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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26화 (126/144)

#126화

“아야, 여긴 또 어디야…….”

나는 이리저리 흔들린 탓에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고개를 들어 살핀 순간, 내가 어디에 떨어진 건지 바로 눈치챘지만.

“……황궁이네.”

그래, 내가 온 곳은 카일룸 제국의 황궁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기억하려 세세하게 담았던 건물들이 하나하나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

같은 건물이기는 하나, 미묘하게 다른 부분들이 존재했다. 어쩌면 황궁을 감싸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혹시 저번처럼 다른 시대에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그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온통 검은 옷을 두른 남자 열 명 정도가 재빠르지만 조용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바쁘게 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처음 발을 디딜 때 다소 큰 소리가 났음에도 이쪽을 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이번에도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빠르게 이동한 남자들은 잠시 뒤 코너를 꺾으며 사라졌다.

아, 이러다가 놓치겠네.

“분명 이쪽으로 갔…….”

쉬익-.

갑작스레 날아온 화살이 내 얼굴 옆을 지나서 뒤에 있는 벽에 꽂혔다. 코너를 돌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아무리 영혼 상태라서 다 통과하고 죽지 않는다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하마터면 정통으로 맞을 뻔했네.’

내 머리를 그대로 통과했을지 모를 화살을 바라보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이런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오, 오지 마!”

활을 쏜 것은 웬 남자였다.

어느 방문 앞에서 나처럼 주저앉아있는 남자는 두꺼운 활을 제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로 아까 전 내가 보았던 남자들이 서서히 몰려들었다.

아까는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불이 켜진 곳에서 보니 영락없는 자객들이었다.

황궁에 자객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오다니.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데 경비병들은 왜 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아니, 애초에 황궁 보안이 이 정도로 허술한 게 말이 돼? 자객들이 막 들어와도 모르고 말이야.

도대체 여기 언제쯤인 거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자객들을 노려보는데, 난데없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아까 활을 쏜 남자가 주저앉아있는 바로 그 방 안쪽이었다.

주변에서 난 큰 소리에 놀란 듯 우렁차게도 울리는 그 울음소리에 자객들과 남자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그때를 틈타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방 안을 확인해봐야겠어.’

상황을 보아하니, 저 자객들은 남자가 아니라 방 안에 있는 아기를 노리는 것 같았으니까. 남자가 보호하려는 것도 이 아기인 것 같고.

그리고 나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머릿속을 스쳐 가는 가정에, 아기의 정체를 확인하러 가는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마침내 방 한가운데에 있는 요람에 도착해 안을 들여다본 순간, 나는 예상대로 익숙한 색채를 마주했다.

눈이 부시게 하얀 피부. 살짝 나 있는 검은 머리카락, 눈물이 가득 들어찬 붉은색 눈.

“……레오나드.”

역시나, 방 안에 있는 건 갓난아기인 레오나드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은 칼리드가 막 죽은 시점, 즉 레오나드가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던 때라는 거겠지.

그래서 레오나드가 더 버티지 못하고 황궁을 벗어나게 된 거니까.

‘하지만 어떻게?’

나는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남자는 여전히 방 앞에서 자객들에게 활을 쏘고 있었다. 한두 명이 맞아 쓰러지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남은 자객들은 점점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저렇게 가까이 오면 활을 쏘기 힘들 텐데.

조금 더 옆을 보니 남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그의 검으로 추정되는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계속 활만 쏘나 했더니,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레오나드는 무슨 수로 탈출을 하게 된 거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레오나드와 남자를 번갈아 보던 순간이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자객들이 불시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발이 나갔고,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어디서 갑자기 영웅이라도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정말 이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지만.

슈욱-.

남자가 쏘던 것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화살이 어디선가 날아오더니 그대로 자객의 머리에 꽂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자객들이 남자에게 오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멈칫했다.

그 웅성거림 사이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근거리에서 활을 쏘면 쓰나.”

“……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말을 마친 여자가 다시금 활시위를 당겼다.

그 움직임에 나와 비슷한 분홍빛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 * *

“으억.”

“으아악!”

레오나드의 방 앞에 아까와는 다른 괴성이 난무했다.

그야말로 학살 수준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여자, 그러니까 엘레노아가 쏜 화살은 단 한 발도 놓치지 않고 자객들의 머리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자객들은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애초에 다가오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열 명 정도 되던 자객들은 모두 머리에 화살이 꽂힌 채 바닥에 쓰러졌다.

엘레노아는 덤덤한 얼굴로 자객들 사이로 넘어 남자에게로 다가왔다.

