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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5화 (115/144)

#115화

“……뭐라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은 엘레노아였다. 난데없는 돌발선언에 그녀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해는 했다. 칼리드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던 나조차 놀랄 정도였으니까.

“아니, 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편지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

“그거야 편지로 하기에는 좀 그런 말이니까 그랬죠.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얼굴을 보고서 하는 게 낫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라 언질도 없이……. 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엘레노아의 손이 칼리드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에 칼리드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일단 굽히고 들어갔다.

“……아, 이렇게 당황하실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눈썹을 늘어뜨린 칼리드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자 칼리드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그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안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엘레노아와 이사벨에게는 아니나, 근처 새장에 있던 나에게는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게 제가 미리 말씀드리고 오자고 했잖아요.”

“괜히 부담가지실까 봐 그랬지.”

“말 안 하고 오는 게 더 부담이실 거라고요.”

여자의 작은 핀잔 뒤로 둘은 잠시 투닥거렸다. 말을 들어보니 이곳에 오기 전에도 약간의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핏 보면 싸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정도였으나 나는 알았다.

그 기저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엘레노아 역시 느낀 듯했다.

잠시 둘이 싸우는 꼴을 보고 있던 엘레노아가 곧 심드렁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데려온 것을 보니 아주 푹 빠진 모양이지?”

“네?”

“여기 거의 살다시피 했던 게 5년인데 그동안 누구도 여기 데려온 적 없었잖니.”

“그건…….”

차마 부정은 못 하겠는지 칼리드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한껏 당황한 낯이었다. 그에 눈을 세모꼴로 뜨고 있던 여자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드렸네요.”

“괜찮아요. 멍청한 제자 놈 탓이니까. 나는 엘레노아 윈저라고 해요.”

냉정한 평가에 다시금 웃던 여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한쪽으로 가지런히 땋아 내린 금발이 보기 좋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레아 윈스턴이에요.”

다시금 고개가 들리고, 곧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저 사람이 레오나드의 어머니…….’

칼리드는 워낙 레오나드와 닮아서 그런지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멍하니 레아를 바라보았다.

탐스러운 금색 머리칼. 온화한 빛을 띤 자색 눈동자. 살짝 아래로 쳐진 순한 인상의 눈매.

전부 레오나드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비슷한 구석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레오나드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 신기했다.

……당신도, 지금 이 광경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윈스턴이면 백작가?”

레아의 이름을 곱씹던 엘레노아가 여상하게 중얼거리자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당히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알고 계시네요?”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그거 하나 모를까 봐.”

“바깥세상에 별로 관심 없으신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도대체 얘는 나를 어떤 식으로 소개한 거야…….”

엘레노아가 작게 투덜거리며 멀찍이 선 칼리드를 흘겨보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녀는 곧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작게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소개할 사람이 더 있는데 인사도 안 시켜줬네.”

말이 끝난 즉시 엘레노아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있는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뻗어진 손이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자, 인사해야지. 이사벨.”

“아, 이분이 엘레노아 님의 또 다른 제자이신가요?”

엘레노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레아의 시선이 이사벨 쪽으로 향했다.

그 과정이 어쩐지 긴장이 되어서, 나는 혼자 마른 침을 삼켰다.

‘둘은 결코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으니까.’

아.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를 다 아는 채로 과거를 본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아 윈스턴이에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레아가 저보다 조금 작은 이사벨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안에 어린 감정은 명백한 호의였다.

악수하려는 듯 곧 이사벨의 앞으로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이사벨은 그 고운 손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뒤에 들린, 지금 상황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칼리드와 레아가 등장한 뒤로, 이사벨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탁-.

“소, 손대지 마.”

제 앞에 다가온 레아의 손을 쳐낸 이사벨이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던 듯 잠시 집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그 고요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다시 이사벨이었다.

아까와 같은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 나한테…… 손대지 마. 건드리지 마.”

이사벨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눈에 띌 정도로 거칠어졌다.

