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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3화 (133/144)

#133화

‘……잘못 봤나?’

혹시나 싶어 눈을 비볐다가 뜨니 어느새 에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눈앞에는 사람들이 간간이 오가는 작은 시장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 잘못 보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에녹에 대한 소식을 궁금해하는 내 바람이 환영이라도 만들어낸 것일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차분히 주변을 훑었다.

수도로 올라가는 길목이기에 지나는 것일 뿐, 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동네였다.

‘내가 언제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이제 수도로 가면 곧장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 테고, 그러고 나면 엄청 바빠지겠지.

아니, 어쩌면 저주를 풀기까지도 오래 걸릴지 모른다. 레오나드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하니까.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곳을 다시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까 그 사람이 정말 에녹이 맞았다면?’

머릿속에 얼핏 보았던 눈이 부신 은발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머리 색은 절대로 흔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조금만 찾아보고 가야겠어.’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에녹이 여기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30년이나 지났으니 에녹의 모습은 이전과 같지 않을 거야. 그건 고려하고 찾아보자.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던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웅성거렸다.

“저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빨리 좀 출발하십니다!”

“맞아요! 아 갑자기 마차를 세우고 그런데? 내리지도 않을 거면서!”

아, 맞다. 나 이 사람들이랑 같이 가고 있었지.

재빨리 사과하며 머쓱하게 웃자 내게 뭐라 한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긴, 저 사람들도 다 사정이 있고 바쁜 사람일 텐데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 근처에서 또 짐마차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를 어쩐다.’

나는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집에서 출발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이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흐음. 어쩔 수 없지.

“저기, 이만 마차는 멈추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는 건 어떨까요?”

“뭐라고? 누가 마음대로!”

“맞아, 마차 마음대로 멈춘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젠 자고 가자네!”

예상대로 반발이 극심했다.

하지만 이쪽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마차를 계속 몰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워졌는걸요. 이대로 더 가다가는 산속에서 야영을 하게 될 거예요.”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수도까지 한두 번 가보나.”

“어차피 하룻밤 잘 생각이었다면 맨바닥보다 훨씬 깨끗한 여관에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쪽이 돈을 대줄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냥 이대로 가겠어!”

“대드릴게요.”

“……뭐?”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하나하나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숙박비랑 식비. 제가 다 내드릴게요. 그러니 근처 여관에서 자고 가시죠.”

“…….”

“아. 혹시 야영도 안 하고 가야 할 정도로 수도에 급한 볼일이 있는 분이 계시면 그냥 가셔도 되고요.”

짐마차 안이 다시금 시끌벅적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웅성거림이었다.

“그, 그렇다면야 뭐…….”

“그래. 자고 가지 뭐! 어차피 잘 생각이었으니까.”

“약속 꼭 지키게! 아니면 가만 안 둘 테니까.”

“네! 선불로 지급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마을에서 몰래 도적들을 잡으며 받은 현상금이 제법 있었다. 그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그사이 근처에 있던 마을 사람에 제일 가까운 여관이 어디인지 발 빠르게 알아 온 마부가 다시금 마차를 몰았다.

덜커덩-.

마차가 특유의 거친 소리를 내면서 여관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그에 온전히 몸을 맡기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아까 그 사람이 정말 에녹이 맞아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되려나.

* * *

“크으. 이 맛이지!”

여관 안에서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다소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녁을 순식간에 해치운 사람들이 식후에는 당연히 술이라며 하나같이 맥주를 주문한 까닭이었다.

나는 내게도 술잔을 권하는 남자에게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많은 인원이 술까지 마신다니.

‘……돈이 생각보다 많이 깨지겠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수도에 자주 오가는 상인들이다. 그만큼 정보에 빠삭한 이들이라는 소리지.

다시 말하면 여기 있는 이들만큼 수도에 대한 정보를 듣기 좋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내가 언제 이만한 인원이 모이는 자리에 끼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지금도 돈을 대신 내주니까 같이 앉아있는 거지.

‘고급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이 높을 테니 나와는 상대도 안 해줄 테니까.’

로레이나 아멜리오였던 시절이면 모를까 평민인 셀리아한테 그런 배려를 해줄 귀족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금 방긋 웃었다.

정보 값이라고 생각하지 뭐.

“정말 안 마실 거야? 여기 술맛 죽이는데.”

“네, 괜찮아요.”

