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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9화 (109/144)

#109화

“……젠장. 진짜 비겁하시네요.”

잠시 말없이 있던 엘레노아가 나직이 욕을 뱉었다. 말은 험하게 했지만 단호해 보이던 녹색 눈은 이미 많이 허물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황후도 알았는지 그녀가 다시금 빙그레 웃었다.

“그래. 맞아. 비겁하지.”

“…….”

“안 그런 척하면서 마음이 여린 엘레노아 윈저는 결국 내 부탁을 들어줄 테니 말이야. 내 오랜 친구였던 네 엄마처럼.”

황후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칼리드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엄청난 말을 들었음에도 칼리드의 얼굴은 꽤 담담했다.

어쩌면 직접 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종족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잖아. 남은 이들을 세어보니 확 느껴지더군.”

“…….”

“정말 인간들의 세상이라도 오려는 모양인지 황궁도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

“이런 세상에 칼리드만 남겨두고 가는 것이 걱정이 돼. 나와 폐하마저도 가고 나면 칼리드만…….”

“알겠어요.”

황후의 말을 끊은 엘레노아가 살짝 눈을 굴려 그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칼리드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다 알아들었으니 인제 그만 하세요.”

다시 한번 칼리드를 보며 뭐라 말을 하려던 엘레노아가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에 황후가 다시금 작게 웃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너무 부담가지지 않아도 돼. 뭐, 이미 내가 여길 찾아온 것부터가 부담이었겠지만.”

“…….”

“아무리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들과 우리는 다른 부분이 많지 않나. 공감할 수 없는 게 많을 거야.”

“……그렇겠죠.”

“그래. 티는 내지 않지만,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종족들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어울릴 수 있겠어.”

여유로운 척은 하지만 목이 타기는 하는지 황후가 다시 한번 찻주전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후의 손이 주전자에 가 닿은 일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엘레노아가 먼저 선수를 친 탓이었다.

쪼르르르-.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엘레노아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

제 몫의 찻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고 있던 황후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나는 그냥……나중에 칼리드가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그걸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을 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이야.”

후련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황후가 고개를 돌려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맞춰 고개를 돌린 칼리드가 와락 몸을 날려 황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눈앞의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엘레노아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정말 거절할 수 없게 행동하시네요. 황후 폐하를 쏙 빼닮으셨군요.”

“그래 보이나?”

황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하나로 그녀가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 괜히 가슴이 아파졌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아들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을까.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제가 황궁으로 들어가나요?”

“아니,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아. 그냥 평소처럼 여기 있어 주면 돼. 황궁부터 여기까지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니 칼리드가 왔다 갔다 하면 될 거야.”

“하긴. 실체화해서 날아오시면 금방이겠네요.”

“응. 대신 시작은 되도록 빨리했으면 좋겠어. 서로 정 붙일 시간도 필요하니까.”

“정이라…….”

그제야 제 찻잔을 든 엘레노아가 차를 마시며 칼리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허공에서 두 시선이 얽혔다. 짧은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칼리드였다.

“저…….”

“…….”

“그냥 저한테 반말……해도, 아니 하셔도 돼요.”

주먹까지 불끈 쥔 것을 보아하니 제법 용기 내어 뱉은 말인 듯했다.

잔뜩 긴장한 낯을 물끄러미 보던 녹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곧 붉은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하하하.”

결국 엘레노아가 얼마나 칼리드를 아끼게 될지 아는 나까지도 놀랄만한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엘레노아가 말끔히 제 찻잔을 비웠다.

그렇게 제 남은 근심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좋아요. 한번 정 붙여보죠.”

* * *

그 후 칼리드는 거의 매일을 찾아왔다. 호탕하게 외친 것과 달리 조금 어색해하던 엘레노아도 점차 이 방문에 익숙해져 갔다.

당연한 수순으로 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엘레노아와 칼리드가 어울리는 것을 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물론 칼리드가 어쩌다 한번 실체화한 모습을 유지한 채로 집 안에 들어온 날에는 그대로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뭐 그것도 정말 어쩌다가 한 번이었으니.’

엘레노아가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황태자의 스승 역할을 제법 잘 해내었다.

칼리드 역시 엘레노아를 잘 따랐고. 그러니 둘 사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승님!”

칼리드가 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더라니. 나는 고개를 들어 막 문을 박차고 들어온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조급한 얼굴로 들어온 칼리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에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여자아이가 업혀 있었다.

칼리드의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언뜻 보면 하얗게도 보이는 은색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엘레노아의 일기장에서 봤던 문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은 장면과 타이밍에 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사벨이야.’