그렇게 잠시 헐떡이던 이사벨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 가까이…… 오, 오지…….”

“……이사벨?”

눈에 띌 정도의 변화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엘레노아가 이사벨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돌려세웠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이 돌려지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레아를 향해 있었다.

“……시, 싫어. 싫어. 싫어.”

“이사벨, 정신 차려! 내 말 들리니?”

“싫어. 흐으윽…….”

“이사벨!”

긴급한 상황에 좀 떨어져 있던 칼리드가 달려왔다.

이사벨의 상태를 살피느라 그녀의 옆에 선 칼리드 탓에 레아의 몸이 가려졌다. 제 시야에서 레아가 사라지자 이사벨은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크게 숨을 쉬며 정신을 놓았다.

곧장 이사벨의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댄 엘레노아는 그녀가 그저 잠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긴장감을 놓았다.

잠시 뒤 칼리드가 조심스레 이사벨을 안아 방으로 옮겼다.

레아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가득했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가 뭐, 뭘 잘못한 건가요?”

“……아니요.”

그래. 레아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괜찮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금 이사벨이 보고 있는 것이 레아가 아니라, 잊힌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몇 시간 뒤 정신을 차린 이사벨은 정신을 잃기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신이 싫어.”

표독스러운 시선이 저를 걱정하며 기다린 레아를 향했다.

“죽을 만큼 싫어.”

결코 해결되지 못할 갈등의 시작이었다.

* * *

이사벨의 레아에 대한 미움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녀는 칼리드의 상대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데프론 공자가 찾아왔던 날의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든지 미워해도 괜찮아. 저런 약한 것들이 하는 말은 하등 신경 쓸 거 없단다. 이사벨 너는 너의 삶을 살면 돼.’

‘혼자가 될까 봐 걱정해서 참는 일은 그만둬. 우리가 항상 내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우리’.

그래. 엘레노아와 칼리드가 했던 저 말이 이사벨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 분명했다.

늘 혼자나 다름없던 이사벨에게 항상 곁에 있어 주겠다니.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그 소속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외롭게 보낸 나는 알았다.

하물며 아직 어린 이사벨에게는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이가 그것을 깰 누군가를 데려오고, 하필 그 누군가가 이사벨이 증오해 마지않는 인간이니.’

게다가 칼리드는,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이사벨을 구해준, 그녀가 사랑하는 이가 아닌가.

나는 이사벨의 행동을 어느 정도 납득했다. 물론 그것이 앞으로 그녀가 할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사벨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야. 어떡하면 좋지.”

“시간을 들여서 설득하면 괜찮아지겠죠. 제가 레아랑 사이가 좋아지도록 노력해볼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의 사이가 원만해지는 일은 없었다.

칼리드가 개입한 순간, 이사벨은 더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칼리드에게 선물하려던, 아브로고가 첨가된 목걸이조차 깨버릴 정도였다.

레아를 향한 괴롭힘 역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직 어리니까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웃으며 참던 레아도 괴롭힘이 지속되자 점점 지쳐갔다. 이사벨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사건이 터졌다.

여느 때처럼 칼리드와 함께 엘레노아의 집에 온 레아가 디저트를 먹고 쓰러진 날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사실을 안 칼리드는 분노했다. 지금껏 참아왔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사벨,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디저트에 시나몬을 넣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사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낯이었으나, 칼리드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레아가 시나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덤덤하게 대꾸하는 이사벨의 모습에 칼리드가 헛웃음을 뱉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그런 짓을 해? 내가 곧바로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했어.”

“그런 짓이라니요? 제가 뭘 했다고 그래요?”

“지금 그런 말이 나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을 잇던 칼리드가 이마를 짚으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니야. 됐어. 이제 더는 이 문제로 실랑이하고 싶지도 않아.”

“……….”

“이제 네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지쳤어. 마음대로 해.”

손을 내려 다시금 이사벨을 보는 눈빛에는 명백한 분노가 얽혀 있었다.

“레아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나도 바로 죽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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