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궁금해?”
“…….”
“대답.”
“……으, 네.”
이사벨이 겁에 질려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자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춘 피르안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
“집에서 쫓겨나 진즉에 죽었어야 할 것이 아주 멀쩡하게 시장가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이야.”
올라가 있던 피르안의 입꼬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사벨은 늘 웃는 낯인 피르안이 언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잘 알았다. 무언가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이사벨,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아직 안 죽었다는 것도 짜증 나는데 아주 기분 좋다는 듯 활짝 웃으면서 다닌다고 하면-.”
“…….”
“그러니까, 내가, 여기가 돌겠어, 안 돌겠어?”
억센 손길이 이사벨의 관자놀이로 향했다. 머리가 거세게 흔들리는 탓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곧 토할 것만 같았지만 이사벨은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그럴 때면 피르안은 저가 역겨워서 그런 거냐며 더 화를 내었으니까.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시장가까지 피르안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피르안은 위세 높은 데프론 공작가의 하나뿐인 귀한 도련님이 아니던가.
그래서 방심했다. 이래서 사람 많은 곳은 절대로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난생처음 맛본 즐거움에 홀려 불나방처럼 달려든 꼴이었다.
누군가는 지금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마법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애초에 이사벨의 머릿속에는 그런 선택지 따위 없었다.
이름도 없는 사생아와 공식적으로 알려진,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도련님. 아주 어릴 적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그 차이는 절대 무시할 것이 못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사벨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려워 보였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다음에는 어디로 손이 날아들지도 모르는데, 야속하게도 손과 발은 어디에 묶이기라도 한 마냥 바닥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번에는, 저번에는 어떻게 했더라.
“아.”
이사벨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공작가에서 쫓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괴롭힘을 당하던 제 앞을 막아선 등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직 그리 크지 않았던 등은 저와 달리 한없이 곧고 당당하기만 했다. 지금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 우연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일어나겠는가. 그건 더 이상 우연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운명’이지.
“사생아면 사생아답게 굴어야지.”
“…….”
“그럼 왜 그렇게 웃고 다녔는지 이유나 들어볼까?”
다시금 들린 피르안의 목소리에 이사벨은 고개를 들었다. 큼지막한 손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곧 이어질 통증에 이사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당장 그 손 치워.”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이사벨은 고개를 들었다.
최근 들어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흑발이 시야에 잡혔다. 그에 심장이 쿵쿵-하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찾아왔다, 기적이.
* * *
‘이게 무슨 상황이야 도대체!’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앞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폈다.
갑작스레 이사벨이 도망간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난데없이 웬 낯선 소년 하나가 위협을 가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알리려 최대한 소리를 내보았으나 곧장 무자비한 발길질이 돌아온 탓에 그만두었다.
더했다가는 누가 오기도 전에 내가 잠시 들어온 앵무새가 죽을 것 같은 것은 물론이고 이사벨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보인 행동을 생각하면 아마도 데프론 공자로 추정되는 저 소년은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
‘아니, 그것보다 왜 데프론 공자가 이사벨을 찾아온 거지?’
도대체 둘이 무슨 연관이 있길래?
의문스러운 마음에 힐끗 데프론 공자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사벨이 데프론 공작저에서 쫓겨났다고. 진즉에 죽었어야 했는데 행복하게 웃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 말에 그제야 내 눈에 이사벨의 생김새가 제대로 들어왔다. 어딘가 에녹과 닮았다고 생각한 그 얼굴이.
……아, 설마.
‘정말 이사벨이 데프론 공작가의 핏줄이었던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마법과 관련된 중요한 물건을 하필 아이작 데프론이 가지고 있었던 것도. 그가 갑작스레 ‘셀리아’라는 이름의 양녀를 들인 것도.
‘셀리아가 이사벨이라면, 그녀가 제 몸을 의탁할 곳으로 데프론 공작가를 정한 것도 납득이 되잖아.’
아니나 다를까, 곧 데프론 공자의 입에서 이사벨이 데프론 공작가의 ‘사생아’라는 것이 언급되었다.
