했다가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로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늘 사용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아멜리오 백작을 좋아하는 이가 많았기에 그녀의 상태를 묻는 사람들은 끊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곧 설명해주실 거라는 기사의 말과 달리 황제는 침실에 틀어박힌 뒤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백작을 데리고 칩거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동행했던 기사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으니 다른 이들이 소식을 알 길은 없었다.
처음에는 곧 나오겠지 싶던 생각도 어느덧 밤이 되고 그것을 넘어 하루가 꼬박 지나 이틀이 되고 나니 눈 녹듯이 사라졌다.
결국 황제의 최측근인 헨티슨 공작이 나서서 침실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 제럴드입니다.”
등 떠밀리듯 레오나드의 침실 앞까지 온 제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동안 레오나드를 옆에서 보필한 짬밥으로 지금과 같은 상태인 주인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레오나드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이아나에게 듣기로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죽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다른 이들이 등을 떠밀었다고 한들 정말 제 목숨만 중했다면 이렇게 쉽게 올라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제럴드는 안에서 응답이 들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곧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침실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희미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서, 이틀 전에 레오나드가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폐하?”
“…….”
“안에 계십니까? 괜찮으신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제럴드가 다시 한번 노크했다. 그래 봤자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나.’
조용히 탄식한 제럴드가 천천히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냥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레오나드마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손에 살짝 힘을 주자 문손잡이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다행히 문이 잠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제럴드는 곧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이상한 분위기에 제럴드는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손에 든 것을 꽉 쥐었다.
그것이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방에 멋대로 들어온 것에 대한 벌을 내리기라도 했을 시 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
“폐하?”
방에 완전히 몸을 들인 제럴드가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레오나드를 불렀다.
하지만 제럴드는 곧바로 레오나드를 찾을 수 없었다. 침실이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채 깜깜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두리번거린 제럴드는 그동안 레오나드의 침실에 꽤 드나들었던 경력으로 촛대를 찾아내었다.
위치를 알고 있기도 했지만, 커튼 사이로 미세하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초에 불이 붙었고, 제럴드는 촛대를 들고 방 안을 비춰보았다.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향한 불빛에 누군가의 인영이 드러났다.
이윽고 시야에 비친 모습에 제럴드는 놀라 숨을 삼켰다.
“……폐하?”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 주인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레이나를 끌어안고 있는 레오나드였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레오나드는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유리 공예품이라도 들 듯 로레이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침대까지 가는 과정이 꽤 험난했는지 곳곳에 엎어진 장식품이라든가 깨진 유리 조각들이 가득했다.
늘 단정하던 침대 시트도 누군가가 침입이라도 한 것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군데군데 찢어진 것 같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레오나드에게 뭐라 말을 붙이려던 제럴드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여실히 드러난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로레이나를 다시 만나고 피로가 사라졌던 눈에 다시금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다른 곳 역시 성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더 하얘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창백한 낯이었다. 로레이나를 감싼 팔이 파들파들 떨렸다.
다이아나의 말 따라 그의 목에 난 상처도 여전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날카롭고 차가운 기운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오금이 저릴 듯 소름 끼치고 험악한 힘이었지만 제럴드는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지금의 레오나드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평소 레오나드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으나 정말 그러했다.
이대로는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에 제럴드는 곧장 창문 쪽으로 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레오나드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어두컴컴하던 방 안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몸을 돌리자 아까보다 제대로 보이는 참담한 광경에 제럴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레오나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
“아멜리오 백작은…….”
로레이나의 상태를 살피려 제럴드가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손을 올린 레오나드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팔을 틀어쥐는 힘이 무시무시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레오나드의 눈을 마주한 이라면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었다.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몸과 달리 여전히 형형한 적안이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흡사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와 같은 모습에 제럴드는 일단 살짝 뒤로 물러난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레오나드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까보다 한층 작고 느려진 말투였다.
“아멜리오 백작이 어떤지 보려는 겁니다. 몸이 괜찮아졌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그렇게 꽉 안고 계시면 아멜리오 백작이 더 아플지도 모릅니다.”
다소 이성을 잃은 상황에서도 로레이나에 관한 말은 들렸는지 레오나드가 멈칫했다.
제럴드를 잡은 팔의 힘 또한 느슨해졌다.
그에 작게 안도한 제럴드가 조심스레 제 팔을 빼냈다. 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참을 만은 했다.
다행히도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반쯤 초점이 나가 있던 적안이 온전히 자리를 찾는 것을 본 제럴드가 작게 손짓했다.
그러자 문을 살짝 연 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사용인들이 침실로 들어왔다.
사용인들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어질러져 있던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의사는 곧장 로레이나에게로 향했다.
의사는 방 안의 상태보다는 침대 위, 정확히는 레오나드의 품 안에 있는 로레이나 때문에 놀란 기색이었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의 시선이 로레이나를 향했다.
그에 제럴드는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또 폭주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의사가 로레이나를 살피기 쉽도록 품에서 살짝 놓아 침대에 바르게 눕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럴드는 어쩐지 가슴 한쪽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잠도 안 주무시고 이틀 내내 생명력을 쏟아붓고 계셨던 건가.’
다친 팔에 대한 원망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생명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탈탈 털어내신 것 같은데.
그렇게 저 사람이 소중한 걸까. 온전한 제 것이라곤 뭐 하나 가져본 적 없는 제 주인께서는.
‘이러다 아멜리오 백작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에 제럴드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레오나드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카일룸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로레이나는 반드시 살아야 했다.
제럴드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이 진찰을 마친 의사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위험한 상태긴 했는데, 다행히 고비는 넘기신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
“네. 기력이 많이 약해지셔서 언제 정신을 차릴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요. 그래도 옆에서 잘 간호해준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행이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제럴드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명력을 넣는 것도 효과가 없다더니, 곧바로 황궁으로 온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시금 로레이나를 품에 안은 레오나드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그렇게라도 감정을 달래려는 것 같았다.
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의사는 제럴드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이런 몸 상태는 처음 봅니다.”
“몸이 어떻길래 그러는가?”
의사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신체 기능이 전체적으로 저하되었어요. 정확한 병명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염병도 아닌 것 같은데…….”
“…….”
“꼭 누가 생명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기라도 한 느낌입니다. 지금이야 회복되는 속도가 더 빠르니 나아지는 중이지만요.”
의미심장한 의사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제럴드가 의사와 사용인들을 물리며 레오나드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편지였다.
“데프론 공자에게서 온 겁니다. 상태가 안 좋으시니 요약해서 전달해드릴까 하다가 그냥 드립니다.”
“…….”
“아무래도 이건 폐하께서 직접 읽어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앞으로 들이 밀어진 편지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곧장 편지를 받아 펼친 레오나드가 빠르게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편지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얼굴이 심각해지던 레오나드는 어느 지점에 이르고 나서 바로 시선을 떼고 입을 열었다.
“……에녹 데프론을 데려와.”
“지금이요?”
“그래. 지금 당장. 전에 했던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해.”
‘셀리아 데프론’과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꽃. ‘아브로고’ 에 관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