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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22화 (122/144)

#122화

그날은 유독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레오나드는 여느 때처럼 시종이 놓고 간 수프를 방 안으로 가지고 왔다.

침대 옆쪽으로 가져다 놓은 책상 위에는 지난밤 레오나드가 처리한 서류들이 가득했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제럴드가 일거리를 이 방으로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아침을 먹고, 서둘러 밀린 서류를 처리하고, 그다음에 다시 로레이나 옆에 누워 치유를 해야지.

그렇게 짧은 계획을 세운 레오나드가 침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로레이나는 그곳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로레이나는 최근 들어 힘이 없어서 침대에서 아예 일어나지도 못했다.

앞에서 제럴드를 만난 보고를 듣느라 평소보다 음식 가지러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잠깐이었다.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 있던 로레이나가 그 사이에 어디를 갔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로레이나?”

로레이나를 찾아 옆 방의 문을 열어젖힌 레오나드가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굳었다.

그가 애타게 찾던 분홍빛이 창틀 앞에서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밖을 내다보던 로레이나가 그의 부름에 뒤를 돌며 미소 지었다.

“레오나드.”

로레이나는 평소와 달리 다소 더워진 날씨와 잘 어울리는 얇은 재질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의 머리칼보다 살짝 진한 분홍색 레이스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가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로레이나가 혼자 옷을 갈아입은 것이 분명했다.

머리 역시 아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에 레오나드가 멍한 얼굴을 했다. 로레이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는 웃었다.

“우리 같이 산책하러 갈까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레오나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 * *

“와, 저것 좀 봐요!”

황궁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를 보며 로레이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레오나드의 손을 잡아끄는 손길에 그는 멍하니 끌려갔다.

그동안 못해본 것을 한 번에 다 해결하겠다는 사람처럼 로레이나는 정원 구석구석을 산책했다.

오늘의 로레이나는 꼭 예전 같았다. 마른 몸이 아니었다면 아팠던 일이 다 없었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를 신기하게 보는 시선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분명 좋은 일인데, 레오나드의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뛰었다.

쿵쿵쿵.

쿵.

가슴이 로레이나의 미소 한 번에 붕 떴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분명 저도 웃고 로레이나도 웃고 있는데 아까부터 원인 모를 싸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 레오나드는 그만 들어가자는, 더 있다가는 몸이 안 좋아진다는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 듣던 대로 황궁 정원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헤헤. 나와 보길 잘한 거 같아요. 왜 이런 간단한 것 하나 안 하고 있었을까요.”

다시금 웃던 로레이나가 쭉 주변을 둘러봤다. 푸른 눈이 집무실이 있는 쪽부터 회의장, 그리고 도서관이 있는 쪽을 훑었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다가 떨어지는 시선에는 뭔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났다.

“백작가도 들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될 것 같네요.”

무슨 시간?

레오나드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참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무서웠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정체 모를 불안감의 정체를, 로레이나가 확인시켜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레오나드가 한 일은 고작 그녀를 근처 벤치로 데려가 앉히는 것뿐이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분수대 앞 벤치에 앉은 로레이나가 제 옆에 앉으라는 듯 의자를 살짝 두드렸다.

레오나드가 자리에 앉자, 팔짱을 낀 로레이나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렇게 앉아 잠시 말없이 발장난을 치던 로레이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레오나드한테 사과할 거 있어요.”

“뭔데?”

“오늘 레오나드 책상에 있는 서류들을 좀 훔쳐봤어요. 미안해요.”

“좀 다른 의미로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비서관이니 진즉에 봤어야 하는 것들인데.”

“아, 그건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폐하.”

로레이나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깨를 타고 느껴지는 울림이 만족스러워서 레오나드는 잠시 눈을 감고 그것을 가만히 느꼈다.

로레이나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대충 본 거긴 한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일을 매일 하는 레오나드나 헨티슨 공작님이 새삼 대단해 보였어요.”

“새삼?”

“하하. 농담이에요. 아무튼,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잘 이해는 못 했는데. 그래도 하나 알 수 있는 건 있더라고요.”

계속해서 흔들리던 발이 멈추었다. 그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내려 살피자 두 눈이 마주쳤다.

