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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7화 (107/144)

#107화

셀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저로 돌아갔다.

상처를 치료한 뒤 옷매무시까지 가다듬은 셀리아는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

여상한 얼굴로 황궁 밖을 향하는 셀리아를, 레오나드는 더 이상 붙잡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커튼 뒤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기에도 바빴으니까.

“로레이나.”

커튼을 걷고 들어가는 움직임에 조급함이 실렸다. 로레이나가 누워있는 침대는 커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까지 단숨에 걸어간 레오나드가 침대 위에 있는 이를 살폈다.

흐트러진 분홍빛이 시야에 먼저 들어왔고, 그다음은 여전히 창백한 낯이었다.

아직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 더 악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레오나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하.”

어쩐지 힘이 풀린 레오나드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침대 쪽으로 기울어진 상체가 자연스레 로레이나 쪽으로 향했다.

손을 뻗자 달콤한 색채가 잡혔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이 복잡한 감정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누군가가 칼로 머릿속을 박박 긁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고통스러웠고, 그만큼 복잡했다.

아무리 저주를 풀기를 포기하겠다 결심했다고 한들 막상 눈앞에서 마법을 쓰는 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혹하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날,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에 눈을 뜨면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이의 얼굴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들 저를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가.

그 고통은 하나하나 짚는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참으로 증오스러우면서도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드는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어떻게 잘 거래해 보면 저주를 풀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을 이해했다.

아니지. 저주를 풀 이유가 있는가? 로레이나가 있으면 그런 것 따위 하등 필요 없는데.

여러 생각이 한 번에 휘몰아쳤다. 잠시 멋대로 머릿속을 뛰어놀던 사념들이 그를 괴롭히다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리고 동시에 레오나드의 생각이 정지했다.

아. 그냥 다 모르겠다.

“……네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

레오나드가 저보다 한참 작은 창백한 손을 들어 그 안에 깊숙이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레오나드가 제 뺨을 그 자리에 기대며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눈을 떠달라고.

그 푸른 눈을 보면, 이 혼란스러운 마음이 금세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고.

* * *

“어, 뭐지?”

갑작스레 귓가에 울린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았다.

방금 누가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잘못 들었나.”

하긴 여기 있던 내내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으니까. 아마 환청이든가 내가 미쳐버렸든가 둘 중 하나겠지.

“아, 생각해 보니 둘이 똑같은 말이네.”

하하하.

나는 잠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것이 틀림이 없었다.

북부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직후, 나는 쭉 이곳에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온통 새하얀 공간.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지나가는 이 하나 없는 적막한 곳이었다.

어떻게 나가는지, 아니 어떻게 깨어나는지 알기라도 하면 뭐라도 시도를 해볼 텐데.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내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이대로 꼼짝없이 여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거 진짜 큰일이네.

“……레오나드가 걱정할 텐데.”

그렇게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니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게다가 레오나드가 없을 때 그랬으니 분명 또 자리를 비우지 말 걸 그랬다며 자책하겠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미 내가 이렇게 쓰러진 이상 그것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려서 레오나드를 달래주는 것.

“정신 차리기까지 오래 걸리는 걸 보니까 확실히 몸 상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이네.”

일단 피를 토한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던 거겠지만.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며칠 동안 계속 돌아다니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더 둘러볼까.

“여기 누구 있어요?”

텅 빈 장소에 내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알고 물은 것이기는 하나, 막상 한 번 더 묻고 나니 뭔가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정말 없는 건가.

“나갈 길이 표시되어있으면 좋을 텐데.”

막막함에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저 멀리서 한 지점이 반짝였다.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볐다가 떴지만 그래도 반짝임은 여전했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라 빛난다는 느낌이 들 수가 없는데, 저 광경은 반짝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 공간에 들어와 처음으로 겪은 변화에 뭐라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저기다. 저기로 가야 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힘껏 달려 빛무리에 도달한 뒤였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나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문이 보였다.

