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나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어. 알고 보니 그 저주, 단순히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더구나.”
“…….”
“반쪽 계집이 죽어가는 이유도, 내 자리를 차지한 그 황제 때문이라고 했지. 이종족의 피가 섞인 존재라 저주의 영향을 받는 거라고.”
아이작은 아무렇지 않게 설명을 이어갔다. 에녹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서.
“그래서 나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계집처럼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면 나는 죽어갈 테지만…….”
……아아.
“너라면 그 꽃을 계집애가 아닌 내게 쓸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제발.
에녹의 눈에서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진실은 그의 생각보다도 더 잔인했다.
이런 것을 기대하고 아버지를 살린 것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랬다면…….
‘아니지.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로레이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리고 예상대로 너는 나를 선택했지.”
“…….”
“너는 내 사랑스러운 아들이지 않니, 에녹.”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제 아들을 보던 아이작이 어깨에 댄 손을 떼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에녹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간신히 대답했다.
“어떻게…….”
“…….”
“어떻게 저를 이용하실 수가 있어요?”
지나치게 모순적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면서, 지금 이 상황은 아이작이 에녹을 그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왜 제게 거짓말을 하셨어요?”
“…….”
“왜 굳이 제가, 하필 제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드셨어요?”
에녹이 절규하듯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간단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네가 내가 아닌 그 계집을 선택했지 않니.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려준 것뿐이란다.”
“……저는,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폐하와 로레이나에게 용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거였어요.”
“에녹.”
“…….”
“내 자리를 빼앗은 것들의 용서라니. 나는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단다.”
마지막 말이 끝난 순간, 에녹은 무언가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까지 그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 그리고 아버지라 굳게 믿고 있던 자와의 어떠한 연결고리 같은 것들이.
“이제 그 계집애는 없으니 어서 마음 접고 황제를 어떻게 죽일지나 생각해보렴.”
돌아서는 아이작의 뒷모습을 보며 에녹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편지를 썼다. 수신지는 카일룸 제국의 황궁이었다.
얼마 뒤 작고 한적한 항구 도시에 수백 명의 황실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레오나드는 에녹의 편지에 곧장 항구 도시로 기사들을 보내 그와 아이작을 잡아들였다.
로레이나를 잃은 그는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었고, 아이작의 죄목도 상당했다.
귀족 살해죄, 황족 시해 미수죄.
물론 증거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저주를 이용한 살인이었고 그 마법을 건 당사자인 이사벨은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로레이나의 죽음에 대한 인과관계를 밝히려면 레오나드의 저주에 대해서까지 다 알려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증거야 만들면 되는 일이 아닌가.
에녹 데프론이 일관되게 아버지의 죄를 주장했고, 그 증언들에 의해 증거는 정말 손쉽게, 아주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다.
아이작이 뭐라 손을 쓸 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사건으로 안 그래도 데프론 공작과 새로운 황제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귀족들이 다 레오나드 쪽으로 넘어갔다.
아이작의 부하들도 이사벨의 힘으로 구속하던 것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연결고리가 전부 끊어져 버렸다.
족쇄가 풀린 것을 느낀 이들이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고 목숨을 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남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늘 조용히 있던 데프론 공작부인은 이 소식에 조용히 공작저에서 자결을 선택했다.
구축해오던 힘을 전부 잃었으니 아이작에게 남은 다른 방도도 없었다.
그렇게 한때 황제였던 그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되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아이작은 저가 갇힌 감옥의 철창을 잡고 소리쳤다.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
“에녹, 다시. 다시 생각해 보거라!”
간절함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제 건너편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에녹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게 나만 죽고 끝나는, 그런 단순한 일인 줄 아느냐?”
“…….”
“너도 죽어. 너도 죽는단 말이다! 그걸 왜 몰라! 지금이라도 가서 협박을 당한 것이라고 말해라. 잘못 증언한 것이라고 말해!”
“네, 죽겠죠.”
“뭐?”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아이작에게 닿았다.
“잘못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
“가서 처벌을 받으세요, 아버지. 저도 그럴 테니.”
제 아버지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에녹의 말에 밤낮 상관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이작은 이틀 뒤 찾아온 기사들에 의해 끌려갔다.
마법을 무효화시켜준다는 아브로고.
