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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2화 (132/144)

#132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불행하기만 했던 내 인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확실한 행운을 준다고 했으니 돈 걱정 따위는 하지 않겠지.

펑펑 놀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앞의 존재라면 그것을 정말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네. 저는 제가 있던 세계로 돌아갈래요.”

내가 있어야 할 곳. 레오나드의 곁으로.

“후회하지 않겠니?”

“그럴지도 모르지만…….”

“…….”

“약속했거든요. 죽더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가겠다고.”

반드시 다시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자 생명의 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쪽으로 들어가면 된단다.”

신이 허공에 손을 한번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과거의 기억을 보러 들어갈 때와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입구가 생겨났다.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내가 기분이 좋으니 특별히 아주 작은 행운을 주마.”

“작은 행운이요?”

“내 후손을 위해주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란다.”

생명의 신이 작게 웃었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했지만, 행운이라니 좋은 거겠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감사했습니다.”

신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넨 나는 곧장 입구 안으로 발을 디뎠다.

솨아아-.

귓가에 들리는 옅은 소음과 머리를 울리는 묘한 느낌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 한 가지 다짐만이 맴돌았다.

‘당신을 구원하는 건 반드시 내가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 * *

‘으음. 여기가 어디지?’

나는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뭐지?’

의아함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도저히 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손이 다른 쪽 손에 잡혔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도 그렇고 팔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작다.

이건 그냥 아기나 다름없지 않…… 아, 맞다. 나 다시 태어난다고 했지.

“어머, 여보! 아기가 움직여요!”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나를 아기라고 칭하며 다가왔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처음에 들린 목소리였다.

다소 높은 음성을 보아하니 여자인 것 같았다. 나를 보는 시선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름은 뭐가 좋을까요?”

여자의 옆으로 인기척이 하나 더 생겨났다. 이번에는 여자보다 한참 낮고 굵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저번에 생각해두었던 거 있잖아. 그걸로 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자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보니 그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겠는걸.”

그 뒤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새로운 몸의 부모들인 모양이었다.

살면서 부모를 가진 것은 처음이라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을지 보고 싶었다.

내 얼굴도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고.

‘하지만 아직 시야가 트이지 않았으니 참아야지.’

나는 어느새 가슴에 가득 들어찬 기대감을 누르며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잠시 뭐라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다시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정말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라니까.”

“좋아요. 아가, 오늘부터 네 이름은…….”

내 머리를 쓰다듬은 여자가 나직이 속삭였다.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셀리아. 셀리아란다.”

* * *

그로부터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나는 어느새 20살이 되었다.

이 세계에서 성인으로 치는 나이를 넘은, ‘로레이나 아멜리오’로 있을 때보다 더 나이를 먹은 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신기하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팔을 쭉 펴니 찌뿌둥했던 몸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방 안에 있는 거울에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담긴 여자도.

정확히 말하면, 곱슬기가 있는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푸른 눈의 여자 말이다.

‘……처음에 진짜 깜짝 놀랐지.’

아무리 다시 살 기회를 준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로레이나 아멜리오와 똑같이 생긴 외모를 줄 줄은.

만약 내가 죽고 엘레노아의 과거를 보기까지 10년이나 흐르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내가 나이를 먹은 때까지 총 30년이 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주변에서 나를 로레이나라고 착각할지도 몰랐다.

‘로레이나는 엘프 혼혈이라 잘 늙지 않으니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뭐, 어쨌든 나는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할 말은 많지. 분홍 머리가 흔하지 않다지만, 정말 엘프만 분홍 머리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바람.”

내뱉은 말을 머릿속으로 형상화하며 작게 중얼거리자 얼마 가지 않아 방 안에 옅은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은 굳게 닫힌 채로 커튼까지 꼭꼭 쳐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직까지도 이건 믿기가 어려웠다. 설마하니 내가…….

‘……레오나드의 일기장 속 셀리아였을 줄은.’

새로운 몸의 어머니가 처음 내게 이름을 말해주었을 때 예상은 했다만 정말 내가 그 셀리아였다.

몸속에 흐르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력이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셀리아라는 이름에 남들에게는 없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지 몇백 년이 지난 마력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레오나드의 일기장에 나온 셀리아와 나는 동일인물이 맞았다.

