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뭐라고요?”
엘레노아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데온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변하지 않았다.
“저를 없애버릴 수 있다면서요.”
“…….”
“그럼 그렇게 하라고요.”
“아니, 그게 말이 그렇게…….”
엘레노아는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오늘에야 이해했다.
그게 어떻게 그런 말이 되는가?
죽기 싫으면 알아서 조심하라는 거지.
게다가 여기서 데온을 죽이면 황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간섭하려 들 것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처럼 데온이 남편으로 있는 것이 더 나았다.
그냥 지금 것은 단순한 협박이었다. 계속 저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경고.
설마 데온이 황제에게 달려가 엘레노아가 저를 협박했다며 일러 제 무능함을 증명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이렇게 나오니 더는 못 해 먹겠다는 건가?’
그래. 그럼 저렇게 싸늘한 낯인 것도 이해는 갔다.
엘레노아는 긴장되는 마음을 누르며 데온을 잔뜩 경계했다. 황제가 아예 약해빠진 이를 보내지는 않았겠지.
‘여차하면 정말로 죽이는 수밖에.’
엘레노아가 제 허리춤을 더듬어 그 안에 숨겨둔 단도를 찾아내었다. 데온에 비해 자그마한 손이 칼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하지만 엘레노아의 예상과 달리 데온은 가만히 선 채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마치 그녀가 제게 무엇을 하든 다 감내하겠다는 것처럼.
“저는 폐하께서 시켜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그런 것치고는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시던데.”
“폐하께서 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단순히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덤덤하게 대꾸하던 데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엘레노아의 얼굴 역시 험악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또다. 저러니까 저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꼭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뭐가 있을까요? 이 결혼을 할 만한 다른 이유가.”
“…….”
“황제 폐하께서 주실 막대한 보상? 그냥 빨리 결혼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면 저를 좋아하기라도 해서?”
마지막 말은 거의 비꼬듯이 나온 말이었다.
이렇게 하면 열이 받아서라도 데온이 제 실체를 드러내지 않을까 해서.
그러니까-.
“네, 맞습니다.”
저런 말은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네?”
엘레노아는 제가 몹시 멍청하게 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좋아한다니? 누가? 저 남자가 나를?
“돌았어요?”
“……저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거짓…….”
“거짓말도 아니고요.”
데온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와 엘레노아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 알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것을 보면서도 엘레노아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저 말 몇 마디에 이 남자를 믿으라는 말인가?
“왜 좋아하게 되었는데요?”
“첫눈에 반했습니다.”
데온이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엘레노아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젠장.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욕이 새어 나왔다.
‘뭐 뻔하지.’
직접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저런 놈들은 예전부터 많았다. 얼굴만 보고 달려드니 천치들.
엘레노아도 엘프인 제가 이 세계의 사람들 기준으로 제법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첫눈에 반했다는 저 말도 거짓일지 모르나, 만약 맞는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얼굴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언제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런 답이 돌아올 줄도 모르고.
“몇 년 전에, 한 시장가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요.”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엘레노아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데온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그때를 회상이라도 하는 듯 부드러운 눈동자가 먼 곳을 향했다.
“그때 저는 지금의 황태자 전하 호위를 맡고 있었거든요. 전하께서 갑자기 마차에서 내려 뛰어가셔서 따라갔는데…….”
“…….”
“부끄럽게도 한참 헤매다가 갔더니 한 여자분이 웬 소녀 하나를 안고 달래고 있더군요.”
아아.
엘레노아가 저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그날이다.
이사벨이 상처를 받고 울고 있을 때, 인간들을 미워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다면 괴로워했던 때.
“이미 전하는 다른 곳으로 가시고 없는데도 저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
“저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혼자 감동받아서 멍하니 있었던 거죠. 그리고 바람결에 로브 자락이 날려 살짝 보인 얼굴이…….”
데온이 손을 들어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눈물 흘리던 모습이 예쁘더라고요.”
쑥스러운 모양인지 데온의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웃음기가 사라졌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돈다.
어쩐지 엘레노아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다.
그때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가슴 한쪽이 찌르르하고 울렸다.
