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강 주고받은 제럴드와 나는 곧장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도 익숙하지 않은 방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전과는 의미가 좀 달랐다.
왜냐하면, 그 안에 매우 익숙한 이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폐하,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나를 소개한 제럴드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 내 뒤쪽에 섰다. 나는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레오나드였다. 늘 결 좋고 부드럽다고 생각했던 검은 머리카락이 창밖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 아래 자리한 붉은 눈 역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항상 루비 같다고 생각한 눈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 전과는 무언가 달랐다.
‘……변했어.’
레오나드는 전과 달리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
물론 그전에도 화가 났을 때는 살기를 내뿜으며 이보다 더한 얼굴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럴만한 상황이었을 때였다.
나와 마주 보고 있는 레오나드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했다. 그럼에도 곁에 있으면 베이기라도 할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덤덤한 얼굴 아래 진득한 살기가 묻어났다.
이 무슨 모순되는 느낌이라는 말인가.
‘게다가 제럴드는 익숙하다는 얼굴이야.’
꼭 레오나드가 이렇게 된 지 엄청 오래된 것처럼.
내가 죽어 사라진 것이 레오나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해보는데,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분홍 머리칼이라…….”
레오나드의 시선이 내 얼굴이 아닌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저주에 걸린 탓에 지금은 인간이 되어버린 내 얼굴을 볼 수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이나 내 머리카락에 시선을 두고 있던 레오나드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그조차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아주 작은 변화였다.
“거슬리는군.”
그게 끝이었다. 레오나드는 더는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레오나드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감격스러운 재회를 할 것이라고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레오나드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의 신에게 이 세계로 가겠다고 말한 일, 그를 위해 지난 시간 동안 죽을 듯 마법을 갈고 닦은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돌리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지만 서러움이 복받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러는 거지?”
내 감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입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한없이 그리워했던 그가,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나치게 낯설다.
나는 레오나드와 처음 만난 날에도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제럴드가 멋쩍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폐하를 처음 뵈니 긴장을 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별다른 추궁 없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나를 신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내게 별 관심이 없어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을 끝으로 레오나드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결국 또다시 나선 것은 제럴드였다.
“폐하. 이 여자는 마법을 쓸 줄 압니다.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요.”
“…….”
“폐하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급히 날아왔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런 무례를 저지른 것이니 너그럽게 봐주세요.”
레오나드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그에 나는 아까까지 우울해하던 것도 잊고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마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레오나드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제럴드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내 옆에 나를 보호하듯이 선 그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제럴드와 나의 걱정과 달리, 이번에도 레오나드의 얼굴은 담담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 그러고 보니 마녀가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혹시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는 건가?
놀란 마음에 나는 고개를 들어 레오나드를 살폈다. 나와의 기억을 다 잊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원하시면 능력을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기회를 놓칠세라 내가 말하자 레오나드가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곧장 옆에 서 있던 호위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 손바닥을 향해 내리그었다.
촤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상처가 났고 그 사이로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백……!”
무심코 나를 예전 호칭으로 부르려던 제럴드가 이내 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다소 소란스러워졌음에도 나는 오로지 레오나드만 바라보았다.
차분히 검을 내려놓은 나는 다치지 않은 손을 들어 상처 위에 둔 후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뒤 손안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고, 상처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양 사라져 말끔한 손바닥만 남았다.
옆에서 그것을 다 지켜본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이 느껴졌다.
“저, 정말 마법……!”
“세상에. 사실이었다는 말이야?”
“……내가 이런 걸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나와 미리 이야기한 제럴드 역시 많이 놀란 눈치였다. 남색 눈동자가 내 손바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그들의 반응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가만히 레오나드의 답을 기다렸다.
혼란스러운 주변에도 평온한 얼굴을 유지한 그가 내게 말했다.
“좋다. 믿어주지.”
……됐다, 됐어!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언제 차분했냐는 듯 얼굴에 힘을 풀었다.
이대로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어주고, 그 후 내가 로레이나라는 것을 밝히면 된다.
얼굴이 똑같이 생겼으니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로레이나 아멜리오만 알고 있을 법한 일을 말하면 그만이고.
나는 덩달아 신이 난 제럴드와 함께 눈을 빛내며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오나드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단, 저주를 풀 생각은 없어.”
“……네?”
어째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그만 멍청하게 묻고 말았다.
