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
입에서 옅은 신음이 터졌다.
시야에 들어온 눈부시게 새하얀 공간에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과거에서 빠져나온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다시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싫다고, 분명 과거로 가기 전 외쳤건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니, 단순히 그런 단어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뭐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그대로 휩쓸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쩐지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주저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바로…….
‘내가 진짜 로레이나였어.’
빙의 따위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부터 로레이나 아멜리오였다. 아멜리오 백작가의 하나뿐인 딸. 세상에 마지막 남은 엘프 혼혈 아가씨.
그리고 그런 나를 살리기 위해서 백작 부부가 희생했다.
내가 왜 엘레노아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저 빙의된 몸의 어머니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이 나의 어머니라고.
“다 보고 온 모양이구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생명의 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이게 다 사실인 건가요?”
“그래. 네가 본 그대로란다.”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꼭 나를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느낌이었다.
“그, 그럼 제가 이전 세계에서 있던 몸은 어떻게 된 건가요? 또 다른 누군가의 몸에 빙의된 건가요?”
“빙의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어쨌든 너를 위해 마련된 몸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어요?”
내가 이 몸으로 돌아왔으니, 그 사람도 제 몸을 찾은 건가?
하지만 예상과 달리 생명의 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몸의 주인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단다. 네 영혼이 들어간 건 빈껍데기였어. 조건이 비슷한 몸을 찾아 운 좋게 들어간 거지.”
말을 마친 생명의 신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향해 느릿하게 허리를 숙인 신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 그 몸으로 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었니? 일이 안 풀린다거나.”
“……그랬죠.”
운이 정말 더럽게 없었지.
오죽하면 처음 이곳에 빙의했다고 생각했을 때, 생판 모르는 곳에 떨어졌음에도 먹을 것 걱정 안 해도 된다며 좋아했겠는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한숨만 나왔다.
“그것도 이유가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운이 없을 수밖에.”
내 머리에서 손을 뗀 신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이미 죽어버린 몸에 들어가 버렸는데 그 몸에 행운이 남아있을 리 없잖니.”
“…….”
“또 궁금한 건 없니?”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무엇이지?”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요.”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의 신이 나를 이렇게 따로 부를만한 이유가 없다.
제 후손이 사랑하는 이라서?
그럴 것이라면 지금까지 모든 데르키안 황족의 반려들을 다 불러 모아야겠지.
하지만 왜인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생명의 신은 마치 내가 특별한 경우라는 듯이 행동했으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는지 생명의 신이 제법이라는 얼굴을 했다.
“예리하구나.”
“워낙 고생하면서 살았더니 눈치가 늘어서요.”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네?”
“명색이 생명의 신인데, 영혼 하나 잘 간수하지 못해서 지금껏 그런 삶을 살게 했잖니.”
“…….”
“내 잘못도 있으니 그것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지려는 거야.”
생명의 신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또 다른 궁금한 점은?”
“과거를 보러 가긴 전에, 제가 소설을 자주 읽는 걸 이용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아까까지만 해도 인자한 얼굴로 잘 답하던 신이 갑작스레 딴청을 피웠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뭐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가르쳐 주세요, 뭔가 있는 거죠?”
“글쎄.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
“잘못을 책임지신다고 하더니. 별로 안 미안하신 모양이네요.”
“……끄응.”
작게 신음하던 생명의 신이 결국 못 당하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뒤에 ‘내가 왜 기억력 좋은 애 앞에서 그런 말을 해가지고. 바보야.’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절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었단다. 그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네. 그러니까 말해보세요.”
“……사실, 네가 읽은 그 <크루시아>라는 거 말이야. 소설이 아니란다.”
“……소설이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크루시아>가 소설이 아니라니?
나는 아직도 내가 읽었던 문장들을 다 기억했다.
<크루시아>에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당시의 풍경이라든가 인물 간의 대화, 레오나드의 감정 같은 것들이 세세하게 나와 있었다.
그게 소설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내가 의아해하는 걸 알았던지 잠시 망설이던 생명의 신이 말을 덧붙였다.
“레오나드. 그 아이에게 너는 어떤 의미였니? 어떤 존재였어?”
