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달칵.
레오나드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막 시종이 문 앞에 놓고 간 음식을 가지고 온 참이었다.
그가 든 쟁반 위에는 부드러운 수프가 놓여 있었다. 로레이나의 몫이었다.
더 든든하게 먹여도 모자랐으나, 로레이나가 다른 종류의 음식은 좀처럼 소화를 시키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로레이나.”
나직한 부름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로레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이 그에게로 천천히 옮겨왔다.
이불 밖으로 나온, 전보다 메마른 팔을 보던 레오나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며 로레이나의 옆에 앉았다.
“뭐 하고 있었어?”
“잠깐 갔다 온 거면서 뭘 그런 걸 물어요?”
로레이나가 작게 웃었다.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그 낯에, 오히려 레오나드는 참담해졌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안 좋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로레이나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져만 가는데, 에녹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사벨 쪽에서 먼저 손을 쓴 모양이라고, 제럴드를 비롯한 그의 측근들을 그렇게 추측했다.
그리고 레오나드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본 에녹 데프론은 분명 로레이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느껴지던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에녹 데프론은 어디로 간 거지.’
일단 에녹이 아브로고를 캔 것은 확실했다. 백작저 근처에서 무언가를 파낸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곳 외에는 어느 곳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아브로고를 발견하고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기라도 한 건가? 협박이라도 당했나?
아니면 이사벨이 또 다른 저주를 걸었나? 그래서 황궁 반대쪽으로 갔다는 소문이 도는 건가?
여러 생각이 레오나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런 그의 상태를 눈치챈 건지 타이밍 좋게 로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에녹은 괜찮은 걸까요?”
“열심히 찾아보고 있으니 곧 소식이 들릴 거야.”
“혹시 잘못되었을까 봐 걱정이네요. 쿨럭.”
로레이나가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쉽게 끝나지 않을 느낌에 레오나드가 서둘러 침대 옆 협탁에 둔 물컵을 내밀었다.
물을 힘겹게 삼키는 로레이나를 보며 레오나드는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
지금 네가 다른 사람 걱정을 왜 해.
더 화가 나는 건, 기침을 멈춘 로레이나가 다시금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는 사실이었다. 꼭 그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와. 수프 맛있겠어요. 잘 먹을게요.”
어차피 몇 스푼 먹지 못하고 내려놓을 거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로레이나가 웃으며 쟁반을 받았다.
그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푸른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오늘 하려고 결심했던 말이 있었다.
“로레이나, 나 잠깐 황궁을 비워야 할 것 같아.”
“황궁을요?”
스푼을 쥐고 있던 로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아무래도 내가 직접 에녹 데프론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더 빨리 찾을 것 같아.”
“아아.”
로레이나가 스푼으로 수프를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그의 말을 잘 받아들여 준 모양이었다.
“꼭 아브로고를 찾아서 돌아올게.”
머리를 정리해주며 작게 속삭이자 가만히 수프만 내려다보고 있던 로레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늘 바다를 품었다고 생각한 푸른빛 시선이 이쪽으로 닿았다.
“언제요?”
“응?”
“언제쯤 오는데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레오나드는 조금 당황했다. 로레이나라면 그냥 웃으면서 보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글쎄. 아브로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그건 정확히 말할 수가 없겠는데.”
“아브로고를 찾으면 돌아오는 거예요?”
“그렇지.”
“그럼 만약에 못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반드시 찾을…….”
“그래도 못 찾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요.”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레오나드의 입가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쯤 되니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의 로레이나는 무언가 달랐다. 아니, 사실 그는 로레이나가 왜 이러는지 알았다.
평소와 무언가 다른 것은, 레오나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브로고를 찾을 때까지 계속 돌아오지 않을 건가요?”
“…….”
“레오나드. 아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죠?”
이제는 아예 스푼에서 손을 뗀 로레이나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로레이나는 이런 면에서 눈치가 빠르다.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이런 순간에서까지 이러니 조금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면 어떡해. 자신은 어쩌라는 말인가.
“여기가 레오나드가 있을 곳인데 가긴 어딜 가요. 황제잖아요. 잊었어요?”