레오나드를 담은 푸른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사람들이 바뀐 나라가 마음에 든대요. 전보다 훨씬 낫다고.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대요.”

“…….”

“좋은 황제래요, 레오나드는.”

다시금 정면을 본 로레이나가 레오나드의 어깨에 더 깊숙이 볼을 묻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이 순간을 눈에 새겨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레오나드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

“남들과 다르다고, 특이하다고 해서 누군가가 무시당하지도, 괴롭힘당하지도 않는…….”

모두가 어우러지는 그런 세상.

작게 덧붙인 로레이나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레오나드는 어딘가 지친 얼굴을 보며 입안에 맴돌던 말을 삼켰다.

둘이서 같이 만들면 되잖아.

“레오나드라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좋아하겠다.”

왜 네 이야기는 안 해? 너는 어떨 거 같은데?

“제 소원인데, 해줄 수 있죠?”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나 아직 소원권 남았어.

“응? 레오나드.”

그러니까…….

“내 말 듣고 있어요?”

가지 마.

“레오나드.”

가지 마, 제발.

하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맑은 두 눈을 보며 그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로레이나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자신이 없더라도 당신은 살라고. 당신은 행복하라고.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할까 봐. 떠나면서 남은 이를 걱정해주는 거다.

레오나드는 그제야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이상한 일투성이였는지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당연할 것 같았던 로레이나와의 하루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달라고. 가슴 속에 있는 이 말을 다 전하며 애원하면, 로레이나는 울겠지.

그런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아픈 이를 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나드는 웃었다. 그가 아는 한, 로레이나가 가장 좋아할 법한 얼굴로.

“그럴게.”

“…….”

“반드시 그렇게 할게.”

그는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또박또박 답했다. 그러자 다소 긴장하고 있던 얼굴이 사르르 풀어졌다. 푸른 눈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고마워요.”

말을 마친 로레이나가 다시금 레오나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미약한 온기를 느끼며 레오나드는 말했다.

“사랑해.”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사랑해요.”

“사랑해.”

“저도요.”

“사랑해, 로레이나.”

“사랑해요.”

“사랑해.”

“…….”

“사랑해.”

사랑해, 로레이나.

당연했던 대답이,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어깨에 기댄 몸의 무게감이 더해지고, 날이 저물어 하늘이 다소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레오나드는 가만히 앉아 똑같은 말을 뱉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제 옆에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몸을 움직인 것은 완전한 밤이 되었을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걱정이 된 제럴드가 다가온 다음이었다.

멀리서 본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한 제럴드가 조용히 레오나드의 옆에 와 섰다.

제럴드가 우산을 들어 레오나드의 머리 위쪽으로 기울였다. 제 위를 덮던 빗물이 사라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랫동안 말한 탓에 잠긴 목소리가 제럴드의 귓가를 울렸다.

“……제럴드.”

“예, 폐하.”

“로레이나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래. 좋은 황제가 되래. 그게 소원이래.”

“…….”

“정말 못되지 않았어? 거절 못 할 거 알면서,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나는, 나는 어떻게 살라고.

레오나드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사시면 됩니다. 아멜리오 백작이 말한 대로.”

“…….”

“폐하, 비가 오니 우선 안으로 들어…….”

“좋은 세상을 만들래, 좋은 황제가 되래. 그게 소원이래.”

레오나드가 아까와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큰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 그러는 줄 알았던 제럴드는 잠시 지켜본 후에야 그가 왜 그러는지 깨달았다.

제 주인은 두려운 것이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사라짐으로써 앞으로 벌어질 일이.

“네, 제가 다 기억했습니다.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

“혹시 잊어버리신 것 같으면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

“그러니 마음 편히 우셔도 됩니다.”

제럴드가 마지막 말을 뱉은 순간이었다.

비를 맞는 동안에도 또렷하게 뜨여 있던 붉은 눈동자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 눈물을 토해냈다.

레오나드가 흘린 눈물이 하늘에서 내린 비와 섞여 쓸려 내려갔다.

그제야 레오나드는 몸을 돌려 제 옆의 차게 식은 몸을 품에 안고 울었다.

그리고 제럴드는 그 옆을 조용히 지켰다.

하늘의 비가 그치고, 어둑어둑해진 주변이 그의 얼굴을 숨겨줄 때까지.

그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때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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