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말을 마친 이사벨이 다시 배시시 웃었다.
아직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은 말을 들은 당사자인 칼리드뿐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입을 열었다.
“와, 왕자님이라고?”
많이 당황했는지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계속 말을 더듬으며 왕자님이라는 단어만 반복하는 제 제자를 보던 엘레노아가 나직이 읊조렸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구나. 비슷한 거긴 하지 않니. 네가 구해준 것도 맞고.”
“그, 그래도.”
“가서 백마라도 타고 다시 오련?”
“……놀리지 좀 마세요, 제발.”
작게 투덜댄 칼리드가 붉어진 제 얼굴을 보이기 싫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사벨은 여전히 비몽사몽 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보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전에도 뭔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었나?’
그래. 분명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의식을 찾은 누군가가 날 보며 뭐라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던 적이…….
‘……요정님?’
기억 속 한 장면이 머리를 툭 하고 치고 지나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꽤 선명한 기억이었다.
내가 하프 엘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쉬이 잊어버릴 수 없었을 그런 추억의 한 자락.
‘……에녹?’
“삐비빅?”
아뿔싸. 그냥 생각만 한다는 게 습관적으로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난 새소리에 놀라 흠칫 몸을 떨며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도 이곳에 있는 누구도 내 쪽에 집중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방금 그렇게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는데 내가 눈에 보이겠어.
‘그나저나 에녹이라…….’
나는 다시 소리를 내기라도 할까 주의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보다 보니 에녹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머리 색이랑 눈 색이 같은 것도 그렇고 분위기도 비슷하잖아.
이러다가 둘이 혈연관계라고 해도 믿겠어.
둘의 얼굴을 떠올리며 슬쩍 비교해 보던 나는 곧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나도 참. 이 상황에 무슨 이런 생각을…….’
정신 차리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사벨과 에녹이라니.
제일 상극인 사람을 고르라면 바로 그 두 사람일 텐데.
얼른 상념을 떨쳐내려 세게 고개를 저었으나 나는 좀처럼 이사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 목숨을 구해준 이를 나락으로 보낸,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끔찍한 저주를 날린 마녀.
그리고 여전히도 레오나드의 목을 옥죄는 자.
분명 이사벨에 관한 것이 맞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모든 설명이 눈앞의 저 여자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잠시 그런 고민을 했으나 곧 그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계속 과거를 지켜보다 보면 곧 알게 될 것일뿐더러, 미리 안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앞으로 닥쳐올 불행을 알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에 무력감이 들었다. 어쩌면 부모를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레오나드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꽤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은 내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어찌 보면 이건 기회였다. 레오나드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는 값진 시간.
‘그래. 이미 지나간 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스스로 다독이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이사벨이 보였다.
물끄러미 보는 내 시선이 느껴졌던지 칼리드만을 쫓던 눈이 나에게 와 닿았다.
한참을 그렇게 빤히 보던 이사벨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읊조렸다.
“왜 저 앵무새한테서 익숙한 기운이…….”
작게 중얼거린 말은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칼리드와 엘레노아의 말소리에 묻혔다.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사벨도 결국 내게서 관심을 거두고 칼리드에게 집중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별생각 없이 흘린 저 말이 나에게는 제법 중요한 의미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익숙한 기운이라고?’
그럼 내가 지금 이렇게 된 이유가 저 아이, 아니 본래 내가 있어야 할 시간대의 이사벨 때문이라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이런 현상은 마법이 아니라면 설명이 어렵고 지금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니까.
그렇다면 언제 손을 쓴 거지? 북부에서 마주쳤을 때? 아니면 내가 쓰러진 후에 따로 나를 찾아왔나?
초조함에 손이 떨리고 마음이 급해져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만약 후자가 맞는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거니까.
의식이 없는 내 곁에는 항상 레오나드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제정신일 때도 매한가지이지 않았는가.
