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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4화 (134/144)

#134화

“……무슨 뜻이지?”

식사가 마무리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혼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닌 것을 내가 추측한다고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은 분은 맞는데 그렇게 확실하게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말이야 방귀야.

나는 더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침대에 누웠다. 사실, 이제 상인의 말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 탓이었다.

‘설마 인간이 되었다고 이렇게 칼같이 기억력이 나빠질 줄은…….’

다른 세계에서 살았을 때도 쭉 기억력이 좋았던 터라 좀 아쉽기는 했다.

‘하긴, 다시 태어난 지금과 달리 그때는 영혼은 똑같았으니까.’

그래도 좋은 기억력과 마력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둘 중 뭐가 더 좋을지 비교해본다면 당연히 후자이니 말이다.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어차피 레오나드를 만나면 다 해결이 될 일이다.

뭔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내가 로레이나일 적에 해둔 말도 있으니 제 저주를 풀어주려고 왔다며 찾아온 나를 마냥 내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헨티슨 가문이 옆에서 도와줬다고 한들 레오나드는 쭉 외롭게 있었을 테니까. 당장이라도 저주를 풀고 싶겠지.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아까 내가 본 사람이 에녹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내 방이 있는 2층을 내려와 1층으로 향했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여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뭐 찾으시는 게 있나요?”

“네,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나는 살짝 눈을 굴려 여관을 이리저리 살폈다. 딱 보기에도 신식 건물은 아니다.

“혹시 여기서 여관을 운영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아, 한 20년 정도 되었어요. 제가 여기 주인은 아니긴 하지만…….”

“아, 그러시구나.”

아까부터 계속 저 직원만 보이기에 여기 주인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다.

뭐, 상관없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그러면 이 마을에 누가 사는지 대충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그리 큰 마을도 아닌걸요. 혹시 찾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남자 하나를 찾고 있어요. 이름은…….”

아무렇지 않게 에녹의 이름을 말하려던 나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에녹 데프론은 반역죄로 작위며 재산이며 다 몰수당한 사람이 아닌가.

‘계속 그 이름을 쓰고 있을까?’

‘에녹’이라는 이름이 엄청나게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최대한 숨기고 싶겠지. 그렇다면 이 이름으로는 살고 있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뭐라 말을 하지 못하자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직원이 다시금 물었다.

“생김새가 어떤데요? 혹시 제가 아는 분이라면 말씀드릴게요.”

“음, 하얀색에 가까운 은발에 녹색 눈을 가졌어요! 되게 순한 인상이고 나이는…… 아마 50살 정도 되었을 거예요.”

“은발이라…….”

기억을 더듬는 듯 직원이 눈을 감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저희 마을에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확실한 건가요?”

“네. 혹시 몰라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떠오르는 분이 없네요.”

“그래도 어쩌면…….”

“만약 있다면 제가 바로 알았겠죠. 아가씨 머리 색보다야 아니겠지만. 은발도 흔하지는 않잖아요.”

직원이 로브 자락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머리카락을 후드 안으로 숨겼다.

물론 들켜도 딱히 상관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히 튀는 건 싫으니까.

“어쩌죠. 제가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하는 말에 나는 고개까지 흔들며 손을 저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꽤 오래 고민해준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외지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은발이면 금방 눈에 띌 거예요. 내일 찾아보시는 게 어때요?”

“제가 내일 아침에는 여기를 떠나야 해서요. 중요한 일이라.”

“……아, 그러시구나.”

안타까운 듯 작게 탄식하던 직원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기, 저 정말 괜찮아요! 사실 이 마을에서 제가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그런 거였거든요.”

“……아아.”

“그런데 제가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네요.”

알다시피 이곳은 작은 마을이다. 아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이 마을에 여관은 여기 하나뿐이었다.

이곳 사람이 아니라면 직원의 말대로 외지인이라는 건데 그럼 당연히 여기 머물렀어야지.

여관이 버젓이 있는 마을에서 야영하는 것은 이상하고 오히려 눈에 띄니까.

‘여기 손님이라면 저 직원이 보지 못했을 리 없고.’

단순히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면 아마 지금 시간까지 이 마을에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말은, 그때 내가 본 것이 정말로 에녹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찾을 방법은 더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그냥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눈앞에서 놓쳤다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할 테니까.