……세상에, 맙소사.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던 일이 사실임이 드러나자 조금, 아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시 한번 소리라도 내야 하는 걸까? 누군가 알아채고 여기로 오기를 바라면서?
밀려오는 긴장감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여기서 이사벨이 잘못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모든 사건은 원래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 애가 맞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새장만 없었더라도 도움 요청하러 날아갔을 텐데.’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칼리드나 엘레노아 둘 다 외모가 눈에 띄는 편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정확한 상황 전달을 못하더라도 위급하다는 것 정도는 알릴 수 있을 터였다. 엘레노아는 저가 키우는 앵무새이니 곧장 따라올 테고.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쉬운 일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새장이 상당히 짜증스러웠다.
‘……이 망할 새장.’
어쩐지 분한 마음에 나는 새장을 세게 걷어찼다. 물론 내 다리만 아팠기에 별 소용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이사벨이 마법을 쓰거나 누군가가 구하러 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사벨이 뭔가를 해주길 기대하기에는…….
‘저대로 기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이사벨은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상황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녀가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남은 건 누군가가 구해주러 오는 것뿐인데.’
나는 불쑥 떠오른 두 얼굴에 잠깐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엘레노아와 칼리드가 구하러 오는 건 가능성이 희박해.’
나는 이사벨이 골목으로 들어오기 전, 시장가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기억했다.
갑작스레 난입한 마차로 인해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 그 인파에 밀려 일터가 망가진 상인들도 꽤 여럿 있었고.
그만큼 다들 혼비백산인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엘레노아와 칼리드는 아직 이사벨이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었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정체를 안 들키려 애쓰는 와중에 실체화한 뒤 날아다니면서 이사벨을 찾을 수도 없을 테고.
그런 와중에, 안 그래도 복잡하고 넓은 시장가에서, 어둡고 좁은 골목에서 벌벌 떠는 이사벨을 찾아낸다는 건-.
‘뭐, 그 정도면 운명이지.’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다. 나는 쓸데없는 기대를 버리고 서둘러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두리번거린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데프론 공자가 손을 치켜들었다.
‘……안 돼!’
이사벨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자동으로 그쪽을 향해 튀어 나갔다.
예상대로 이사벨은 저에게 날아오는 손을 보면서도 굳은 채로 가만히 주저앉아있었다.
나는 곧 눈앞에 벌어질 끔찍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마찰음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골목을 채운 것은 생각보다 매우 익숙한 음성이었다.
“……당장 그 손 치워.”
화를 잔뜩 참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곧장 눈을 떴다.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둘뿐이던 골목에 새로운 이가 서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데프론 공자와 이사벨의 사이에.
‘……말도 안 돼.’
나는 차가운 얼굴로 데프론 공자를 보고 있는 칼리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물론 아예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가만히 생각하던 나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이사벨을 살폈다.
칼리드가 나타난 이상, 이사벨은 안전했으니까.
이사벨은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칼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 쪽에 가서 붙은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잔뜩 놀란 듯 커진 녹색 눈동자가 차마 흐르지 못하고 고인 눈물에 의해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 이사벨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마 그녀의 생각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이것은 운명일지 모른다고.
‘왜 이사벨이 이 시점을 나한테 보여주려고 했는지 알겠네.’
이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은 이사벨의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던 거다. 속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사벨 데프론은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걸.
“이건 또 뭐야?”
갑작스레 제 앞을 가로막은 칼리드의 모습에 데프론 공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드는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비키라고 했어. 마지막 경고야.”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아, 맞다.”
다시금 버럭 화를 내려는 데프론 공자의 말을 끊고 칼리드가 작게 탄식했다.
이어서 나온 목소리는 지금까지 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늘했다.
“생각해 보니 네가 한 짓이 있는데, 내가 굳이 경고할 필요는 없지.”
“뭐? 무슨 소리……크헉.”
데프론 공자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던 순간이었다.
칼리드는 그대로 손을 휘둘러 데프론 공자의 배를 쳤다.
멀쩡하게 서 있던 그가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날아가도록.
퍽. 꽤 둔탁한 음이 좁은 골목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