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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3화 (113/144)

#113화

데프론 공자의 몸이 하늘 위로 붕 떠 올랐다.

분명히 이사벨을 삼키고도 남았을 체격이었는데, 몸이 붕 뜨는 꼴이 꼭 바람 빠진 풍선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반면에 그를 주먹 한 번에 날려버린 칼리드는 꽤 덤덤한 얼굴이었다.

살짝 구겨져 있는 미간이라든가 꽉 쥐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으억……너, 무슨…….”

구석에 쌓아둔 나뭇더미들에 처박힌 데프론 공자가 입안에 고인 피를 툭 하고 뱉었다.

자기가 이런 취급을 당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누구나 떠받들어주는 귀한 도련님이었을 테니.’

그나저나 저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잠시 제 몸을 추스르던 데프론 공자는 곧 씩씩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데프론 공작가는 요즘 자식 교육을 이런 식으로 하는 모양이지?”

칼리드가 서늘한 말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데프론 공자는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하긴,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도 그랬다면 칼리드의 정체는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겁도 없이 카일룸 제국 최고 권력 가문에 도전한 미친놈이든가, 그것도 아니면 데프론 공작가의 권세 따위는 상관없는 실력자이던가.

‘설마 황태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테니.’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데프론 공자에게는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지금의 칼리드는 데프론 공자에게 제법 위협적이었으니 말이다.

“이, 이런 미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았는지 곧 데프론 공자가 제 옆에 있는 나무 막대 하나를 집었다.

문제는 그게 꽤 높게 쌓여있던 나뭇더미들의 중심축이었다는 점이었다.

받침대를 잃은 나무 탑은 곧 흔들렸고 잠시 뒤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꺄아악!”

무너져 내린 나뭇더미는 데프론 공자가 아닌 그 옆을 지나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이쪽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온 사람들인 듯했다.

어차피 새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데프론 공자는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고 칼리드는 몸을 돌려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이사벨은…….

‘……어라?’

나처럼 겁에 질려 움츠리고 있을 줄 알았던 이사벨은 어느새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본능에 기인한 행동인 것 같았다.

이사벨이 다급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자 그녀의 손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사벨이 처음 칼리드의 등에 업혀 엘레노아의 집에 왔던 날, 그때 처음 보았던 그 반짝임이.

그리고 그 순간, 무서운 기세로 떨어지던 나무 막대가 허공에서 멈췄다.

“……어?”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뭐, 뭐가 어떻게 된…….”

졸지에 공중에 뜬 나무 막대를 마주하게 된 사람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데프론 공자는 갑작스러운 혼란에 놀란 것인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잠시 이사벨과 나무 막대를 번갈아 보던 사람들의 낯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래, 충격적이겠지.’

이사벨의 주변에 반짝임이 가득했으니, 사람들이 이 알 수 없는 힘의 출처쯤이야 금방 알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물론 이어서 들린 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이었지만.

“……괴, 괴물이야!”

그곳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이사벨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그에 잠시 조용하던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끌벅적해졌다.

“세상에, 괴물이래.”

“하긴. 아까 그 힘 봤어?”

“무서워…….”

자신을 향한 말을 전부 들은 이사벨의 몸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 데프론 공작가의 마차를 마주했을 때처럼 큰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괴물이라니?’

저들은 전부 이사벨 덕에 목숨을 구한 이들이었다. 그걸 저 사람들도 알았다.

그런데 고작 마법 좀 썼다고, 괴물 취급을 한다고?

‘이게 무슨…….’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큰 충격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이사벨은 어쩐지 초연한 기색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사벨이 처음 엘레노아의 집에 왔던 날,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칼리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이사벨은 늘 이런 삶을 살아왔던 거야. 먼저 손을 내밀어도 늘 배척받고 외면당했던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구하는 이들을 모른 체할 수도 없었을 거다.

‘그러면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니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내가 이사벨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곧 하얀 손이 이사벨의 얼굴을 감싸 귀를 막았다.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향기에, 나는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고개 들어, 이사벨.”

“스, 스승님.”

이사벨의 얼굴이 엘레노아의 손에 이끌려 조심스레 위로 들렸다. 다시금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스, 스승님. 저, 저…….”

“그래.”

“저, 저 사람들이 너무 미워요.”

마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사벨이 몸을 떨며 말했다.

