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엘레노아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사전에 약속이 되지 않은 만남인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밖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쉰 엘레노아가 몸을 살짝 틀어 제 손님을 집으로 맞았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이 거의 닫힐 때쯤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지금 몸 상태를 보아서는 그냥 통과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어색하니까.
“다시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겠어요? 지금 좀……아니, 많이 당황스럽거든요.”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어느새 손님들은 마련된 자리에 앉은 후였다.
실로 놀라운 움직임이라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엘레노아가 어이없다는 낯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그러니까 카일룸 제국의 황후는 이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한 모양이었다.
잠시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황후가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대로야. 네가 칼리드를 좀 돌봐주었으면 좋겠어.”
“제국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왜 저 같은 엘프한테…….”
“그렇게 비하하면서 말하지 마. 엘레노아 윈저가 황태자를 가르칠 실력이 충분하다는 건 제국민 모두가 알 테니까.”
“아니, 잠깐만요. 가르치다니요? 저한테 황태자 전하의 교육을 맡기실 생각이었던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엘레노아가 기함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황후가 낭패라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것까지 바로 말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황후가 무슨 이유로 황태자의 선생님으로 엘레노아를 선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엘레노아의 심정을 백번 이해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황태자의 선생이 되라니? 남들과 교류하지 않고 숲속에 박혀서 지내던 엘레노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자리였다.
‘아, 그나저나 다리가 좀 아픈데.’
요 며칠 계속 돌아다녔더니 몸이 이곳저곳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원래 몸도 안 좋은데 거의 영혼 상태인 지금도 이렇게 아프다니.
이제는 개복치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미안하다, 개복치야.
‘어디 앉을 곳 없나.’
이쪽 사람들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다행이기는 한데. 영혼 상태라 앉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 참.
바닥에 앉는 건 가능하려나? 괜히 앉았다가 바닥을 통과해서 지하실 같은 곳에 툭 떨어지는 건 사양인데.
잠시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엘레노아의 옆쪽에 있는 창가에 놓인 새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엘레노아가 새를 기르는 모양이었다. 갖가지 꽃들로 장식된 하얀 새장 안에는 엘레노아의 머리칼을 꼭 닮은 분홍색 앵무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저 앵무새 밑에 잔뜩 깔린 쿠션이 눈물 날만큼 부러웠다.
하아. 저기 조금만 앉아 있었으면-.
‘어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눈앞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뀌어 있었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황후 옆쪽으로 서 있었는데 왜 엘레노아 옆으로 와있는 거지?
앞에 이 철창 같은 건 또 뭐고. 게다가 눈높이가 좀 낮아진 것 같기도 한…….
“삐비빅!”
갑작스레 입에서 난 소리에 나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뭐야, 내가 소리 내려고 한 게 아닌데 입이 막 저절로 움직여.
아니 그것보다 이 소리는 도대체 뭐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바들바들 떠는데 입 주변에 와 닿는 손의 감촉이 무언가 이상했다. 피부의 느낌이 아니라 뭐랄까. 꼭 새의 깃털이라도 닿은 것 같은 느낌…….
‘아, 설마.’
불현듯 찾아온 불안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려 내 몸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는 영혼 상태의 반투명하던 몸은 온데간데없고 웬 작은 새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맙소사. 설마 나 아까 그 앵무새 몸에 들어와 버린 거야? 시한부 일기장에 이제는 앵무새라니.
내가 빙의되는 몸은 왜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이야.
“코코.”
절망감에 몸부림치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위쪽에서 나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나를 쓰다듬는 손길에 그제야 마음이 좀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 이 앵무새 이름이 코코구나.
“왜 그래. 혹시 배고파? 밥 준 지 얼마 안 되었던 거 같은데.”
“…….”
“아니면 어디 아픈가.”
내 머리통을 여러 번 쓰다듬던 엘레노아가 나를 살피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가슴팍 부근만 보이던 시야에 그제야 생기 넘치는 눈동자가 들어왔다. 엘레노아의 눈은 로레이나와 달리 싱그러운 녹색이었다.
내가 아까 전 밖에서 보았던, 그 오묘한 빛깔과 같은 빛.
로레이나의 푸른빛과는 조금 다른 색임에도 불구하고 꽤 비슷한 느낌이 났다.
잠시간 말없이 나를 살피던 엘레노아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것이 꼭 아프지 않아 안심했다는 느낌이라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뭐야. 아프지는 않은 것 같네. 그럼 놀아달라는 건가?”