남자는 마치 신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감격에 겨운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하긴, 죽다 살아났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별것 아니었어요. 딱히 그쪽을 지켜주려고 그랬던 것도 아니었는데 뭘.”

“그래도 어쨌든 구해주셨잖아요. 정말 뭐라 감사를……헉!”

엘레노아를 보며 말하던 남자가 무언가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시선이 엘레노아의 분홍색 머리카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설마, 엘레노아 님?”

“아. 이런. 로브 두른다는 걸 깜빡했네.”

“마,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와아. 제가 이렇게 유명한 분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남자가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방금 죽을 위기를 겪었다고 보기 어려운 모습에 엘레노아가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남자에게 그런 것 따위 하등 상관없었던 것 같았지만.

“그나저나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황실의 기사이니까요. 황태자 전하를 보호해드리고 있었습니다! 아, 아차!”

그제야 레오나드의 존재가 떠오른 남자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기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레노아는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황실 기사라고 해도 꼭 황태자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어차피 황제도 없고 다른 기사들도 다 도망갔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제가 있어야죠. 전하 곁에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남자가 레오나드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마주 웃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남자의 선한 감정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레노아가 얼굴을 구겼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쪽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기 가만히 있다가는 아까처럼 자객들한테 목숨 위협받을지도 몰라요. 나는 이제 안 구해줄 거니까 도와줄 사람도 없겠네.”

“하지만 전하 곁에는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걸요. 다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니 방치한단 말이에요.”

남자가 허리를 숙여 레오나드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그의 손가락 하나를 잡았다.

“……이렇게 귀여우신데 다들 왜 그렇게 못 죽여 안달인 건지.”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 당신뿐일걸요.”

“엘레노아 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저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전하를 구하러 오셨다는 거니까.”

레오나드에게 잡힌 손가락을 보던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잠시 보던 엘레노아가 나직이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별로 유명한 가문 출신도 아닌지라 엘레노아 님께서 아실지…….”

“내가 특이한 경우인 거고, 보통은 처음 보는 사이에 이름은 모르는 게 맞아요. 그러니까 빨리 말해 봐요. 곧 또 다른 자객이 올지도 모르니까.”

엘레노아의 말에 남자가 쑥스러운 것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남자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입을 열었다.

“하비입니다. 하비 헨티슨이요.”

“…….”

“헨티슨 남작가의 장남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남색 머리카락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라니.

‘저 사람이 제럴드와 다이아나의 선조란 말이지.’

나는 어쩐지 신기한 기분으로 하비 헨티슨을 훑어봤다. 엘레노아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비 헨티슨.”

“네!”

“그럼 수고해요.”

“……네?”

엘레노아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대로 떠나버릴 것 같은 태도에 하비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왜요. 계속 도와달라고 할 참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결국 말씀을 안 해주신 것 같아서요.”

“뭘요?”

“으,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비 헨티슨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갑작스레 난 큰 소리에 엘레노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잠시 그렇게 있던 엘레노아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참 재밌는 사람이네.”

“……저는 정말 진심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갚고 싶어요?”

하비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아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럼 그 아이를 지켜줘요.”

“네?”

“여기서 데리고 나가서, 무럭무럭 자랄 때까지 보호해 달라고요.”

장난기가 묻어있던 목소리가 아까와 달리 낮고 진지해졌다. 그것을 하비 역시 느낀 모양인지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엘레노아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그 아이의 자리를 찾아줘요.”

“…….”

“이 나라는 이제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의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할게요!”

하비 헨티슨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에 엘레노아는 작게 웃고는 정말로 몸을 돌렸다. 레오나드를 조심스레 품에 안던 하비가 그녀의 뒤에 대고 물었다.

“저기, 엘레노아 님께서는 같이 안 가십니까?”

엘레노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제 품 안에 있던 네모난 무언가를 보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설핏 드러난 옷깃 사이로 익숙한 자줏빛을 띤 갈색 표지가 보였다.

“아쉽게도 나는 같이 갈 수 없는 몸이라서요.”

“아.”

“그럼 잘 부탁할게요.”

몸을 돌린 엘레노아가 다시금 앞을 향해 걸어갔다. 레오나드를 챙겨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하비 헨티슨을 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품에서 보았던 익숙한 노트가 눈에 아른거렸다.

‘분명히 엘레노아의 일기장이었어.’

이사벨에게 그 일기장이 보호막 역할을 한다는 것을 들었으니, 아마 가지고 다니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했다.

‘내가 처음 엘레노아의 일기장을 받았을 때, 아주 멀쩡했는데?’

그렇다면 보호막 아래에서 안전해야 했을 엘레노아는, 도대체 왜 죽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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