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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27화 (127/144)

#127화

그 생각을 끝으로 장면이 전환되었다. 꼭 이사벨의 기억을 엿보다가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그때처럼.

아직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나는 눈앞의 광경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곧이어 보인 광경은 좀 의외였으니까.

‘여기는…….’

……황궁이잖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알현실이었다.

몇 번 온 적은 없긴 했지만 처음 황궁에 온 날 제럴드가 소개해준 적이 있으니 확실했다.

‘뭐지? 레오나드도 그렇고 엘레노아도 황궁을 빠져나간 것 같았는데.’

아니면 당시의 데프론 공작이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 보여주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그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엘레노아?”

무심코 뱉은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다행히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내 쪽을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기사들이 열어준 문을 지나 뚜벅뚜벅 걸어온 엘레노아가 알현실의 중앙, 그러니까 내 앞쪽으로 와서 섰다.

어찌나 얼굴이 불퉁한지, 그녀가 원해서 여기 온 것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엘레노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큰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여지까지의 태도가 다 거짓이었다는 듯, 엘레노아의 인사는 흠잡을 곳 없이 정중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엘레노아의 옆에 있던 나는 보았다.

아무도 제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자, 그녀가 더없이 치욕스럽다는 듯 도끼눈을 뜨고 뭐라 중얼거리는 것을.

얼핏 귓가에 ‘내가 저딴 새끼한테 허리를 조아리다니.’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알현실의 맨 끝 상석에 앉아있는 황제가 알 리 없었다.

그가 제법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그에 엘레노아의 얼굴은 더욱더 썩어들어갔지만.

“오랜만에 뵙네요, 엘레노아.”

“……말씀을 낮춰주세요. 폐하.”

“아니요. 그럴 수는 없지요. 카일룸 제국의 발전을 몇백 년씩이나 지켜본 산증인이 아닙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이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엘레노아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데르키안 황가의 마지막 핏줄께서 지금 어디에 계실지 알 유일한 분이기도 하니까요.”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레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처음 나온 상황은 아닌 듯했다.

“……저번부터 말씀드렸지만, 저는 정말 모르는 일…….”

“설사 모른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그분이 찾아갈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엘레노아가 아닌가요?”

“…….”

엘레노아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네가 숨기고 있는 걸 알고 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녹색 눈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엘레노아가 칼리드와 교류하는 사이였다는 건 그리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으나 귀족들의 중심이었던 전 데프론 공작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엘레노아를 의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반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엘레노아가 레오나드를 구했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도 맞지만, 정작 그를 데리고 있는 건 헨티슨 가문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요.”

가만히 있는 엘레노아를 보던 황제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마녀 이사벨과 생김새가 비슷한 여자가 몇 년 전 나타난 적이 있다고.”

“…….”

“그리고 그때 그 마녀 옆에 분홍 머리칼을 가진 이가 서 있었다고 말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입술을 짓씹던 엘레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 아들을 통해 알아낸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시장에서 난리가 났던 그 날, 피르안 데프론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잘못된 소문이겠지요?”

황제가 재촉하듯 물었다.

너무나도 평온하게 묻는 얼굴에, 나에게 질문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나까지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벨은 그의 친딸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뻔뻔하게 저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척 말을 할 수가 있는 건가?

‘어차피 예전 공작가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이사벨이 데프론 공작가의 사생아였던 것쯤이야…….’

아니지. 그 사람들은 지금 다 황제의 아래에 있다. 그 말은 즉, 이번에 황제가 바뀜으로써 다 이득을 본 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이 굳이 황제의 치부를 들춰낼 이유가 있는가?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지.’

반면에 엘레노아는?

이종족이라고 칭송받고 있기는 하지만 엘레노아는 권력이 막강한 사람이 아니다. 거기에 마땅한 지위도 없다.

굳이 필요가 없어서 받지 않은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날 시장에서 이사벨과 관련된 일을 목격한 사람 중 황제가 부르면 좋다고 달려 나올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엘레노아도 알았는지,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나직이 입을 뗐다.