아니, 사실 이제 와 내가 셀리아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이 마력으로,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을 테니까.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느끼기에도 내 마력은 이사벨이 가진 것을 훨씬 웃돌았다.

‘그렇다는 건, 이사벨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잠들지 않아도 손쉽게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거야.’

아무래도 생명의 신이 말한 작은 행운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자마자 당장이라도 레오나드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기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혼자 걷는 것도 못 하는데 어딜 가겠는가. 나에게 수도도 아닌 작은 마을에서 황궁까지 갈 재주는 없었다.

‘……뭐. 힘을 기를 시간도 필요했으니까.’

이곳에는 따로 마법 교육을 받을만한 아카데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르쳐줄 스승도 없지.

덕분에 나는 그 모든 것을 오로지 내 힘으로만 익혀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레오나드를 저주에서 풀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가진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는 데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20년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나는 마침내 여러 가지 마법을 실행하고, 그것을 잘 다루는 데 성공했다.

이제 가서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어주면 된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대망의 그 날!

‘부모님께는 다 말씀드려놨으니까 빨리 준비하고 수도로 올라가면 돼.’

셀리아는 귀족이 아니었던 터라 호위 기사가 따로 없어서 설득하는 데 좀 애를 먹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혼자서 수도 구경을 하고 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중간중간 편지만 한다면 더는 반대하지 않겠다고.

나는 재빨리 채비를 마친 후 이미 싸두었던 짐을 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일찍부터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셀리아, 잘 다녀오렴. 꼭 편지하는 거 잊지 말고.”

“그래. 이왕 가는 거 좋은 거 많이 보고 돌아오너라.”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무리 받아도 좋은, 한없이 가슴이 따스해지는 그 애정에 나는 활짝 웃었다.

“네! 잘 다녀올게요.”

이제 이 애정을 당신에게 전하러 가야지.

생명의 신의 말대로 레오나드가 더는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물론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레오나드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나만은 당신을 온전히 기억할 테니까.’

그렇게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미리 엿보고 온 미래를 현재로 만들 시간이었다.

* * *

나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수도로 향하는 작은 짐마차를 얻어 탔다.

사실, 집부터 황궁까지 바로 순간이동을 할까 생각도 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그만두었다.

레오나드의 저주를 푸는 데 얼마만큼의 마력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으니 최대한 아끼는 것이 좋았다.

‘아멜리오 백작가나 황궁의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되긴 하지만 이것도 제법 나쁘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짐마차에 탄 사람이 나 외에도 꽤 여럿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보아하니 자주 수도와 마을을 오가는 이들인 것 같은데, 잘하면 수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강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까지는 별로 쓸모없는 정보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황궁이나 아멜리오 백작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아니면…….

‘……데프론 공작가에 대한 소식이라도.’

물론 그동안 아예 아무런 정보도 못 듣고 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수도에서 좀 떨어진 마을이라고 한들 이쪽도 들리는 귀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30년 전에 데프론 공작가가 반역죄로 멸문을 당한 사건은 카일룸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아닌가.

‘아이작 데프론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고 했던가.’

역시 내게로 아브로고가 오지 않았던 건 아이작이 중간에 손을 썼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레오나드가 그를 가만히 둘 리가 없지. 내가 없으니 더는 망설일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아이작을 따르던 수하들 역시 자결을 하는 것으로 전부 죽음을 맞았다고 들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이사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내 것 외에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에녹에 대한 소식은 없나.’

아무리 알아봐도 에녹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분명 레오나드가 작위와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리는 소문이 없었다.

아마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는 탓도 있을 것이다.

‘데프론 공작가’라는 글자 중 하나라도 꺼냈다가는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지금 알고 있는 것도 술집에서 간간이 엿들은 내용이니 말 다 했지 뭐.’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그날, 이중 첩자 제안을 하러 왔던 모습이 마지막이었기에 늘 그가 궁금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

‘어라?’

“저기, 잠깐만! 잠깐만 좀 세워주세요!”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마부가 서둘러 짐마차를 세웠다.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이 뭐라 투덜대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것을 신경 쓸 새는 없었다.

……방금 분명, 에녹과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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