낯선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조금 생각이 정리되었다.

“……원래 이런 문이 있었던가?”

아까 전 그 빛도 그렇고. 지금껏 내가 놓친 곳이 있었던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지. 내가 여길 몇 번이라 돌아다녔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는 건 이 문이 갑자기 생겼다는 건데. 공간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내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바깥에 그럴만한 변화가 생겼다는 거겠지.”

녹색으로 빛나는 문을 보고 있던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이 문을 열면 어떻게 되려나.

이 뒤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변하기는 하겠지.

“……그럼 열어야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뭐가 달라질지 몰라도 일단 시도는 해보는 편이 좋았다.

이 문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발을 앞으로 디뎠다. 등 뒤로 쿵-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사라졌을 때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나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문을 열고 나온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초록빛과 파란빛의 중간. 그 오묘한 빛깔을 띤 풀잎들이 이리저리 어우러져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을 이루었다.

하늘을 맑은 푸른색이었고 눈앞에는 거대한 보랏빛 나무가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바람이 살짝 일자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에 홀려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데, 별안간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 다그닥-.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소리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마차?”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리니 언뜻 보기에도 엄청나게 화려한 마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정말 코앞이었고 나는 그것을 피할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러다 치이겠어!’

곧 다가올 고통이 언뜻 느껴지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이게 뭐람. 난데없이 교통사고라니.

‘그냥 안에 있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움츠린 채 가만히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그대로 기절해버린 건가 했다.

하지만 살랑살랑 불어와 피부에 닿는 바람과 나뭇잎들끼리 부딪히는 특유의 사각사각 소리는 여전했다.

이상한 기분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분명 나와 부딪혀 멈추거나 잔뜩 망가져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마차는 없었다.

귓가에 조금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 다그닥-.

어느새 마차는 내가 있던 곳을 훌쩍 지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집 앞에 정착한 뒤였다.

‘뭐지?’

그냥 나를 보고 피해서 간 건가?

하지만 나도 그렇고 마차도 그렇고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거리였는데.

뭔가 이상했지만 어쨌든 나는 마차에 치이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다행이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했던 몸에 힘이 빠졌다.

굳건하게 땅에 디디고 서 있던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는 자빠지겠다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팔을 뻗어 옆에 있는 나무 기둥을 짚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팔은 나무 기둥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덕분에 나무에 온전히 힘을 싣고 있던 몸은 보기 좋게 앞으로 나자빠졌다.

“으앗.”

넘어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자잘한 돌들과 나무뿌리들이 툭 튀어나와 있으니 분명 아파야 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유령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잘못 봤나 싶은 마음에 옆에 있는 분홍빛 꽃을 움켜쥐어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심해!”

갑작스레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나를 지나쳤던 마차에서 내린 여자가 작게 호통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마차에서 내릴 때 뛰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말을 듣는 법이 없어.”

“죄송해요. 조심할게요, 어머니!”

폴짝폴짝 뛰며 발랄하게 답한 건 한 소년이었다.

대략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귀한 손님을 만나러 가는지, 제법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살짝 곱슬기가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적안은 따스하게 비치는 햇빛을 받아 보석같이 빛났다.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외양에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아이의 앞에 있던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잠깐 아직 문 두드리지……!”

하지만 아이는 이미 눈앞에 있는 문을 두드린 뒤였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집주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여자였다.

손님의 방문이 달갑지 않은지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여자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자 부드럽게 굽이치는 연한 분홍빛 머리가 사르르 뒤로 넘어갔다.

그 여자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본 순간.

“아.”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온 탄성에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엘레노아.”

다시금 뛰려는 제 아이를 단숨에 제압해 안아 올린 여자가 방금 집에서 나온 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말 길게 하는 거 안 좋아하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마냥 화려하다고만 생각했던 마차에 익숙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과-.

“칼리드를 네가 좀 맡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몇 년 전인지도 모를, 머나먼 과거로 와버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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