나는 레오나드가 얼마나 제 저주를 풀기를 원했는지 알았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그의 저주를 풀 능력이 되었고 그것을 증명해냈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저주를 풀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저러는 거지?
“왜 저주를 안 푸시겠다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불쑥 나온 말이었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왔는데 왜 저주를 안 풀겠다는 건지 답답해서.
그런 나를 보던 레오나드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하지만 아까 분명…….”
“내가 믿겠다고 한 건 네 능력이야. 네가 아니라.”
그 순간, 레오나드와 시선이 맞닿았다. 레오나드의 눈에는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불신이 깃들어있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아주 지독한 감정이.
“나는 인간 따위 믿지 않아.”
그제야 나는 깨닫고 말았다.
예전에 그에게 인간을 좀 믿어보라고 했던 말.
그것이 에녹의 일 이후 어떤 의미로 그의 가슴에 남았는지 말이다.
* * *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나를 내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제 곁에 두지도 않았다.
그저 황궁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그가 직접 여기서 지내라고 말한 게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떠날까 붙잡는 제럴드를 굳이 말리지 않은 거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설마 레오나드가 저주를 안 풀겠다고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난감해졌다.
내 정체를 의심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내가 마녀라는 것을 알고도 저주를 풀기를 거부할 줄은 몰랐다.
‘내가 이사벨과 겹쳐 보여서 그러는 건가?’
아니지. 레오나드는 자길 구원할 사람이 올 거라는 걸 알았잖아.
심지어 이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레이나였던 내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 당신에게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부정적인 마음을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생각이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
하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로레이나가 죽은 지 벌써 30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그 정도면 있던 마음도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아니, 오히려 넘친다.
어쩐지 몸에서 힘이 빠졌다. 잠시 그렇게 축 늘어져 있던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너 이렇게 포기할 거야?’
아니지. 절대 그럴 수 없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게다가 나는 레오나드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걸 기다리는 중 아니었던가.
물론 처음 만난 뒤로 무려 2주가 흘렀지만! 그동안 20번도 넘게 거절당하고 나를 기억도 못 했지만!
그래도 괜찮아!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으며 나무 위에서 주변을 살폈다.
회의장 안은 레오나드가 접근을 금지했으니 근처에서 대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 저기 온다!
“폐하!”
레오나드가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곧장 그의 앞으로 이동했다.
제 앞에 불쑥 나타난 나를 보던 레오나드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왔군.”
어라? ‘또’라고?
“저를 기억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허구한 날 찾아오는데 그럴 수밖에.”
레오나드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나를 지나쳤다.
평상시라면 상처를 받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20번이 넘는 시도 동안 레오나드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같이 가요, 폐하!”
나는 레오나드가 싫은 기색을 하건 말건 방긋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폐하, 오늘은 날이 참 좋네요! 저주를 풀기 딱 좋아요. 그렇죠?”
“…….”
“아! 저기 저 나무 아래 어때요? 저주 풀기 좋은 장소!”
몇 번 하고 나니 철면피가 되는 것도 익숙해졌다.
나는 그제야 레오나드의 일기장 속 셀리아, 그러니까 미래의 내가 왜 그렇게 호구처럼…… 아니 지극정성이었는지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어떻게든 저주는 풀어야만 하니까.
물론 레오나드는 이런 내 정성에도 꼼짝을 안 하지만.
‘음. 계획을 좀 바꿔볼까.’
차라리 내가 로레이나라는 것을 알리는 게 낫지 않나? 대놓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슬쩍 단서들을 흘리는 정도라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황궁 디저트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
“금가루가 엄청 뿌려져 있다는데.”
“황궁 디저트는 귀족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고 제럴드가 그러더니, 사실인가 보군.”
레오나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었나 보네. 그럼 이건 빼고.
“그리고 황궁에 도서관이 두 개나 있다면서요? 엄청 크다고 들었는데 왜 두 개나 있을까요?”
“그래. 회의장 근처에 하나, 북쪽에 하나 있지.”
이번에도 평온한 얼굴에 나는 이 또한 포기하고 서둘러 다른 질문을 준비했다.
그러니까, 레오나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기 전까지는.
“왜 두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왜냐고? 레오나드가 그걸 몰라서는 안 되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오나드가.
‘……그 도서관은 당신이 나를 위해 따로 만들어준 거였는데.’
애써 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했다. 나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레오나드가 정말로 나와의 기억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황궁에서 ‘로레이나 아멜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