작게 푸스스 웃던 엘레노아가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것에 또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빙의된 몸의 어머니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는데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돌고 돌아서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
그럴 리가 없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요새 힘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왜 이러지.
“흠. 나도 놀아주고 싶지만, 지금은 안 돼.”
“삐비빅!”
“우선 찾아온 손님들부터 돌려보내야 하거든.”
말을 마친 엘레노아가 다시금 빙글 돌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야에서 녹색 빛이 사라지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다.
정신 차리자.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엘레노아.”
황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느새 어머니 품을 빠져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칼리드가 눈치를 보며 멈출 정도로 진지한 음성이었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엘레노아가 방금 한 말은 명백한 거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까와 달리 한층 가라앉은 분위기에 엘레노아 역시 웃는 낯을 지우고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네. 생각하시는 바가 맞아요. 저 지금 정중하게 돌아가 달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렵게 들릴 거 알아. 그대는 인간들과 좀처럼 만나지를 않았으니까. 내가 제안하는 자리가 무겁게 느껴지겠지.”
“잘 아시네요. 그럼 제 마음도 이해하시겠죠?”
“나도 어지간하면 부탁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도 칼리드까지 데리고 여길 온 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야.”
긴장되는지 머뭇거리던 황후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교양 있는 모습은 아니었던지라 나는 좀 의아해졌다.
단순히 아들 선생님을 구하러 온 거라기에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엘레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곱게 펴져 있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왜 그러세요?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칼리드. 잠깐만 나가 있을래?”
재빨리 엘레노아의 말을 끊은 황후가 뒤를 돌아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칼리드는 언제인지 모를 순간부터 쭉 황후를 보고 있었던 듯했다.
아까 전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느낌이었다. 침체되어있는 붉은 눈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까지 사고뭉치처럼 뛰어다녔던 것은, 밝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가라앉아있는 이 분위기를 벗어나려 애쓴 결과물이라는 걸.
“싫어요. 저도 여기 있을래요.”
칼리드가 제법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린 레오나드, 그러니까 그가 아직 젠이었을 적과 꼭 닮아서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하긴. 성년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살아온 세월은 평범한 인간보다 길었을 테니 당연한가.
“칼리드. 내 말 좀 들…….”
“그냥 놔두세요. 전하께서도 알아야 하는 내용인 거 같은데요.”
간절해 보이는 음성을 끊은 것은 엘레노아였다. 그에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두던 칼리드가 곧 고개를 돌려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아의 반응에 황후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조차 삼킬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조용히 숨만 들이켰다.
뭐, 어차피 앵무새의 몸이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겠지만.
“……그래. 칼리드도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니 알 필요가 있겠지.”
곧 낮은 한숨이 터졌다. 심각한 얼굴에 아무런 상관없는 나까지 덩달아 긴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아까부터 이상하게 고개를 내미는 불길한 느낌에 몸을 털던 때였다. 황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5년.”
“네?”
“앞으로 5년이야. 나에게 남은 시간 말이야.”
뭐, 뭐라고?
생각보다 엄청난 말에 다시 한번 내 입에서 삐비빅-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엘레노아는 내 쪽으로 돌아보지 않았다. 맑은 녹색 눈이 제 앞에 있는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거짓말하는 거죠? 장난치지 마세요.”
“내가 설마 여기까지 와서 네게 장난을 칠까.”
잔뜩 굳어진 엘레노아의 얼굴을 보던 황후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방금 제 죽음을 고한 이답지 않게 가벼운 미소였다.
“얼마 전부터 슬슬 느낌이 왔어.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딱 감이 오더군.”
“…….”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칼리드가 성년이 되는 것은 보고 갈 수 있겠어. 다 내가 아이를 너무 늦게 낳은 탓이지, 뭐.”
잠시 말을 끊은 황후가 찻주전자를 들어 직접 제 찻잔에 차를 채웠다. 이후의 말은 그녀가 다시금 찻잔을 비운 뒤에야 이어졌다.
“업무 때문에 같이 오시지는 못했지만, 폐하께서도 네가 칼리드를 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셔.”
“…….”
“폐하와 나는 아주 오래전에 반려의 언약을 맺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툭 뱉어진 말에 나는 조용히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5년 뒤면.
‘황제와 황후는 둘 다 이 세상에 없는 거구나.’
평생의 반려는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동지였으니까. 참 매력적이다 싶으면서도, 남은 이에게는 참 잔인한 약속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한낱 한 시에 가고 나면 칼리드는 혼자 남겨진다는 말 아닌가.
“너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옆에 서 있던 칼리드를 한 손으로 끌어안은 황후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더는 거절할 수도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