100년에 한 번 핀다는 그 귀한 꽃으로 살린 목숨은 머리 위로 내려친 칼날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기사들이 에녹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제는 그의 차례가 다가온 것이다.
* * *
에녹이 끌려온 곳은 알현실이었다.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 곧장 단두대로 갈 것이라 생각했던 터라 그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알현실의 끝, 제일 상석에 앉아있는 것은 레오나드였고 그렇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든 같을 테니까.
에녹은 레오나드의 이목구비가 겨우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무릎이 꿇려졌다.
그는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땅만 쳐다보았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언제 죽나 기다리던 찰나, 레오나드가 작게 손짓하며 방 안의 기사들을 전부 물렸다.
“자리를 비워라.”
“하지만, 폐하…….”
“지금 당장.”
단호한 명령에 난색을 표하던 기사들이 결국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전부 나가고, 에녹의 등 뒤로 육중한 알현실의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둘만 남은 알현실 안에 숨 막히는 고요가 흘렀다. 그 지독하고 무거운 공기를 먼저 깨뜨린 것은 레오나드였다.
“……그냥 바로 죽여 버릴까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어서 불렀다.”
“…….”
“왜 아브로고를 가지고 사라진 거지? 그걸 가지고 잠적해놓고 왜 이제야…….”
무엇 때문인지 잠시 말이 끊겼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레오나드가 왜 그랬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에녹은 그 이유를 알았다.
아마 이다음에 나올 이름 때문이겠지.
“왜 로레이나가 사라진 뒤에야, 왜 하필 지금 돌아온 거지?”
“…….”
“대답해. 어쭙잖은 배려를 하겠답시고 거짓말을 섞었다간 가만 안 둘 거야. 있는 그대로 말해.”
말을 뱉는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에녹은 그것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다 이야기할 생각이었던 터라, 에녹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이작이 이사벨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던 것부터 자신이 아브로고를 그에게 썼다는 것까지 전부.
말을 듣는 동안 가만히 있던 레오나드는 에녹이 그의 아버지를 살렸다는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숨소리와 같이 미약했던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종국에는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하하하하.”
그것에 놀란 에녹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레오나드는 계속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우스웠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봐, 로레이나.’
내가 그랬잖아.
역시 인간은 믿을 게 못 된다고.
그렇게 로레이나를 사랑하던 에녹조차 그녀를 버리고 제 아버지를 선택했다. 그것이 우스워서, 레오나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는 결국 로레이나를 버렸구나.”
“…….”
“로레이나는, 죽기 직전까지도 행방을 모르는 에녹 데프론을 걱정했는데.”
그 말이 에녹의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레오나드를 보며 몸을 떨었다.
아, 역시 그냥.
“……죽여주세요.”
죽고 싶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에녹은 다시금 바닥에 고개를 파묻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알현실 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레오나드가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느릿하게 다가왔다.
에녹은 그가 서둘러 제 목을 치기를, 그래서 더는 숨을 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런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그대는 살아. 반드시 살아.”
“……폐하, 저는…….”
“살면서, 이 세상을 보면서 그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계속해서 깨닫도록 해.”
“…….”
“그리고 항상 떠올려. 로레이나 아멜리오가 에녹 데프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마침내 그의 바로 앞에 선 레오나드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런 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레오나드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그 사실을, 에녹은 정말 지독히도 깨달았다. 레오나드가 내린 벌이야말로 그에게는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시간부로 그대의 모든 재산과 작위를 박탈한다.”
“…….”
“끌고 가라.”
크게 외친 소리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들어와 에녹의 양 팔을 잡고 나갔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레오나드는 혼자가 되었다. 그 사실에 다시금 웃음이 났다.
‘이 순간도 언젠가 머릿속에서 사라질까?’
로레이나와 관련된 것이니 지금은 기억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면 더 먼 미래에는, 로레이나의 얼굴도 잊어버리게 될까? 다른 이들을 보는 것처럼 흐릿해지는 걸까?
레오나드가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수도 북부에서 로레이나가 준 로켓 목걸이였다.
그것을 열어 안에 든 초상화를 살핀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
로레이나를 잊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굳게 닫아야지. 새로운 기억이 그녀와의 시간을 덮지 않도록, 더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도록.
그렇게 레오나드는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는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