“너무, 너무 미워서……겨, 견딜 수가 없어요.”

그 나약한 몸짓을, 엘레노아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곧 작은 몸이 따듯한 품에 안겼다.

“그래. 마음껏 미워하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

“그래도 돼. 너는 그래도 된단다.”

“흐으윽…….”

저에게 쏟아지는, 벅찰 정도로 따스한 말에 이사벨은 결국 그 품에서 목 놓아 울었다.

엘레노아는 그런 아이의 귀에 쉴 새 없이 다정한 말을 속삭였다.

미워해도 괜찮다고, 저런 약한 인간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라고.

우리가 네 옆에 항상 있어 주겠다고.

나는 그제야 이사벨이 이 순간을 나에게 보여주려고 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엘레노아의 위로는 어렸던 이사벨을 위한 말임과 동시에-.

그녀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 * *

또 한 번 시간이 빠르게 넘어갔다.

어지러움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엘레노아의 집이었다.

‘이번에는 어느 시점으로 넘어온 거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언제쯤으로 타임-리프 했는지를 가늠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서 깔끔하게 포기했지만.

집 안 물건들만 가지고 지금이 언제쯤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기도 했고, 나에게 그럴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위에서 짓누르고 있기라도 한 듯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찝찝하고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몰래 엿보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것까지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사벨. 지금까지도 레오나드를 힘들게 하는 그 여자를, 어쩐지 내가 이해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아니야, 정신 차려. 그렇다고 칼리드를 죽이고 레오나드를 괴롭게 한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나는 있는 힘껏 양 볼을 내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물론 솜털 같은 깃털은 볼에 요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그나저나 진짜 여긴 언제쯤인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불쑥 문이 열렸다. 엘레노아의 방 문이었다.

뭔가 그리 급한지 평소와 다르게 조급한 발걸음으로 나온 엘레노아는 역시 그녀답지 않게 하얗게 질린 낯이었다.

다소 크게 난 소리에 바로 옆 방에 있던 이사벨 역시 눈을 비비며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어, 이사벨. 그러니까, 내가 좀…… 어딜 다녀와야…… 아, 아니지. 너도 같이 가야 하나…….”

“스승님?”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사벨에게 뭐라 답하려던 엘레노아가 곧 거칠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녀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시선을 내리자 엘레노아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잔뜩 구겨진 하얀 물체는 종이 뭉치였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보낸 것이 분명한 편지 말이다.

나는 조금 더 살피다 발견한, 편지 봉투 구석에 있는 익숙한 드래곤 문양에 그만 깨닫고야 말았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아니다. 우, 우선 내가 먼저 다녀오고 나서 알려줄게. 금방 갔다가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스승님!”

재빨리 준비를 마친 엘레노아가 외출을 하려는지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저러다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던 이사벨이 여러 번 불러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이내 문 앞에 도달한 엘레노아가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그녀가 손을 대기도 전에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곧 문이 반대쪽에서 열렸다.

“아.”

갑작스레 방문한 손님은 문 앞에 바로 서 있는 엘레노아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동그랗게 뜬 눈은 좀처럼 감기질 못했고 손은 손잡이를 잡았던 상태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문을 열려던 엘레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간의 묘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방문객,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칼리드였다.

“아, 저 그러니까…….”

“…….”

“보낸 편지는 받아보셨어요? 아, 혹시 아직 안 도착했나.”

“……받았어.”

엘레노아의 나직한 대답에 칼리드가 그제야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문손잡이가 반쯤 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손을 들어 제 뒤통수를 긁적이던 칼리드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바, 받으셨구나. 제가 워낙 두서없게 적어서 이해하셨을지 모르겠네요.”

“…….”

“벼, 별건 아니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

“제가 이상하게 적어서 못 알아들으셨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편지가 다른 곳에 갔을 수도 있고…….”

“…….”

“그래서 일단 여기를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런 말이 없는 엘레노아의 반응에도 한가득 제 할 말을 쏟아내던 칼리드가 불쑥 말을 멈추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하하.”

그렇게 칼리드가 메마른 웃음을 토해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손을 뻗은 엘레노아가 그대로 칼리드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제는 성체가 되어 엘레노아의 머리 위를 훌쩍 넘기는 장정이 된 그가 힘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키 차이 때문에 다소 불편한 상황이었는데도 엘레노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제 품 안에 있는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주 있는 힘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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