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쪽입니다.”
황궁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긴 에녹은 높디높은 황궁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예전에 분명 제가 살았던, 한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데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이제 자신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예전에 이중 첩자 제안을 하러 찾아왔을 때와 비교해 봐도 무언가 달랐다.
뭘까. 도대체.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사용인을 따라 걷던 에녹은 안내받은 방에서 레오나드를 마주하고 나서야 무엇이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앉지.”
짧게 대꾸한 레오나드가 고개를 까딱이며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나른하게 소파에 몸을 누인 레오나드는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마치 로레이나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날처럼 말이다. 아니, 얼굴만 보자면 그보다 더했다.
그리고 레오나드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제럴드나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었다. 필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무실이 아닌 평범한 방으로 자신을 부른 것도 이상했다. 에녹이 들어간 방은 본래 침실이었던 것을 급하게 응접실로 개조한 느낌이 강했다.
레오나드의 뒤로는 길게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도 그곳을 지키는 경비가 꽤 삼엄했다.
찝찝하고 께름칙한 기분에 에녹이 본능적으로 익숙한 사람을 찾아 헤맸다. 그 얼굴을 보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찾던 달콤한 색채는 없었다.
“로레이나는 여기 없어.”
커튼 너머를 살피는 에녹의 시선에 레오나드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대충 말했다.
에녹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언급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그것이 불과 얼마 전 보인 태도와는 상당히 달라서 에녹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곳에 없는 사람의 빈자리가 소름이 끼칠 만큼 컸다.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
“설마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살아있어.”
에녹의 말을 끊은 레오나드가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고 또렷한 발음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은 질문이었지만 레오나드는 그런 가정을 하는 것 자체도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살아, 있다, 고.”
손을 들어 마른세수한 레오나드가 다시금 작게 중얼거렸다.
짧은 문장이 그것을 내뱉는 이의 격한 감정으로 인해 중간중간 끊겼다.
모순되게도, 그래서 더 매끄럽고 분명하게 다가왔다.
이상하다.
한 가지를 콕 집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기만 한 눈앞의 상황들로 인해 에녹은 심각성을 깨달았다.
‘괜찮다’도 아니고 ‘살아있다’라.
그 말이 에녹에게는 ‘상태야 어찌 되었든 살아있기는 하다’로 들렸다.
게다가 레오나드의 목소리에는 글자마다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켜 묻어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안 좋은 상황이길래 다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불안감에 에녹이 주먹을 말아 쥐는데, 멍하니 어딘가를 보던 레오나드가 작게 읊조리듯 물었다.
“……이렇게 되어서 속이 시원한가?”
그렇게 묻는 레오나드의 눈에는 원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보는 이마저 그 어둠에 동화되어버릴 정도라서 에녹은 감히 제 감정을 내보이지 못했다.
격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린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보고 있는 것은 에녹이 아니었다. 그것을, 에녹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짙게 내려앉은 적안이 이곳에 없는 누군가를 향했다.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제게 저주를 건 상대를 향한 원망이었으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에녹은 그저 제 아비가 또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굳게 닫혀있던 입을 부득이 열었던 것은.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폐하.”
“…….”
“제가, 폐하를 돕겠습니다. 로레이나를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에녹이 애원하는 소리에 레오나드가 그를 보았다.
이전이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날카롭게 받아쳤을 것이다.
로레이나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한들, 그래 봤자 아이작 데프론의 자식이니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레오나드는 그런 말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로레이나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지키기는커녕 제 존재 자체가 로레이나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레오나드는 지금 도움이 절실했다. 그것이 가장 피해야 할 적의 아들이라도, 아니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해도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로레이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로레이나가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도 있고 아예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에녹 데프론은 좋은 사람이니 한번 믿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잠시 힘주어 잡은 주먹을 파르르 떨던 레오나드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레오나드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측근 외의 인간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대가 편지에 쓴 ‘아브로고’라는 꽃. 그 꽃을 찾아와.”
“네?”
에녹은 방금 스스로 한 질문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제 아버지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것 같았으니 레오나드가 당장이라도 제 목을 쳐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기다니?
