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엘레노아는 눈앞에 있는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멜리오 백작, 데온 아멜리오.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엘레노아를 극진하게 대했다. 그녀가 정말 귀하디귀한 아가씨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신의 축복을 받았다며 그녀를 떠받들어주고 있다고는 하나 다 말뿐이었다.
다소 괴팍하다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엘레노아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오랜 시간을 알고 그녀를 따르던 칼리드나 이사벨도 이렇게 대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엘레노아는 이 상황이 못내 불편했다. 그 상대가 아멜리오 백작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온은 황제의 사람이 아니던가.
누구보다 자신을 싫어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이 이렇게나 다정하게 대해준다니.
숨겨놓은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 이름 뒤에 붙은 ‘아멜리오’라는 성이 거슬렸다. 저를 바라보는 선한 눈이 찝찝했다.
“……안 마실 거니까 다시 가져가요.”
그래서 엘레노아는 데온을 외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데온이 서둘러 따라왔으니 별 소용은 없었지만.
“그래도 날이 꽤 쌀쌀해지지 않았습니까. 마시면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됐다니까요.”
“그럼 여기에 놓고 갈…….”
“그냥 신경 쓰지 말라고요!”
날이 곤두선 엘레노아가 다시금 찻잔을 쳐냈었다. 아까보다 거세진 힘에 찻잔 받침 위에서 중심을 잃은 찻잔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내용물은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쏟아졌다.
“아.”
데온이 제 손으로 쏟아진 찻물에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찻물에 데인 손이 손등을 중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엘레노아가 찌푸린 낯을 지우며 데온에게 다가갔다.
이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데온은 엘레노아가 뭐라 행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혹여나 남아있는 찻물이 엘레노아에게 튀기라도 할까 염려해서라는 건, 찻잔 입구를 손바닥으로 틀어막는 행동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손바닥이 더 델 텐데.’
아니, 그나저나 당신이 왜 그렇게까지?
엘레노아는 정말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황제를 위한 충성심이 가득한가? 아니면 그만큼 막대한 보상을 받기라도 약속했나?
혼란스러웠지만 데온은 그에 대한 어떠한 답도 주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안 마신다고 했는데 괜히 고집 피워서.”
“저기.”
“아, 바닥에 떨어진 건 제가 치울 테니 할 일 해요. 어디 가려고 했었잖아요.”
데온이 차가 쏟아진 자리에서 엘레노아를 멀찍이 밀어내었다.
바닥을 치우기 시작하는 데온의 뒷모습을 보던 엘레노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젠장. 사과할 기회를 놓쳤어.’
지금이라도 가서 미안하다고…….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어젯밤 시녀들이 가지고 온 테이블 위의 편지들 사이로 익숙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포효하는 드래곤이 엘레노아를 옥죄었다.
아, 그래. 당신은 저쪽 사람이었지.
‘어차피 날 괴롭히러 온 사람에게 사과는 무슨…….’
지금 하는 이 행동들도 다 또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엘레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섰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찝찝함을 애써 지우면서.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생각과 달리 데온은 별다른 행동을 더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그녀에게 뭐라도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일 줄 알았는데.
‘이 방식이 안 먹힌다는 걸 알았나.’
날 꼬드겨 레오나드의 행방이라도 알아내려고 했었나 보지?
엘레노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어쩐지 혼자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그러는 것이 더 익숙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허전하고 적막한지 모르겠다.
그럴 때면 엘레노아는 제법 북적북적하던 제 예전 집을 떠올리고는 했다.
칼리드가 또 저만 때린다며 우는소리 하며 도망가고 그런 그를 보며 해맑게 웃는 이사벨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이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그녀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빛바랜 과거.
“하아…….”
예전 일을 떠올리니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칼리드와 이사벨은 엘레노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정말 말 그대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애들을 맡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만약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로 그들과 함께 한 몇 년은 엘레노아에게 값진 시간이었다.
‘걔들이 없으니까 딱히 할 일도 없었지.’
그래서 엘레노아는 잠깐이지만 그냥 죽을까도 생각했었다.
깊은 무력감이 그녀를 뒤덮었고 아늑하기 그지없던 제집이 하염없이 넓어 보였다.
그럼에도 부득부득 살아있는 것은 소중한 이가 남긴 핏줄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엘레노아는, 그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야 했다.
그러니 그전까진 제발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 남자 같은 것 말이다.
“마님! 나오셨어요?”
홀을 정리하고 있던 시녀가 엘레노아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밝게 웃는 낯이었으나 엘레노아는 적당히 인사해주고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데온 아멜리오와 함께 온 자들이다.