‘……빨리 나가야 하는데.’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반려의 언약을 맺은 것도 아니니 레오나드의 상태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지?’
“삐비빅!”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금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제 엘레노아가 이사벨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 것 같은데.
‘저주를 날릴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전에 황후가 말한 시간이 5년이었으니 과거의 모든 일이 끝나는 건 결국 5년을 훌쩍 넘긴다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아는 건 좋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여기 갇혀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 감기는 못 하나?’
생각해 보니 여기 책 속 세계잖아. 뒤로 넘기는 거 못해?
다급함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얼핏 엘레노아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래, 이사벨로 하자. 네 이름은 오늘부터 이사벨인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끼기긱-거리는 미묘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광경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말, 누군가가 빨리 감는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이게 뭐야?’
엘레노아와 칼리드, 그리고 이사벨의 움직임이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양 빨라졌고 창밖의 풍경 또한 눈 깜짝할 새에 바뀌었다.
분명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화창한 봄이었는데 잠깐 초록빛이 스쳐 지나간다, 싶더니 어느새 나무에서 단풍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도 제법 쌀쌀해졌다. 아무래도 늦가을 정도로 시간을 건너뛴 모양이었다.
‘뭐 이런 일이…….’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빌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무슨 마법도 아니고…….
‘아.’
번뜩 든 생각에 소름이 돋아 몸을 움츠린 순간이었다. 귓가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마치 이 순간을 즐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그 목소리가 그것을 이제 알았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원하던 그 순간에 맞춰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잠시 사라졌던 긴장감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빨리 나가서 확인하면 그만이지.’
그러니 일단은 정신 차리자.
내가 이 모든 것을 봐주기를 바란 모양인데, 그렇다면 기꺼이 열심히 봐줘야지.
고개를 세차게 저은 나는 다시금 눈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맞춰 이제는 조금 두꺼워진 옷을 입은 이사벨이 집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발그레한 볼을 드러내며 폴짝폴짝 다니는 것이, 무언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는지 이사벨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레노아가 작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좋니?”
“네! 저 어디 놀러 가는 거 처음이에요. 여행이다, 여행!”
“여행은 무슨. 그냥 상점가에 가는 것뿐인데.”
툴툴거리며 답한 엘레노아가 의자에 걸려있던 로브를 몸에 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그렇게 해도 즐거워 보이는 이사벨이 사랑스러웠는지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자리한 채였다.
잠시 흐뭇한 얼굴로 서 있던 엘레노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작게 탄성을 뱉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가 들어있는 새장을 덥석 들어 올렸다. 그 흔들림 뒤에는 곧바로 멀미가 찾아왔다.
아. 진짜 이 몸을 어쩌면 좋지.
“앵무새는 왜요?”
“앵무새가 아니라 코코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칼리드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때린 엘레노아가 새장을 든 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마를 문지른 칼리드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앵무새는 맞잖아요. 맨날 저만 때려.”
“그 몸이면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 엄살은. 그리고 여기 너 말고 때릴 애가 어디 있는데?”
“그야…….”
붉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더니 저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이사벨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이리로 달려오는 이사벨을 보던 칼리드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네, 뭐. 저밖에 없긴 하네요.”
“잘 아는구나. 코코는 의사한테 데려가려는 거니 잔말 말고 그냥 따라오렴.”
“의사요?”
의아하다는 물음에 엘레노아가 살짝 새장을 들어 나를 들여다보았다.
고운 미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찌푸려졌다.
“코코가 요새 통 울지를 않아서 말이야. 어디 아픈 건 아닌가 걱정이 돼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 거면 그냥 제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도 모르는데?”
그에 칼리드가 뭐라 더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흐음. 이것까지는 생각 못 했네. 하긴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있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뭐, 이렇게라도 따라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
굳이 더 미래로 가지 않고 여기서 멈춘 것을 보니 이때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으니까.
나는 결국 엘레노아에게 달랑달랑 들린 채로 집을 나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