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짹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 평화롭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한 여자가 중얼거렸다.
“왕자님이래. 왕자님.”
“왕자님은 어디 가셨으려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방 안에 감도는 적막과 섞여 가라앉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은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산들바람에 그 반짝임이 살짝 흔들렸다.
몇 번의 중얼거림 뒤에는 키득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아, 맞아. 왕자님은 사라져버렸지. 이미 없어졌지.”
“내가, 내가 죽여 버렸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이제 아무도 없지. 전하도 스승님도.”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던 말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또렷해지고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자의 얼굴에 감돌던 웃음도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난 혼자야.”
여자가 다소 공허하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되던 발걸음은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곧 문이 열렸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노크조차 하지 않는 무례한 손님을 보며 여자는 굳어있던 얼굴을 지우고 다시금 웃었다.
그는, 그녀가 지금껏 기다리던 이였으므로.
“아, 이제 혼자가 아니네?”
“……역시 여기에 있었군.”
남자, 레오나드가 문을 닫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레오나드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셀리아 데프론. 아니, 그에게 저주를 건 마녀, 이사벨.
데프론 공작가의 일은 모두 처리되었으나 그동안 이사벨의 소식은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작 데프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난 뒤 이사벨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국을 뒤지다가 여기 와본 것이었는데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설마 자신이 죽인 스승의 옛집에 있었을 줄이야.
“자, 어서 여기 앉아.”
이사벨이 제 옆자리를 몇 번 치며 손짓했다.
300년이나 방치되어 폐허나 다름없어진 집 안은 제법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런 곳의 한가운데에 앉아 천진난만하게 웃는 이사벨은 정말 기괴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레이나가 사라진 뒤로 이 세상에는 그에게 두려운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여자 때문에.
이 여자 때문에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다. 로레이나가 죽었다.
곧장 이사벨에게 다가간 레오나드는 자리에 앉으라는 그녀의 손짓을 무시하며 그대로 하얀 목에 검을 들이댔다.
날카로운 칼날이 창밖의 햇살에 비춰 반짝였다.
이사벨은 제 목에 칼이 드리워진 상황에서도 환하게 웃었다.
“나를 죽이러 왔구나.”
“그래.”
작게 답한 레오나드가 그 채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흰색 목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고통에 얼굴을 찡그릴 법도 한데, 이사벨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후회할 텐데. 내가 죽으면 저주를 풀 수가 없잖아.”
“상관없어.”
“…….”
“이제 나 외에는 저주 때문에 고통받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러니 내가 너를 살려둘 거라는 기대는 접어.”
레오나드가 이사벨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나는 아버지와 달라서, 너에 대한 동정심이나 죄책감이 하나도 없거든.”
아. 그렇구나.
이사벨은 그제야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궁금증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칼리드는 그녀가 저주를 건 후에 바로 죽지 않았다.
생명의 신의 후손이라는 드래곤답게 레오나드가 태어나 자라는 것을 몇 달간 보다가 떠났다.
그것이 항상 그녀에게는 의문이었다.
칼리드는 이사벨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제법 긴 시간 동안, 왜 이사벨을 찾아내지 않은 걸까.
칼리드 정도라면 잠들어 있는 그녀쯤은 단숨에 해치우고도 남았을 텐데.
저뿐만 아니라 제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든 자신을, 그가 용서할 리 없을 텐데.
이사벨이 사라지고 나면 제 아들의 저주를 풀 사람이 남지 않아서?
아니, 그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저주를 풀지 못하니까.
레오나드에게는 그런 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이사벨에게는 더는 저주를 풀만 한 힘이 없었다.
잠들기 전 막대한 마력을 넣어 건 저주다.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그것을 풀 수 있을 리가.
칼리드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마저도 없지.’
이사벨은 아이작에게 힘을 쓰는 것으로 마지막 남은 힘을 소진했다.
비로소 평범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러나 다른 이들과 똑같은, 칼리드가 사랑하던 바로 그 인간.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동정심과 죄책감이라…….’
정말 당신 같은 이유다.