‘그나저나 요 며칠 안 보이는데.’
아무리 부부라고는 하지만 계약 결혼이나 다름없는 관계 때문에 엘레노아와 데온은 각방을 썼다.
데온이 지금껏 각방을 쓴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주 찾아왔기에 실감하지 못했는데.
찻잔을 쏟은 그 날 이후로 데온은 좀처럼 엘레노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길래?’
그에게 관심이 생긴다는 것이 짜증이 났지만, 불쑥 인 호기심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엘레노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녀가 왜 그러는지 눈치챈 시녀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라면 지금 집무실에서 일하고 계세요.”
“아직도?”
엘레노아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제법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는 그리 큰 곳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지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곳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할 정도로 일거리가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데온은 이 시간까지 일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만약 영지에 관련된 것이라면 엘레노아 역시 알아야 한다.
자신이 백작 부인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혹시 그가 황제와 무슨 작당을 하려고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어디 그렇게 놔둘 줄 알고.’
보아하니 아직 하비 헨티슨은 자리를 완전히 잡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엘레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녀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녀가 예상했던 쪽이 아니었다.
“아, 그게. 아마 손 때문에 일 처리가 늦어지시는 걸 거예요.”
“손?”
“네. 며칠 전에 차를 마시다가 손을 데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른손잡이이신데 하필 다친 것도 그쪽이라 움직이기 불편해하세요.”
“…….”
“안 그래도 상처 부위가 큰데 날이 춥다 보니 그 주변이 다 트셔서 좀처럼 아물지를 않네요. 걱정이에요.”
시녀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머, 맞다.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
“마님, 제가 말씀드린 건 주인님께 비밀로 해주세요!”
말을 마친 시녀가 부리나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엘레노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다. 또 마음이 불편해졌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데온이 손을 다친 건 분명 엘레노아 때문이었다. 그냥 말로도 할 수 있는 걸 굳이 손을 쳐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
뜨거운 것을 들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런 것은 명백한 그녀의 실수였다.
그럼에도 데온은 엘레노아를 탓하지 않았고 다른 이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상처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어쩐지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죄책감이라도 자극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집무실에 올라가 데온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금세 사라졌다.
“아, 엘레노아. 여, 여기는 왜…….”
손을 느릿하게 움직이며 업무를 보던 데온이 그녀가 왔다는 걸 알아차림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펜을 쥐고 있던 손이 다급히 책상 밑으로 향했다.
엘레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숨겨져 있을 책상 밑을 바라보았다.
만약 정말로 데온이 그녀의 마음을 자극할 것이었으면 은근슬쩍 제 손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정말로 엘레노아에게 상처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니면 이 남자가 그것까지 고려해서 움직일 정도로 아주 고단수이거나.’
어찌 되었든 엘레노아는 그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엘레노아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서 방을 나갔다. 데온은 잠시 어리둥절한 낯을 하다가 곧장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제 남편이 저를 따라 나왔음을 확인한 뒤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따라오라는 듯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엘레노아가 멈춘 것은 데온이 도대체 어디에 가는 거냐고 막 물으려던 때였다.
“여긴…….”
데온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레노아가 그를 데려온 곳은 아멜리오 백작가의 정원 구석이었다.
경관이 좋은 곳도 아니고 왜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엘레노아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이곳인 듯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엘레노아가 곧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물었다.
“도대체 왜 이래요?”
“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요.”
엘레노아가 또박또박 말했으나 데온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엘레노아는 다시금 오르려는 열을 애써 식히며 입을 뗐다.
그래. 저 표정이 문제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눈빛. 다른 사람만 못된 사람 만드는 저 얼굴!
애초부터 이 관계는 잘못된 거였다. 결혼을 승낙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꼭 지금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아예 다른 건물에 사는 부부들도 많으니까.
“우리 솔직히 말해보자고요.”
“무엇을요?”
“어차피 당신도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잖아요. 다 폐하께서 시켜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저를 감시하려고.”
이제 이판사판이다.
차라리 대놓고 감시하는 걸 티 냈으면 이렇게까지 짜증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를 위해주는 것처럼 행동하며 사람을 기만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은, 이제는 그녀 곁에 없는 이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으니까.
“이런 말은 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 하나 정도는 금방 없애버릴 자신이 있어요.”
“…….”
“그러니까 진짜 적당히 해요. 그렇게 애를 써도 어차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엘레노아가 날카롭게 데온을 쏘아붙였다.
그 눈빛을 마주한 데온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그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엘레노아는 그 순간,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 자리에서 없애도 괜찮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