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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0화 (130/144)

#130화

언제나 활기가 넘치던 아멜리오 백작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갑작스레 피를 토한 그들의 작은 주인 때문이었다.

백작 부부가 곧장 의사를 불렀으나 아이를 진찰한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혹시 몰라 다른 의사를 불러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데온이 로레이나의 방문 앞에 기대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 전에 어떤 증상이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로레이나는 그런 것도 없었다.

잠을 좀 많이 잔다 싶기는 했지만, 그거야 아직 아기라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갑작스레 각혈한 로레이나는 그 상태로 고통스러운 듯 울더니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상시라면 잘 먹던 우유도 좀처럼 먹지를 못하고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하는데 의사들도 다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로레이나…….”

몸을 떨며 자고 있는 제 아이를 보던 데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멍하니 앉아있는 엘레노아가 눈에 들어왔다.

데온은 처음 로레이나가 피를 토한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게 달려오던 그녀를 기억했다.

분명 엘레노아 또한 많이 놀랐으리라.

반려의 언약을 맺은 지도 300년 가까이 지나 엘레노아와 보낸 시간이 제법 되건만. 그런 그녀의 얼굴은 처음 보았으니까.

데온은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엘레노아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그녀를 달래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엘레노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로레이나는 분명 괜찮아질 거예요.”

“…….”

“아직 모든 의사를 만나본 것도 아니잖아요. 더 찾아보면 분명 로레이나를 치료해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데온이 엘레노아의 곁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데온이 엘레노아를 부르려던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데온.”

“네. 듣고 있어요.”

“나, 로레이나가 왜 아픈지 알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데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많은 의사도 알지 못한 것을 엘레노아가 알고 있다니 의아하긴 했지만, 그녀는 엘프가 아닌가.

분명 지금껏 쌓인 경험들로 무언가 깨달은 게 있는 것일 터였다.

“왜, 왜 아픈 거예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 거예요?”

“…….”

“치료제는? 치료제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거죠? 내가 지금 당장 다녀올게요.”

데온이 엘레노아 앞에서 침착하게 굴려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다급히 외쳤다.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이 썩어 문드러졌으니 그가 이토록 흥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말을 한 엘레노아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가만히 있던 엘레노아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곧 녹색 눈이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데온, 데온.”

“네, 나 여기 있어요.”

“데온. 우리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떻게 해…….”

엘레노아가 데온의 품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목을 놓아 울었다.

아까 말한 대로 엘레노아는 제 딸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이 그것을 알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스승님. 제 아이를 부탁드릴게요.’

‘먼 곳에서 잘 지내는지 좀……가끔 지켜봐 주세요.’

죽기 직전 칼리드는 늘 각혈을 했다. 평소라면 맨몸으로도 다녔을 밖을 오한이 드는 듯 좀처럼 나서지 못했다.

기껏 먹은 것들은 전부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내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엘레노아는 알았다.

칼리드의 증상이, 지금 로레이나의 증상과 똑같다는 걸.

제 몸에 흐르는 이종족의 피가 자신의 딸을 좀먹고 말았다는 사실을.

* * *

데온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엘레노아는 그날부로 오래된 모든 서적을 다 뒤졌다.

이사벨이 건 저주를 풀기 위함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

방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던 이사벨이 거의 제 목숨을 날려 건 저주다.

마력도 없는 엘레노아가 그 저주를 풀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차선책을 찾아야지.

‘반려의 언약을…… 언약을 풀어야 해.’

저주를 풀 수 없다면 그것을 막을 보호막을 찾으면 된다.

엘레노아는 이사벨이 준 일기장을 로레이나에게 넘겨 제 아이를 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평생의 반려인 데온 역시 같이 죽게 된다.

그것은 안 될 일이다. 제 결정에 제가 사랑하는 이를 같이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걸 끊을 방법을 찾아야 해.’

하지만 반려의 언약을 끊는 방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방법은 없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서로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신성한 언약이 그렇게 쉽게 끊어질 리가 없으니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엘레노아는 미친 듯이 자료를 찾아 뒤졌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대로 두면 일기장을 넘기기도 전에 로레이나가 죽고 만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책장을 더듬던 엘레노아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쏟아내었다.

이 상황이, 세상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사벨에 대한 원망? 물론 그것도 있었다.

하지만 엘레노아의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건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이사벨이 어떤 마음으로 저주를 걸었는지 이해했다. 칼리드가 죽은 것이 그녀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앞으로 혼자 남아 외로운 삶을 살아갈 레오나드가 가여웠다. 그저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전과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럼 로레이나는?’

칼리드와 엘레노아는 제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로 했다. 레오나드는 불행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런데도 그저 제 아이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눈을 감아야만 한다.

그것을, 엘레노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돼…… 어떻게든 로레이나만은 살려야…….”

그리고 아이를 보호해줄 데온도 살려야 한다. 그 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제 과거에 발이 묶여 같이 불행해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엘레노아가 다시금 울음을 쏟아내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엘레노아.”

언제나처럼 따듯한 목소리.

그에 엘레노아가 대답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데온은 애초부터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반려의 언약. 끊을 생각하지 말아요.”

“……어떻게?”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엘레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았다. 하도 울어서 붉게 달아 올라있는 눈가를 보던 데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뭐.”

“…….”

“너무한 거 아닌가.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중요한 결정을 혼자 내리고 말이에요.”

나긋하게 웃던 데온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곧 그의 눈에서도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당신과 내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

“그 기회를 함부로 앗아가지 말아줘요.”

어차피 반려의 언약을 끊을 방법은 없다. 그것을 데온도 알고 엘레노아도 알았다.

하지만 데온은 언약을 실행한 엘레노아를 탓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의지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최대한 엘레노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그의 선택임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어차피 언약을 끊을 수 있었더라도 그는 똑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그리고 당신 혼자 보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다정한 말에 엘레노아가 데온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그렇게 부부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날 밤, 일기장에 적힌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이 둘을 불쌍히 여긴 것일까?

성인인 엘레노아에게 최적화되어있는 마법을 받아들이지 못한 로레이나의 영혼은 그대로 다른 세계로 튕겨 나갔다.

이곳과는 다른 환경,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가진 어느 세계로.

하지만 부부는 당황하지 않고 껍데기만 남은 제 딸의 곁을 지켰다.

그들의 아이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몸이 일기장의 조건에 맞게 자라날 때까지.

그렇게 외부인을 출입을, 사용인들의 이동조차 경계하며 살던 어느 날이었다.

자신들의 딸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부부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 부모가 사라진 세계에서, 아이는 다시 눈을 떴다. 입술에서 옅은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곧 푸른색 눈이 크게 뜨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가 중얼거렸다.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본다. 제 것 같지 않은 분홍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시야에 잡혔다.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머리와 볼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까지 누가 정리를 해준 모양인지 곱게 땋은 머리가 헝클어질 때까지 계속.

한참을 그러고 있던 소녀가 경악에 찬 얼굴로 외쳤다.

“설마 나, 빙의한 건가?”

햇살이 평화롭게 방 안을 비추던, 어느 따듯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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