“그럼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나는 그렇게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직원의 얼굴이 점점 서글퍼지는 것도 모르고.

* * *

“하하. 덕분에 잘 머무르다가 가네.”

“맞아, 야영하는 거보다 훨씬 낫지!”

“밥도 술도 정말 끝내줬어!”

다음 날 아침, 어느새 나갈 준비를 마친 상인들이 1층에 모여서 활짝 웃었다.

어제저녁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짐마차에 앉아 피곤에 찌든 얼굴로 수도로 향하던 이들과 동일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나는 그 밝은 얼굴들을 보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어제 저 몸으로 들어간 술이 얼마인데 어떻게 저렇게 활기찰 수가 있는 거지.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 그러면 조금 뒤에 출발할 테니 혹시 빠진 거 있나 확인하시고!”

마부가 말 상태를 점검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흡사 관광지의 가이드라도 된 느낌이었다.

나는 시끌벅적한 무리를 잠시 지켜보다가 살짝 웃었다.

……뭐, 좋으면 좋은 거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나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건지 여관 밖으로 나와 서 있는 직원을 향해 인사했다.

어제 내가 에녹에 대해 물었던 바로 그 직원이었다.

내가 인사하는 것을 본 직원이 무언가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말 가시나요?”

“네? 네! 가야죠?”

어제 분명히 아침에 떠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상한 느낌에 살짝 의아했으나 곧 나는 생각을 접었다. 그냥 시끌벅적했던 여관이 썰렁해지는 게 서운한가 보지.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잘 있다가 가요.”

나는 다시금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직원은 이렇게 나를 보내줄 수 없는 듯했다.

초조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직원이 이내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로요?”

“네? 네.”

“지금?”

“그, 그렇다니까요.”

“조,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면 안 되나요?”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안돼요. 보시다시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뒤쪽의 상인들을 살짝 가리키며 손짓하자 내 손을 따라 그쪽을 보던 직원이 한껏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직원이 그럴수록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어제 잠깐 이야기한 바로는 되게 진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죄송하지만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저는 꼭 저 마차를 타야 하거든요.”

“꼭 저 짐마차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아무래도 여기는 마차를 구하기가 힘들잖아요. 저것도 겨우 탄 거라.”

“그런 거라면 저희가 마차를 구해드릴……!”

거기까지 말하던 직원이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당황한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니지. 굳이 그렇게 해주실 이유가 없죠. 그냥 가시면 되는데.”

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원망스럽다는 시선이 잠시 여관을 향했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입을 뗐다.

“그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네?”

“이번에도 안 되면 저도 정말 포기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아까부터 자꾸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탓에 이제는 좀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나는 이 직원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방금과 달리 매우 진지하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제 에녹의 행방을 물었던 나처럼.

내가 저항 없이 가만히 있자, 숨을 크게 들이쉰 직원이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더니 내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세상에! 지금 가시나요. 아쉬워라!”

“…….”

“이제 정말 마지막인데!”

“…….”

“중요한 일을 하러 가시는 거라 여기는 안 오신다는데!”

“…….”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찌나 크게 소리치는지 여관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데없는 외침에 뒤쪽에서 떠들던 상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나와 직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 상태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더는 안 되겠다.

“저, 죄송하지만 진짜로 가볼게요. 계속 이렇게 하시는 것도 좀 기분이 나쁘고요.”

나는 나직이 말하며 내 어깨에서 직원의 팔을 떼어냈다. 이번에는 그녀도 별다른 말 없이 물러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말한 대로 정말 이번이 마지막 시도인 모양이었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 상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내가 짐마차에 발을 올리던 순간이었다.

덜커덩-.

다소 큰 소리를 내며 여관 문이 열렸다.

직원의 외침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소음에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한 남자였다.

급하게 나온 모양인지 숨을 헉헉거렸고 머리는 바람에 날려 헝클어져 있었다.

모두가 저를 쳐다보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남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만 존재한다는 듯, 두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뚫어져라 나를 보는 시선에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나는 굳이 입을 열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를 빤히 본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말도 안 돼.’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눈이 부시게 하얀 은발에 부드러운 느낌의 녹색 눈.

내가 그토록 찾았던, 아주 익숙한 색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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