“……물론입니다.”

“그렇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는 엘레노아를 믿거든요.”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나요?”

대화의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진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말투가 아까와는 달리 다소 날이 서 있었다.

“원하는 게 있어서 부르신 것 아닌가요? 단지 그런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부른 건 아니실 것 같아서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정말 그것이 목적이셨다면 저는 알현실이 아닌 지하 감옥에서 취조를 받고 있겠죠.”

엘레노아가 황제를 빤히 응시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이 보기에 이사벨은 황제인 칼리드를 죽인 반역자였으니까.

그런 그녀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엘레노아가 이렇게 자유롭게 알현실에 있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었다.

‘어쩌면 사형당했을지도 모르지.’

아마 이사벨이 데프론 공작가의 사생아였다는 사실이 알려질 미약한 가능성이 아니었더라면, 황제는 정말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이런. 무언가 오해를 산 모양이군요.”

녹색 눈이 보내는 적개심을 고스란히 받던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부른 건 엘레노아의 혼인 문제 때문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엘레노아가 방금까지 노려보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레노아같이 귀한 이가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홀로 있다는 것이 걱정되어서요. 이제 이종족은 엘레노아뿐이지 않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요. 마냥 사양할 게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엘레노아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이 좋지 않나요?”

황제가 재차 혼인을 요구했다.

엘레노아의 옆에 제 사람을 붙여두고 그녀를 감시하려는 속셈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레오나드와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을까, 혹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

그것을 엘레노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반박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제가 조금 더 빨랐다.

“아니면 황궁으로 들어와 피르안의 스승이 되어주세요. 어떻습니까?”

“…….”

“그 정도라면 저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 같군요.”

황제가 나긋하게 웃었다.

정말로 엘레노아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듯이. 그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엘레노아가 물었다.

“만약 둘 다 거절한다면 어쩌실 건가요?”

“글쎄요.”

“…….”

“아까 말한 소문을 다시 확인해봐야겠죠.”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 엘레노아가 작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애초에 선택권이 없는 문제였다.

* * *

장면은 또 전환되었다.

엘레노아의 남편이 된 이는 내가 알고 있다시피 아멜리오 백작이었다.

그와 간단한 결혼식을 올린 엘레노아는 결혼 선물로 땅을 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이곳을 선택했다.

지금의 아멜리오 백작저가 있는 땅이었다.

‘왜 이런 땅을 줬냐고 엄청 욕했었는데.’

황제가 맘대로 준 것이 아니라 엘레노아가 선택을 한 것이었다니.

아무것도 몰랐다면 왜 이런 외지고 좁은 땅을 받았을지 의문이었겠지만 이제 나는 알았다.

‘사람이 잘 오지 않으니까.’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왔을 경우 알아채기 쉽다는 거다.

그렇게라도 황제의 끄나풀을 구분하겠다는 거겠지. 옆에 있는 아멜리오 백작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일기장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엘레노아는 살해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몸이었다.

언제나 경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여긴 헨티슨 남작가의 영지와 가까워.’

가깝지는 않으나 드문드문 소식을 듣기에 충분하다. 나에게 다이아나의 파티 초대장이 왔던 것이 그 증거였다.

엘레노아는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레오나드의 소식을 들을 생각인 듯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각박한 조건 속에서도 상황은 제법 엘레노아가 예상하고 계획한 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엘레노아, 일어났습니까?”

잠에서 막 깬 엘레노아의 앞에 따듯한 차가 담긴 차를 내밀며 아멜리오 백작이 부드럽게 웃었다.

언제든 그녀가 일어나는 때에 맞춰 내올 수 있도록 직접 계속 끓인 모양인지 큼지막한 손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레노아를 담은 눈이 애정을 가득 담고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아.”

뜻밖의 감정을 마주한 엘레노아가 작게 신음했다.

아마 황제도 이건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제 사람이라고 믿고 보낸 이가 설마 감시해야 할 대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리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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