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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4화 (104/144)

#104화

‘뭐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제럴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그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도 각자 나름의 준비를 했다.

데프론 공작가의 양녀가 방에 들어오는 즉시, 모든 행동을 주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 제럴드 또한 아까부터 집중하고 있던 차였다.

레오나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탓에 살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사용인 몇 명만 데리고 혼자 온 것도 이상하고.’

황궁에서 먼저 청한 것이니 온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에녹이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도 괜찮다고 한 건 좀 수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구석이 많은 여자였다.

그러니 제럴드는 -오늘의 만남은 공식적인 일정이기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레오나드를 본 셀리아가 그를 바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저런 얼굴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셀리아 데프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레오나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저건 결코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인 기묘한 느낌.

‘저러니까 꼭…….’

다시금 제대로 살펴야겠다는 생각에 제럴드는 잠시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가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든 순간, 셀리아는 다시 수줍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직전에 그가 보았던 것이 다 신기루였던 것처럼.

‘잘못 보았나?’

분명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하지만 둘은 초면이니 그럴 일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럴드는 결국 더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비슷한 사람이라도 생각났나 보지 뭐.

“이렇게 황궁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폐하. 만나 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반갑군, 영애.”

“오라버니께 전해 들었어요.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시녀의 안내에 따라 레오나드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셀리아가 생긋 웃었다.

그 유명한 하프 드래곤을 상대하면서도 상당히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귀족 회의 때 두려움에 떨던 귀족들이 밖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도.

그 말들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최근 가장 큰 규모의 연회에 참석한 셀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셀리아는 그런 것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티 없이 깨끗한 느낌의 녹색 눈이 사르르 접혔다.

“직접 와서 보니 정말 멋지네요. 저 황궁에 오는 거 많이 기대했었거든요.”

“그렇군.”

레오나드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런 쓸데없는 말이나 듣자고 눈앞의 여자를 부른 것이 아닌데. 지금 상황이 상당히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이 만남은 자신의 초대로 이루어진 것이니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오나드는 자신의 뒤편에 있는 로레이나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나는 너를 살려야 해.

이런 레오나드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셀리아는 재잘재잘 말을 이어갔다.

“네! 제 상상보다 훨씬 멋진 곳이에요.”

“영애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초대한 입장에서 마음이 놓이는군.”

“정말 멋져요. 꽃이랑 나무가 다른 곳보다 훨씬 싱그럽고 곳곳에 있는 장식들도 너무 예쁘던걸요.”

두 손을 모아 짐짓 과장된 어투로 이야기를 한 셀리아가 다시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곳에 살았더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 특별한 것이 없는 말이었으나 말을 뱉은 상대가 셀리아 데프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한때 이곳에 살았던 데프론 공작가의 사람이라는 것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레오나드가 얼굴을 굳히자 방 안의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셀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요?”

“…….”

“너무 신나서 그랬나 봐요. 제가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아니야, 영애. 별것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말도록.”

레오나드가 셀리아의 말을 끊으며 너그러운 말투로 답했다.

괜히 사과한답시고 말이 길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로레이나의 상태를 살피기도 아까운 시간이다.

애초에 필요한 것만 빨리 알아내고 내보낼 생각이었으니 이런 것쯤은 그냥 눈감아주는 편이 나았다.

“그나저나 갑작스레 데프론 공작가에 입적된 것에 많이 놀랐을 것 같은데. 괜찮은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차를 권하며 묻자 셀리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아, 사실 조금 놀랐어요. 그렇게 큰 저택에 살게 되다니. 지금껏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거든요.”

“그대가 공작가의 방계라는 건 아예 몰랐던 건가?”

“네. 아무도 저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으셔서요. 공작……그러니까 아버지 말씀에 따르길 저희 선조님이 아주 예전에 공작가에서 쫓겨……났다고 하시더라고요.”