그러니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불결한 힘을 쓰는 어린아이를 구했던 거겠지.
이사벨은 머나먼 과거를 떠올리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레오나드가 쥔 검이 그녀의 심장 부근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짙은 흑발과 타오를 듯 반짝이는 적안. 그 익숙한 생김새에 그녀가 그리워하던 이가 겹쳐졌다.
그리고 이사벨은 깨어난 직후부터 자신이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아, 그런 거였구나.’
나는 이렇게 죽고 싶었던 거였어.
푹.
날카로운 검이 이사벨의 몸을 꿰뚫었다. 검붉은 피가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옷자락을 적셨다.
타는 듯한 고통에도 이사벨은 몸부림 한번 치지 않고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자리했다. 그토록 원하던 죽음이었노라고.
물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존재했다.
‘셀리아’는 그녀가 일기장을 통해 엿들은 이름이었는데.
그럼 미래에 레오나드를 구원할, 그 이름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 걸까?
* * *
‘여긴 어디지?’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내가 깨어난 곳은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꼭 정신을 잃고 이사벨의 과거를 본 그때처럼.
‘혹시 또 이사벨이?’
하지만 나는 분명 죽었는데. 레오나드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은 것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아무리 이사벨이 뛰어난 마녀라고 한들, 죽은 사람까지 다시 살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그녀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굳이 살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탐스러운 흑발에 루비 같은 적안을 가진 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묘한 생김새였던 터라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사람은 싱긋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한참 기다렸네.”
“……실례지만, 누구세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런 생김새는 기억에 없는데. 눈앞의 사람은 꼭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저렇게 예쁜 사람을 내가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자 그 사람이 다 안다는 듯 나직이 웃었다.
“그래. 너는 나를 처음 보는 게 맞는단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저를 아신다고요?”
“그래. 나의 아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니?”
나의 아이?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의 사람을 살폈다. 그러자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익히 아는 검은 머리칼이라든가,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라거나.
헉, 설마.
“혹시, 생명의 신이세요……?”
“정답이란다.”
멍하니 바라보자 눈앞의 사람, 아니 생명의 신이 웃었다.
정답이라니.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일이 아니잖아. 나는 죽었더니 난데없이 신을 마주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럼, 여기는 천국인가요?”
“천국?”
“아니면 지옥……?”
내가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잘못 살았던가?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데, 별안간 생명의 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귀엽구나. 그 아이가 왜 좋아했는지 알겠어.”
“……놀리시는 건가요? 저는 정말 진지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고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하자 생명의 신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주마등이라. 그래, 어떤 세계에서는 그런 말을 썼었지.”
“제가 있던 세계를 아시나요?”
“물론. 그곳도 내가 관리하는 곳 중 하나인걸.”
내가 있던 세계를 안다.
그 말이 몹시 반가우면서도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어쩌면 죽기 전과는 달리 생생한 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이전 세계에서 읽던 소설들이 있는데, 거기서 보면 그런 일이 자주 있어서 혹시나 하고…….”
“아, 맞다. 너는 소설을 자주 읽었었지. 그래서 내가 그걸 잘 이용했고 말이야.”
“그게 무슨……?”
알 수 없는 말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으려는데 갑자기 생명의 신이 손을 살짝 휘저었다.
그로 인해 눈앞에 생겨난 눈부시게 빛나는 거대한 원형의 문에, 내 말소리는 그대로 묻혔다.
“그곳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란다.”
“네?”
“하지만 선택을 하기 전에, 네가 모르는 것은 다 알고 가야겠지.”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생명의 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날 또 어디로 보내려는 건데?
처음 빙의한 것부터 이사벨의 기억을 본 것, 게다가 어딘지 모를 여기에 온 것까지.
이제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정말 지긋지긋했다.
“저, 잠깐 생각을 할 시간을 주세요. 아무래도 고민이 좀 필요할…….”
“잘 다녀오렴.”
작게 속삭인 생명의 신이 손을 뻗어 내 등을 떠밀었다. 몸의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원형의 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아. 내 인생이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