엘레노아의 일기장 속 바로 그 ‘이사벨’.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턱 막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눈앞의 저 아이가 원작 속 그 마녀가 맞는다면, 레오나드에게 저주를 날려 그가 평생 고통받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거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었다니.’

앵무새 몸에 들어가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무뎌진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사실 나는 답을 알았다. 어쩐지 엘레노아와 칼리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 둘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까.

“깜짝이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동그랗게 눈을 뜨며 심장을 쓸어내린 엘레노아가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칼리드의 뒤를 살피는 시선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건 또 뭐고? 어디서 뭘 주워온 거야. 내가 아무 물건이나 줍지 말랬지.”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거든요.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괴롭힘당하고 있길래 구해주고 가려는데…….”

“가려는데?”

엘레노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묻자 칼리드가 스리슬쩍 눈치를 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말하던 중에 갑자기 쓰러져버리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럼 의사한테 데려가야지 여기를 왜…… 하아. 아냐. 됐다, 됐어.”

작게 한숨을 쉰 엘레노아가 칼리드의 등에서 여자아이를 받아 제 침대에 눕혔다.

그 손길이 꽤 조심스러워서, 툴툴거리는 말투는 별 소용없게 느껴졌지만.

“내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구나. 인간들이랑 엮이면 피곤한 일 생긴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죄송해요. 하지만 어쩐지 의사한테 가는 건 안 될 거 같았어요.”

“아픈 사람이 의사한테 가야지 그럼 어딜…….”

엘레노아가 뒤를 돌아 칼리드에게 뭐라 하려던 순간이었다. 엘레노아의 뒤, 정확히는 그녀의 침대 위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아이의 몸에서 나온 빛무리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공중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딱 봐도 신비로움이 가득한 모습에 나는 이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건 마력이야.’

그리고 저게 마력이라는 건, 눈앞의 여자아이가 원작 속 이사벨이 맞는다는 거겠지.

‘북부에서 마주친 여자도……저런 기운을 가지고 있었어.’

매번 고민하던 것을 확인하고 나니 입안이 바싹 마르고 점점 초조해졌다. 나는 이후에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

이사벨은 칼리드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종국에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게다가 레오나드는 태어날 때부터 끔찍한 저주에 시달리지.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지금이라도 소리쳐 볼까? 저 여자아이를 멀리하라고? 당신이 구해온 그 애 때문에 죽게 될 거라고?

“삐비빅-!”

혹시 몰라 소리를 내보았으나 나는 저들에게 경고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단어 하나조차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놓인 철장이 시야를 반쯤은 차단하고 나를 가로막았다. 어쩐지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하려는 일을 막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내가 왜 하필 앵무새 몸에 들어오게 된 건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라는 뜻이구나. 이건 되돌릴 수 없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기억이니까.

“설마 이건…….”

이사벨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눈치챈 엘레노아가 얼굴을 구기며 말끝을 흐렸다.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이때에도 마법은 그다지 흔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기 일쑤인 힘이었으니.

게다가 그런 엄청난 저주를 걸 정도였다면 이사벨이 가진 마력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칼리드가 이사벨을 여기로 데려온 건 현명한 판단이긴 했다.

보아하니 아직 힘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잘못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저 빛을 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아.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었네. 이러면 다시 바깥에 보내기도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지 엘레노아가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치료는 다 끝낸 거야?”

“아, 아직이요. 하려고 했는데 의식도 없는 애한테 하기는 좀 그래서…….”

“넌 지금 그게 문제냐? 쪼그만 애가 저렇게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데?”

“아까까지는 왜 데려왔냐고 뭐라 하셨으면서…….”

칼리드가 작게 투덜거리다가 엘레노아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쭈뼛거리며 서 있던 칼리드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이사벨의 손을 조심스레 들며 속삭였다.

“……잠깐 실례할게.”

곧이어 허리를 숙이는 행동에 나는 그제야 드래곤의 치유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분명 입을 맞추는 게 제일 효과가 좋다고…….

쪽.

아니나 다를까 다소 민망한 소리가 작게 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기분 좋은 느낌이 방 안을 맴돌았다.

이유가 있다고는 하나 제 행동이 부끄럽기는 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힌 칼리드가 다시금 허리를 들려던 순간이었다.

미약한 신음과 함께 작은 몸이 뒤척였다.

“으음.”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던 이사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맑은 빛깔의 녹색 눈이 드러났다.

이곳이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듯 이리저리 굴러가던 눈동자가 곧 제 손을 잡은 누군가에게로 고정되었다.

그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한 이사벨이 배시시 웃었다. 미래에 그토록 어마어마한 비극을 불러올 장본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밝고 환하게.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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