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레오나드가 나와의 기억을 잊었다는 것을 안 이후로 나는 더 조급해졌다.
마음 크게 먹고 내가 로레이나라는 티를 낸 것인데 그것도 다 소용없는 일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내가 로레이나 아멜리오야!’라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레오나드를 계속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제발 저주 좀 풀자!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일이라고!’
문제는 내 예상과 달리, 아주 큰 역효과가 났다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 레오나드는 나만 보면 피해 다녔으니 말이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폐, 폐하. 잠깐만요!”
나는 잠시 멈춰서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건만, 참 냉정하게도 레오나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물론 내가 멋대로 따라다니는 것이니 굳이 그가 멈춰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누가 멀쩡한 길 놔두고 지붕으로 걸어 다니느냐고!’
어쩐지 분한 마음에 부들부들 떨던 나는 멀어지기 시작한 레오나드의 모습에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젠장. 마법만 쓸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손쉽게 레오나드를 따라잡았겠지만, 그가 황궁 내에서 마법 사용을 금지한 탓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레오나드를 꺾는 게 아니라 그가 저주를 풀 마음이 들도록 환심을 사는 거였으니까.
그나저나 나도 마법 수련을 하면서 체력 단련도 꽤 한 편인데, 역시 레오나드를 따라가려면 멀었네.
‘하긴, 살아온 시간이 다르니까.’
그래도 예전의 그 개복치, 아니 개복치한테 미안할 정도로 약하던 몸을 생각하면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그래. 다시 힘을 내서 레오나드를 따라가 볼…… 어라.
“……아앗.”
다급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발을 헛디디고 그대로 미끄러졌다.
쓸려 내려가던 중 지붕의 튀어나온 부분을 잡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다리 아래로 황궁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작게 보였다.
‘주, 죽을 뻔했다.’
눈앞의 광경에 혼미해진 나는 애써 정신을 다잡은 뒤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지붕 위로 올라왔다.
제법 안전한 곳까지 오자 아까는 너무 놀라 느끼지 못했던 알싸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지금 보니 손이며 다리며 까진 곳이 한가득이었다.
‘어서 마법을…….’
치료를 위해 손에 마력을 모으던 나는 일순 든 생각에 잠시 멈추었다.
아,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가 황궁에서 마법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마음대로 사용하면 지금보다 더 나를 거부할지도 몰라.’
그래, 그만두자. 굳이 마법으로 치료하지 않아도 약 바르면 낫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작스레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자 레오나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라?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미 저 멀리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되었든 나에게는 기회가 생긴 것이니 좋은 일이었다. 활짝 웃으며 뭐라 말을 하려는데, 레오나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치료를 안 한 거지?”
“네?”
“그리고 마법을 썼으면 애초에 그렇게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 그건 그러네. 넘어지려는 순간에 비행 마법을 썼으면 될 일이니까.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법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황궁에서 마법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
“헤헤. 저는 폐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건 안 해요!”
안 그러면 당신은 지금보다 나를 더 피하고 싫어할 테니까.
물론 마지막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대신 나는 ‘나 잘했지? 그러니까 이제 제발 좀 저주 풀자’라는 마음을 담아 싱긋 웃었다.
레오나드는 아무런 말 없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그는 이내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이번에도 그냥 무시하고 갈 것이라고 생각해 좀 의외였지만, 그가 다음에 할 행동에 비하면 이건 약과였다.
“……자, 잠깐만요!”
하지만 내 작은 반항은 별로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오나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내 손을 그러쥐더니, 곧 그 위에 입술을 내렸다.
나머지 한쪽 손은 내 다리의 무릎 부분에 댄 채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 말을 하려던 나는 새 살이 차오르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내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거구나.’
이상한 기분에 레오나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는 집중하는 모양인지 이쪽을 보지 않았다.
내린 깔린 검은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내 손을 간지럽혔다. 반듯하고 높은 코끝이 내게 살짝 닿았다.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이렇게 치유를 해주다니.’
……당신 진짜 유죄야, 유죄.
‘어차피 거절할 거라면 이렇게 잘 대해주지 말던가.’
