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난데없는 상황에 칼리드는 엘레노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 있던 칼리드는, 곧 느릿하게 제 뒷머리를 토닥거리는 손길에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더 말하지 않아도 돼. 괜찮단다.”
엘레노아가 칼리드의 귓가에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듯한 느낌이었다.
다정한 속삭임과 손짓에 결국 칼리드가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껏 그가 전혀 보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나는 그 낯을 물끄러미 보다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이사벨이 다가가 같이 껴안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역시. 황후와 황제가 죽었구나.’
그렇다면, 지금은 칼리드가 처음 엘레노아의 집을 찾아온 지 5년쯤이 지난 시점이라는 소리였다.
‘이제 칼리드는 당분간 여기 오지 않겠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엘레노아의 품에서 울던 칼리드가 입가에 겨우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즉위 문제도 있고, 한동안은 못 올 거예요. 이사벨도 있으니 스승님은 그냥 여기 계세요.”
“당연하지.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러실 거 같았어요. 하하.”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너 제대로 된 황제가 되기 전에 찾아오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다.”
엘레노아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눈물 자국이 나 있는 낯을, 칼리드는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설핏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누구 제자인데요.”
몇 번의 포옹을 더 한 뒤, 칼리드는 그대로 뒤를 돌아 엘레노아의 집을 떠났다.
그들이 만나고 처음 맞이한, 기나긴 이별이었다.
* * *
그다음 장면은 1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연하게도 그 세월을 내가 다 겪은 것은 아니었고, 또다시 휘몰아치는 광경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지금이 되어있었다.
그동안 칼리드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즉위식을 잘 마무리한 뒤로는 종종 편지를 보내왔던 것 같았다.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칼리드는 제법 황제 역할을 잘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노력이 결실을 맞아, 칼리드가 매우 오랜만에 엘레노아의 집에 찾아오는 날이었다.
“어떡하지? 뭐 더 준비할 거 없을까요? 옷은 이거면 괜찮나?”
음식이 잔뜩 차려진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이사벨이 발을 동동 굴렀다.
손님을 맞을 준비는 아까 얼추 끝났는데도 바삐 움직이는 제자를 보던 엘레노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제 그만 앉아. 왜 이렇게 호들갑이니.”
“그렇지만, 뭔가 계속 부족한 거 같은걸요.”
“걱정하지 마. 평소에 이거보다 더한 것들을 누리는 애야. 오늘 하루쯤은 맛없는 거 먹어도 돼.”
“……그럴까요?”
작게 속삭인 이사벨이 키득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창문 밖을 내다보는 몸짓에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묻어났다.
이사벨의 감정은,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에 그리움과 합쳐져 배가 되어 불어난 듯했다.
자리에 앉아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저 드릴 게 있어요!”
“줄 거라고?”
어리둥절한 기색인 엘레노아를 뒤로 한 채, 이사벨은 다급히 제 방으로 뛰어갔다.
잠시 뒤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웬 노트였다.
“자! 받으세요!”
“이게 뭐니?”
“보시면 알 거예요.”
기대감 어린 녹색 눈동자에 엘레노아는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면서도 그 노트를 얌전히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하던 나는 곧 눈에 들어온 노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엘레노아의 손에 있는 노트는 내게 꽤 익숙한 생김새였다. 내가 아는 물건과 상당히 비슷한…….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야. 같은 것인 게 확실해.’
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살짝 자주색 빛이 도는 갈색 표지.
내가 아멜리오 백작저를 떠난 이후부터 쭉 품고 있던 엘레노아의 일기장이었다.
* * *
“일기장이에요. 마음에 드세요?”
엘레노아에게 선물을 전해준 것이 뿌듯한지, 이사벨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저건 엘레노아의 일기장이었다. 확실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나와 함께 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종국에는 빈 페이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바로 그 일기장.
‘……그런데 저걸 왜 이사벨이?’
분명 이사벨을 만나기 전의 일까지 다 기록되어있던 일기장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시기가 좀 안 맞지 않나?
뜻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웠으나, 이 의문은 이사벨이 금방 해결해주었다.
“보니까 일기장이 꽤 낡았는데도 계속 쓰고 계시더라고요. 새 걸로 바꾸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일기장이 좀 낡긴 했지. 그걸 또 언제 봤대.”
“헤헤. 이 정도는 쉽죠. 쓰기 편하게 제가 내용도 그대로 옮겼으니 걱정 마세요.”
자신만만한 얼굴의 이사벨을 보던 엘레노아가 일기장을 펼쳐 한 페이지를 넘기며 대답했다.