말을 하던 중간 셀리아가 찻잔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는지 혹시라도 그대로 찻잔을 깨뜨릴까 봐 멀리서 지켜보던 제럴드가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그래서 저에게 공작가 이야기는 해주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셀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것이 꼭 격해진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한 모습이라 레오나드는 조금 감탄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저러니 꼭 진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눈앞의 여자는 실제로 데프론 공작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자임이 분명할 텐데도.

‘저 정도 연기를 하니 아이작 데프론도 양녀로 데려올 생각을 했던 거겠지.’

구체적인 생김새는 잘 모르겠으나 외양도 저 정도면 제법 흡사하고.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를 고른 건 꽤 탁월한 선택이었다.

‘좀 더 주의할 필요가 있겠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셀리아를 보던 레오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은, 아직은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냥 무르게 보여서도 안 된다. 그럼 오히려 더 의심할 테니까. 레오나드는 제 마음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이 경계가, 난데없이 등장한 공녀에 대한 의심 정도로만 보이도록.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레오나드는 제 몫의 찻잔을 집어 들며 제럴드를 향해 살짝 손짓했다.

그에 미리 말을 맞추었던 대로 제럴드가 옆쪽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공작이 잘 챙겨주는 것 같아 다행이야. 얼마 전에 공작저에서 열린 파티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아주 멋졌다더군.”

“아버지와 오라버니 덕분이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너무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아 부끄러웠는데 잘 챙겨주셔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답니다.”

“하긴.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일 테니 적응하기 힘들었겠지.”

“네. 부끄럽게도 말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영애.”

잠시 말을 멈춘 레오나드가 제럴드를 가리켰다. 그에 줄곧 레오나드를 보던 셀리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같이 이야기할 또래를 옆에 두는 건 어떤가? 그럼 지내기 훨씬 편할 거야.”

“또래요? 헨티슨 공작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영애에게 소개해 줄 사람은 공작의 동생인 헨티슨 영애야.”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제럴드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제럴드가 입을 열었다.

“제 동생 다이아나가 영애의 이야기를 듣더니 꼭 한번 대화를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같이 이야기를 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워낙 활발한 아이라 지루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제럴드는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처음부터 계획은 하나였다.

셀리아 데프론을 직접 만나보고,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싶으면 옆에 감시할 인력을 붙이는 것.

어느 정도 무력을 쓸 수 있고, 후에 아이작 데프론이 이쪽의 목적을 눈치채더라도 거절할 수 없게 만들려면 기사인 다이아나가 제격이었다.

아직 귀족 생활이 낯선 영애에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주는 황제의 배려를 거절할 명분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역시 셀리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세상에! 그럼 헨티슨 영애를 소개시켜 주시려고 저를 부르신 거군요.”

“그래.”

“안 그래도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서 적적한 참이었는데, 그런 부분까지 배려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셀리아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작게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저도 헨티슨 영애와 친해지고 싶었어요.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멋있는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기뻐하는 다이아나의 얼굴을 보며 제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했는데 저렇게 나와 주니 안심이라고.

황제의 말이니 거절하기는 어렵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이 상황을 다 파악하고 하는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이 제안을 셀리아 데프론이 승낙했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눈꼬리를 휘며 웃던 셀리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불쑥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그래서 아버지께 미리 헨티슨 영애 초상화도 부탁드렸었답니다.”

“초상화?”

“네. 요즘 수도의 귀족 아가씨들은 혼담을 위해서 초상화를 그려두는 게 보통이라면서요?”

누군가의 초상화를 꺼내든 셀리아가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음에 만나 뵈었을 때 잘못해서 실수라도 할까 봐 미리 얼굴을 알아두려고요.”

“…….”

“이분이 헨티슨 영애가 맞다고는 하셨는데, 아무래도 제가 직접 본 게 아니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초상화는 제럴드가 나설 틈도 없이 정확히 레오나드 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처럼.

“혹시 모르니 얼굴 좀 확인해 주시겠어요? 이 영애가 헨티슨 영애가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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