갑작스레 나온 이름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거세게 뛰고 호흡이 잔뜩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는 죽고야 말았으니까.
“……유일하게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존재죠.”
“그렇지. 그럼 그런 네가 떠난 뒤 그 아이는 어떻게 살았을 것 같니?”
“…….”
“아, 우, 울지 말고! 말 그대로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았겠냐는 거야!”
내 얼굴을 보던 생명의 신이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움직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 모양이었다.
하긴, 레오나드와 그런 식으로 이별을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니까.
‘그나저나 레오나드의 생활방식이라.’
내가 나타나기 전에는 제럴드가 서면으로 보고를 했다고 했었지. 그럼 내가 사라진 다음에도 비슷하게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헨티슨 가문에서 서류로 보고를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음. 그것도 아니면…….”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싶어 하나하나 노트에 다 적던 젠, 그러니까 레오나드의 어릴 적 모습이.
“……자기가 기억하는 걸 스스로 기록하든가.”
“그렇지.”
생명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머리를 스치고 간 추측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신의 팔을 잡았다.
“혹시, 제가 읽은 그거. 레오나드의 일기장이었나요?”
“역시 눈치가 참 빠르다니까.”
진지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내 눈을 보던 신이 나긋하게 웃으며 제 팔 위에 얹어진 내 손을 잡았다.
“네가 떠나고 한참 동안 방황하던 그 아이가 나름 삶과 타협한 결과란다. 그렇게라도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려고 한 거지.”
“…….”
“나는 그것을 조금 더 소설처럼 보이도록 손을 쓴 것뿐이고.”
“그럼 그 <크루시아>라는 제목은…….”
“그 아이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식물 이름이지.”
“…….”
“무슨 뜻인지 네가 가르쳐 주었잖니.”
생명의 신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 아득한 속삭임에 아주 먼 과거 속, 내가 젠을 책임지겠다며 그의 손을 잡고 축제로 향하던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 젠이 불퉁한 얼굴로 물었었지.
‘그런데 축제 이름이 좀 그런데? 크루시아는 그냥 식물 아니야?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
제가 주인공인 책 제목의 뜻도 모르는 젠을 보며 웃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크루시아의 꽃말은 변함없는 사랑이야. 잘 기억해둬!’
아, 맞아. 그랬었다.
머릿속 한구석에 넣어두고 잘 꺼내 보지 않았던 기억이 드러나자 몸이 움찔 떨렸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훅 훑고 지나갔다.
그래. 바로 나였다.
그 뜻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나였어.
“아까 내가 책임을 진다고 했었지. 그래서 네게 기회를 주려고 한단다.”
생명의 신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첫째, 이전 세계로 돌아가서 다시 태어나는 거야. 네가 못 누렸던 운까지. 아니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행운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마.”
“…….”
“그리고 둘째, 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저는 두 번째로……!”
“쉿. 아직 좋아하기는 일러. 첫 번째와 달리 여기는 단점이 한가득하니까.”
신나서 냅다 두 번째를 외치던 나를 말린 생명의 신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본래라면 영혼은 한 세계에서 연이어 두 번 태어날 수 없어. 애초부터 정해진 규율이라 나도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단다.”
“…….”
“물론 어떻게든 다시 태어나게 해줄 수는 있어.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걸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대가가 필요하니 행복한 인생을 보장받지는 못해.”
“…….”
“그리고 네가 잠들어있는 동안 꽤 시간이 흘렀어. 그 세계에서는 아마……음. 10년 정도가 흘렀겠구나.”
……10년. 10년이라.
‘……시간이 엄청 지났네.’
레오나드와 내가 보낸 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안 그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레오나드는 과연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을, 아니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귀신같이 내 불안을 눈치챈 생명의 신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그 아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
“네가 성장해서 그를 만났을 때 어쩌면 너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을지도 모르지. 너에게는 며칠 전의 기억이나 그 아이에게는 무려 수십 년 전의 기억일 테니까.”
“…….”
“그래도, 이 세계를 택하겠니?”
생명의 신이 물었다.
앞으로의 내 인생을 지금 결정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