엘레노아는 제 목소리에 깃들어있던 날 선 느낌이 어느새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한참 만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결국 예뻐서라는 거네요?”
“그렇게 되네요. 어쨌든 이제 믿어주시는 겁니까?”
“아니요? 아직 의문이 남아있어서요.”
엘레노아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했다.
한 걸음.
엘레노아가 데온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어쨌든 당신이 황제 폐하의 사람인 건 맞잖아요. 이런 식으로 나와 결혼하면 내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아.”
“정말 날 좋아한 게 맞으면 이런 식의 첫 만남은 최악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건…….”
데온이 살짝 고개를 내려 엘레노아를 마주 보았다.
진중한 빛을 담은 눈매 끝이 예쁘게 접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의 옆에 있을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건 싫어서요.”
“…….”
“그리고 당신이 다른 남자 옆에 있는 건 더 싫어.”
“풉.”
갑작스레 튀어나온 투정에 엘레노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데온의 앞에서는 처음 짓는 표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데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엘레노아의 얼굴을 홀린 듯 보던 데온이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아까보다 좁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노아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은 해결이 되었습니까?”
“어느 정도는요.”
“그럼 이만 들어갈까요? 날이 찹니다.”
데온이 엘레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아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제 용건은 끝난 게 아니라서.”
“네?”
“잠깐만 실례할게요.”
제게 내민 데온의 손을 덥석 잡은 엘레노아가 그대로 깍지를 꼈다. 손가락끼리 빈틈없이 얽히자 데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보던 엘레노아는 어쩐지 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웃었다.
흠. 나를 좋아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네.
“왜, 왜 이러시는…….”
“가만히 있어 봐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리고는 맞잡은 손을 더 힘주어 잡는다. 데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저 엘프잖아요.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 알죠?”
“네. 당연하죠.”
“제가 드래곤은 아니지만, 회복 능력이 빠른 건 맞거든요. 예전부터 그런 속설이 있어요. 이종족 근처 있으면 어떤 상처든 빨리 낫는다고.”
엘레노아가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다 나을 때까지 치료제가 되어줄게요.”
“…….”
“제가 잘못한 거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예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데온을 보고 있던 엘레노아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해요. 손을 이렇게 만들어서.”
언제나 당당하던 고개가 숙어진다. 데온은 제 앞에 보이는 분홍색 정수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으면 더 빨리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데온은 곧 이런 후회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거지.
“치료, 감사히 잘 받을게요.”
데온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엘레노아 역시 한결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장소에서 만나 손을 잡고 시간을 보냈다.
지금과 달리 주변이 한없이 밝을 때에도 비가 와서 도무지 밖에 있을 수 없을 때에도.
데온의 상처가 다 사라졌음에도 계속.
엘레노아의 치료는 그들이 자연스레 반려의 언약을 맺고-.
이 결혼의 원인이었던 황제가 죽고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 황제가 죽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 둘의 사이가 완전해져 가던 어느 날, 아멜리오 백작저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백작 부부는 이제 자신들에게 완벽한 행복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갓 태어난 그들의 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으니까.
부드러운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칼, 바다를 머금은 듯한 푸른색 눈.
아이가 하얀 볼을 부풀리며 뭐라 입을 떼려 애를 쓰는 것을 볼 때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로레이나.”
엘레노아가 여느 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 아이를 찾아 방으로 들어갔다.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곤히 잠이 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귀여워라.’
입가에 자꾸만 올라오는 미소를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엘레노아는 아이의 침대를 들여다보았다.
곧 저와 비슷한 부드러운 분홍빛이 눈에 들어왔다. 토실토실하고 하얀 볼까지도.
작고 귀여운 입술까지 그녀가 전부 기억하던 그대로다.
하지만 그 근처에 묻어있는 알 수 없는 붉은 액체는, 엘레노아가 전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데, 데온!”
얼굴이 사색이 된 엘레노아가 다급히 제 남편을 불렀다. 그때의 그녀는 아직 잘 알지 못했다.
언젠가 자신을 좀먹을 것이라 생각했던 저주가 제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는 것을.
비극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