손등에 어떠한 사심도 없이 내려앉은 입맞춤이라든가 다리에 닿은 따스한 온기까지. 전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자니 어쩐지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직도 저를 믿지 못하시나요?”
애써 마음을 다독이고는 있지만, 사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나름 각오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레오나드의 저주를 푸는 과정은 그것보다 훨씬 힘이 들었으니까.
‘뭐, 어차피 곧 잊어버릴 사람에게 물어본들 아무 소용없겠지만.’
그렇게 자조하고 있을 때, 치료를 다 끝낸 것인지 레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못 믿는 건 아니야.”
“……네?”
“너한테 악의가 없다는 거 알아. 내가 지켜본 것도 있고 보고 받은 것도 있으니까.”
안다고?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어떤 감정을 읽어낸 것인지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내게 대고 있던 손을 떼었다.
그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동안 무례하게 굴었던 건 사과하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나드가 나직이 말했다.
분명 내가 바라던 일이었으나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는 더 착잡해졌다.
레오나드가 이어서 한 말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함이 없어. 나는 저주를 풀지 않을 거니까.”
“…….”
“그러니 그만 포기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절대로 저주를 풀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동안 레오나드가 저주를 풀지 않는 이유는 내 능력이나 나를 믿지 못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그 답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돌아서서 가고 있는 레오나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너는 여기까지라고. 더는 이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 모습이 꼭 굳게 닫힌 문 같아서 나는 더는 그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참 슬프게도.
* * *
“날이 참 좋습니다. 이런 날에 나들이라도 나가면 좋을 텐데요.”
“…….”
“아, 아니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어떻습니까, 백작?”
그날 이후로 며칠 뒤, 나를 찾아온 제럴드가 내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내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레오나드와 그렇게 헤어진 뒤로 다시는 그를 찾아가지 않았으니까.
‘아마 일주일쯤 흘렀던가.’
어떻게든 그를 찾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레오나드를 처음 찾아왔던 날이 벌써 한 달 전이다. 그동안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아니, 애초에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레오나드에게는 아주 높고 커다란 벽이 있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는 단단한 벽이.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힘으로 부수고 갔지만, 마지막은 그걸로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시간을 더 들인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지붕 위에서 레오나드의 뒷모습을 본 날, 그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의기소침해졌다.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는지 제럴드가 아까보다 높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떤가요?”
“겨울이라 추워요. 괜찮아요.”
“그, 그래도요. 겨울이라도 황궁은 아름답습니다! 정원은 겨울에도 끝내준다고요, 백작!”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그냥 로레이나라고 부르세요. 저는 더 이상 백작이 아닐 텐데.”
힘없이 대꾸하자 제럴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아닙니다. 저는 그냥 이대로 부를게요. 이름으로 부르면 저 폐하께 혼날지도…….”
“…….”
“……죄송합니다.”
무심코 레오나드 이야기를 꺼낸 제럴드가 제 실수를 깨달은 듯 깊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물론 가라앉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레오나드가 그런 일로 제럴드를 혼내는 날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로레이나, 아니 셀리아라고 부르세요. 그게 낫겠네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폐하 앞에서 어정쩡하게 부를 수는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제럴드의 말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평상시라면 어떻게 레오나드를 따라갈까 계획을 세웠을 내가 가만히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대꾸를 안 하면 자리를 벗어날 법도 한데, 제럴드는 그러지 않았다.
레오나드의 일기장에 나온 대로 레오나드의 곁을 본격적으로 지키는 건 제럴드의 아들이 하고 있지만, 그거 말고도 공작이 바쁜 거야 당연한 일인데도.
그 역시 나 못지않게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기 때문이겠지.
내가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니까.
“아, 그러고 보니 곧 그날이군요.”
“…….”
“폐하의 생일 말입니다.”
“……생일이요?”
내가 다시 반응을 보이자 이거다 싶었는지 제럴드가 조금 더 의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의 생일이 겨울이라는 걸 예전에 들은 것도 같았다.
“이참에 생일 파티라도 열어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어…….”
“폐하께서는 지금껏 한 번도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으시거든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적극적인 제럴드의 얼굴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레오나드가 좋아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