“……로레이나, 목 상하니까 인제 그만…….”
“싫어요. 화제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이러다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라, 레오나드는 그녀의 무릎에 있던 수프를 다른 곳을 옮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분명 화낼 텐데, 괜히 움직이다가 다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아, 로레이나. 네가 생각해도 내가 나서는 게 더 효율적이잖아. 제국 다 뒤지는 것쯤이야 나한테는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야.”
“…….”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레오나드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뒤에 할 말이 본론이었으니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네 상태를 좀 나아지게 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봤어.”
“…….”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내가 떠나는 것밖에 답이 없어. 지금이야 내가 치유해주지 않으면 상태가 안 좋아지지만, 아예 나와 떨어져 있으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
“그래, 그게 맞아. 나를 만나기 전이나 중간에 떨어져 있을 때는 아프지 않았잖아.”
사실이다.
레오나드는 아직 어렸던 14살의 로레이나를 기억했다. 간식을 더 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고 장난치기를 제법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그 행복했던 삶에 레오나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과 만나면서 잘못되기 시작한 거다. 자신 때문에 그녀의 삶이 어그러졌다.
“황궁은 드래곤의 본거지야.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소리지.”
“…….”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내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될 거야.”
계속해서 대답이 없는 로레이나를 두고, 레오나드는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잠깐이라도 말을 멈추면 찾아오는 이 고요가 두려웠다.
정해져 있는 남자 주인공의 인생을 망쳤다며 고백해오던 로레이나도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어쩐지 그때와 소름 끼치게 비슷해서 레오나드는 두려워졌다. 그때 제가 했던 말을 로레이나가 똑같이 따라 하기라도 할까 봐.
무엇이든지 다 괜찮다고 할까 봐.
로레이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레오나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작은 입술이 움직였다.
“레오나드, 아까부터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거야 다이아나의 칵테일 파티에서…….”
“네, 맞아요. 제가 다이아나의 칵테일 파티에 갔기 때문이에요. 다 내가 자초한 거라는 소리죠. 레오나드가 잘못한 게 아니라.”
“로레이나.”
레오나드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그렇게 당신을 찾았는지 알아요?”
“……알아. 살고 싶었다고 했잖아.”
수도 북부에서 로레이나가 고백했던 말을 떠올리며 레오나드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로레이나는 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떠나려는 것이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로레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요.”
“……뭐?”
“단순히 살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지난 세계에서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을까 하고 매번 생각했으니까.”
아까와 달리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로레이나가 레오나드 쪽으로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지난 삶과는 다르기 때문이었어요.”
“달라?”
“네. 이번에는 제 옆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살포시 웃은 로레이나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메마른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레오나드, 당신이 떠나도 어차피 나는 죽어요.”
“그런 말…….”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 끊지 말고 그냥 들어줘요. 언제 또 이렇게 길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요.”
이마에 닿았던 입술이 이번에는 그의 눈가에 닿았다. 그다음에는 코끝에, 그다음에는 입술에.
그가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잠시간 그곳에 머물러있던 감촉은 짙은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전 세계에서 나는 정말 외로웠어요. 그래서 혼자 남겨지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아주 진저리가 날 정도로.”
“…….”
“내 남은 삶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로레이나.”
“나는 내 시간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쓰고 싶어요.”
작은 손이 레오나드의 손을 잡아 감쌌다. 전과 달리 차가웠음에도 레오나드는 어쩐지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건, 당신이었으면 좋겠어.”
“…….”
“그렇게 해줄 거죠?”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로레이나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에 결국 레오나드는 눈물을 터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로레이나는 그런 그의 품으로 들어가 안기며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서든 꼭 다시 돌아올게요. 다음 생이든 다른 세계에서든.”
“…….”
“만약에 만나게 되면, 내가 열심히 신호를 보낼 테니까. 꼭 알아 봐줘야 해요?”
그 따스하기 그지없는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가. 레오나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그리고 잎사귀가 푸르른 어느 날이 되자 레오나드는 깨달았다.
영영 오지 않았으면 했던 그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