에녹이 멍하니 있는 사이 그를 똑바로 마주한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꽃이 있다고. 분명 말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에녹의 대답에 레오나드가 조용히 안도했다.
마법을 무력화시킨다고 했으니, 어쩌면 로레이나를 저주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해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는 그대의 여동생을 좀 만나고 싶은데.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야. 그대가 전에 제안했던 이중 첩자 말이야.”
아까와는 달리 다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레오나드가 덧붙였다.
“왜, 못 하겠나?”
레오나드는 에녹이 고민할 시간 따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에녹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스로가 먼저 했던 제안이기 때문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만으로도 레오나드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지 자꾸만 뒤쪽으로 두던 시선이, 까딱거리던 손가락이 눈에 밟혔다.
에녹이 그 초조함의 이유일 것이 분명한, 아마도 커튼 너머에 있을 제 첫사랑을 떠올리며 나직이 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에녹을 보던 레오나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에 관련해서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 바로 공유해.”
“예.”
“로레이나에게 필요할지도 몰라. 반드시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에녹은 결심이라도 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로레이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 테니까.
어린 시절 제 목숨을 구해준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에녹 데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예상외로 에녹의 답변은 빨리 돌아왔다.
아브로고와 관련해서는 아니었고 셀리아 데프론에 관한 것이었다.
레오나드와 대화를 마친 에녹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셀리아가 레오나드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심지어 에녹이 데리고 올 것도 없이 선뜻 혼자서 황궁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바로 보게 될지는 몰랐지만 레오나드는 알겠다며 셀리아의 황궁 방문을 수락했다.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계속 고민하느니 한 번에 처리하고 로레이나의 곁에 붙어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에녹과 이야기했던 곳에 똑같이 앉아 있던 레오나드는 몸을 돌려 제 뒤쪽을 바라보았다.
에녹의 예상대로 그리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재질의 커튼 너머에는 로레이나가 잠들어있었다.
에녹과의 대화 중에 자꾸만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꾸만 로레이나가 눈에 밟혀서 떨어져서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예 곁에 두고 있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어차피 에녹이나 앞으로 만나게 될 그 정체 모를 여자를 생각하면 로레이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으니 말이다.
아무리 에녹 데프론이 제 편이 되겠다고 말했다 한들 괜한 약점은 잡히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로레이나와 있는 순간은 제법 기억하는 편이니까.
‘그리고 그 여자가 정말 이사벨일지도 모르니.’
셀리아 데프론이 300년 전 마녀 ‘이사벨’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건 쓰러져 있는 로레이나를 제외하면 레오나드뿐이다.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실수를 했을 시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폐하, 데프론 영애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제럴드가 작게 속삭인 말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셀리아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드의 허락에 문이 열렸고, 그 사이로 셀리아가 들어섰다.
요새 수도 귀족들의 최고 화젯거리인 여자는 그 명성에 맞지 않게 꽤 수수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생김새만큼은 화려해서인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결 좋은 은발. 반짝이는 녹색 눈. 눈처럼 새하얀 피부.
가냘픈 체구. 바람 위를 타기라도 하는 듯 살랑살랑 가벼운 발걸음.
과연 얼마 전 열린 연회의 주인공다운 얼굴이라며 감탄하던 제럴드는 곧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보다 데프론 공작과 닮았는데?’
셀리아 데프론은 데프론 공작가의 방계, 아니 아예 남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막 소름이 끼칠 만큼 닮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아이작 데프론을 생각나게 했다.
어쩌면 아이작의 것과 꼭 닮은 은발과 녹색 눈동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피라도 섞인 것 같네.’
지금까지 추론한 대로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제국의 큰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방에 들어와 레오나드를 발견한 셀리아는 허리를 숙여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레오나드는 앉은 자세 그대로 그것을 받았다.
곧 셀리아가 고개를 들었고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맞닿았다.
똑바로 레오나드의 얼굴을 마주한 셀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언가에 놀라기라도 한 듯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꼭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