다시금 술을 거절한 나는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폈다.

이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면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음. 저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말해봐! 내가 다 말해줄 테니!”

술을 한 잔 들이마신 상인들이 서로 바라보다가 낄낄댔다. 좋아. 타이밍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수도는 어떤 곳인가요? 이번에 처음 가는 거라 궁금해서요.”

“수도? 좋은 곳이지. 가끔 무시하는 귀족분들이 있어서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뭐, 그거야 원래 그랬으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상인이 말을 뱉던 중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무래도 수도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 내가 어렸을 때는 좀…… 뭐라고 해야 하나. 지금이랑은 분위기가 좀 달랐거든.”

“맞아. 좀 삭막한 구석이 있었지. 생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잔을 기울이던 상인이 동조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것을 열심히 경청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일단 풍경부터가 다르지. 수도가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아나?”

“특히 황궁 근처로 갈수록 경관이 끝내주지. 술맛이 난다니까.”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술이 맛없다는 게 아니야! 낄낄낄!”

……황궁!

기다렸던 단어에 나는 반짝 눈을 빛내며 책상에 조금 더 몸을 붙였다.

“황궁이 그렇게 아름답나요?”

“당연하지! 카일룸 제국의 자랑이라네. 우리 같은 상인은 그 근처만 구경하고 오는 게 다지만 말이야.”

“외국에서 관광하러 오면 황궁 주변을 둘러보는 게 필수가 되었다지 뭔가!”

와아. 그 정도라는 말이야?

내가 비서관이라는 직책으로 머물 적에도 황궁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렇게 막 소문이 크게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본래의 주인을 찾은 황궁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예전 모습을 찾아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과거를 통해 본 카일룸 제국은 정말로 아름다웠으니까.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사람들에게는 30년 전의 기억일 것이 나에게는 좀 다른 의미이니 어색하긴 하겠지만.

‘이제 제일 중요한 걸 물어볼 차례야.’

황궁에 대해 물어봤으면, 나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존재.

“그럼 황제 폐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들으니 그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끼고 살아갔을 레오나드가 너무나 궁금했다.

당신은 어떻게 변했을까?

내가 그렇게 죽어버리고 많이 울지 않았을까. 그때의 기억은 어느 정도 남아있을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지만,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분명 레오나드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으리라는 거였다.

카일룸 제국이 전과 달리 살기 좋아졌다는 건, 그리고 제국민들이 그 변화를 뚜렷하게 느끼고 있다는 건 레오나드가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뜻이니까.

혹시나 아무것도 안 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서 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 내가 죽기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레오나드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남들과 다르다고, 특이하다고 해서 누군가가 무시당하지도, 괴롭힘당하지도 않는…….’

‘모두가 어우러지는 그런 세상.’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했던 부탁에 레오나드는 알겠노라 대답했었지.

‘……나와의 약속을 지켜준 거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든 내 말을 들어주려고 했다.

그것이 너무 기꺼워서 나는 결국 흐르는 눈물을 차마 참지 못하고 살짝 흐느꼈다.

어차피 주위가 시끄러웠고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안 들릴 것이라 괜찮…….

‘……어라?’

그러고 보니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의아함에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주위 사람들이 다 술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있던 탓에 내가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다 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 저기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그렇게 보시는지?”

고개를 갸우뚱하자 상인들이 뭐라 대답하지는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도대체 뭐지?

“그, 황제 폐하께서 어떠냐고 물어봤지?”

“네! 황궁 이야기가 나오니까 궁금해서요.”

“…….”

“저기요?”

또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쯤 되면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왜요? 황제 폐하께서 좋은 분이 아니신가요?”

“아니! 좋은 분이시지. 평민들을 위한 정책도 많이 만드셨고, 빈민가를 구제할 방도에도 항상 신경 쓰시고…… 내가 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렇게 불편한 얼굴을 하고 계세요?”

내가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말을 뱉은 상인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그게 말이야. 사실…… 하시는 일을 보면 분명 좋은 분이 맞는데, 그렇게 확실하게 좋은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

“좀 어둡다고 해야 하나, 무섭다고 해야 하나. 나도 저번 건국제 때 멀리서 딱 한 번 뵌 거긴 했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는 듯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상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직접 보면 알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이 얘기는 묻지 말게!”

그리고는 입을 다문다.

주위의 다른 상인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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