“……그래. 필체까지 똑같은 걸 보니 정말 그대로 옮겼구나. 내 제자가 이런 데 소질이 있을 줄이야…….”
“스승님도 참. 그거야 당연하죠! 제가 따라 쓴 게 아니라 마법으로 옮긴 거니까요.”
“다행이구나. 내 일기를 훔쳐본 건 아니라는 말이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절대 아니에요!”
의기양양하게 웃던 이사벨이 펄쩍펄쩍 뛰었다.
그에 다시금 웃던 이사벨이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선물이니? 오늘 무슨 날이던가.”
“전하께서 오랜만에 오는 날이기도 하고, 또 제가 주변을 산책하다가 엄청난 것을 발견했거든요.”
“엄청난 거?”
“네. 혹시 ‘아브로고’라고 아세요?”
아브로고?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것은 엘레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구나.”
“그러실만해요. 잘 알려지지 않은 꽃이거든요.”
“그렇게 신나서 말하는 걸 보니 엄청난 효능이 있는 모양이지?”
“네! 아브로고를 첨가한 물건은 내구도가 엄청나게 상승하거든요. 거의 낡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역할도 해요! 일종의 보호막이죠.”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그제야 수도 북부에서 들었던 ‘보호막’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깨달았다.
엘레노아의 일기장이 레오나드의 저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빙의되고 2년 동안 멀쩡하던 것이 갑작스레 낡기 시작한 건…….
‘내가 저주의 근원인 레오나드와 함께 했기 때문이겠고.’
비로소 퍼즐이 맞춰져 가는 기분이다.
이미 내가 저주의 예외 대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그리 충격받지는 않았다.
나보다는 레오나드가 더 걱정이었다.
당신은 지금 괜찮은 걸까.
“……팔아서 장사해도 되겠는데? 어디서 얻을 수 있는 거니?”
생각보다 엄청난 효과에 엘레노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사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통에 금방 시무룩해졌지만.
“아쉽게도, 당분간은 구할 수 없어요. 100년에 한 번 피는 꽃이고 그마저도 1년 안에 시들거든요.”
“아니, 그런 귀한 걸 고작 일기장에 발랐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스승님이 오래 쓰시는 물건이 떠오르지 않았는걸요. 장신구 같은 건 잘 안 하시잖아요.”
아깝다며 울상을 짓는 엘레노아의 손을 잡은 이사벨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스승님께 드리는 건데 전혀 아깝지 않아요.”
엘레노아에 대한 이사벨의 신뢰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녹색 눈동자에 깊은 애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전하께 드릴 선물도 만드느라 꽃의 반만 써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구적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일기장 뒷면 구석에 쓰인 이름의 주인에게 누가 마법을 걸지 않는 이상.”
“그럼 이 일기장이 망가질 일은 평생 없겠구나.”
이제 이 세상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는 이사벨뿐이고, 그녀는 절대로 엘레노아를 해가 되는 짓을 하지 않을 테니.
마지막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뜻을 알아들은 이사벨은 활짝 웃었다.
“물론이죠. ‘우리’는 계속 함께할 테니까요.”
그에 미소 지은 엘레노아가 일기장 한구석에 쓰인 제 이름을 쓰다듬던 순간이었다.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딱 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은 타이밍에 엘레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어떡하죠! 이야기하느라 마지막 점검을 못 했어요.”
“됐어. 그냥 대충 준비해도 된다니까.”
그러는 저도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으면서.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엘레노아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이윽고 그녀가 문을 열자 아직 익숙하지 않은 큰 키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전보다 더 성숙해진 것 같은 모습의 칼리드였다.
오랜만에 오는 엘레노아의 집이 어쩐지 어색한지, 아니면 감회가 새로워서인지 잠시 멈춰 서서 둘러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어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제 스승님이요.”
칼리드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떠나기 전과는 사뭇 달라진 대답에 엘레노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 자식이? 네가 내 제자인 거겠지.”
“죄송한데, 둘이 같은 말이거든요.”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거란다, 제자야.”
엘레노아가 발꿈치를 살짝 들어 칼리드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그에 칼리드가 아픈 시늉을 하며 물러났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칼리드의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렸던 것은.
“아.”
예상치 못한 칼리드의 움직임에 놀란 듯 그의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는 짧고 높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여자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 분위기에 칼리드가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아, 갑자기 놀라셨죠. 제가 소개할게요.”
그가 살짝 비켜서자 아담한 체격의 여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금발 머리를 가진, 순한 인상의 여자였다.
잠시 제 뒷머리를 긁적이던 칼리드는 곧 제 일행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가 기함할 만한 말과 함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