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42화 (142/144)

#142화

불쑥 떠오른 생각에 레오나드가 곧장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가 찾으려고 했던 분홍빛 색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시야에 들어온 제 측근들의 모습에 그는 그들을 잡고 물었다.

“그 마녀는 어디에 있지?”

다급한 얼굴인 제 주군의 얼굴에 제럴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지금까지 그를 보필한 세월로 인해 대답이 늦어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화, 황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언제?”

“방에서 나오자마자요.”

레오나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다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멀리 못 갔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는데 불쑥 다이아나가 입을 열었다.

“혹시 쫓아가시려는 거면, 그만두세요. 마법을 써서 나갔으니까요.”

“마법을 썼다고?”

“네. 순간 이동 마법을 쓰던걸요. 엄청 신기하던데요?”

다이아나가 레오나드를 비꼬듯 로레이나의 마법에 대해 칭찬했지만, 지금 그의 귀에는 그런 것 따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황궁 안에서 마법을 쓰는 게 어떤 의미인지 레오나드는 알았다.

지붕 위에서 떨어져 다칠 뻔했을 때, 그녀가 제게 한 말이 있었으니까.

‘폐하께서 황궁에서 마법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헤헤. 저는 폐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건 안 해요!’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마법을 썼다는 건 이제는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레오나드가 자신을 싫어하든 말든, 황궁에서 쫓겨나든 말든.

“……혹시 어디로 간다고 말했나? 언제 오겠다는 말이나.”

“아니요? 그런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인사를 하고 가긴 했어요.”

“…….”

“아, 참. 그리고 폐하께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었어요.”

전해달라고 한 말?

레오나드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는 다이아나의 얼굴에 어쩐지 고소하다는 감정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소원권 하나 남은 거, 그냥 없는 셈 치는 걸로 알겠다는데요?”

쿵-.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레오나드의 심장이 저 깊은 심연으로 떨어졌다.

그건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로레이나가 죽기 전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니까.

이 소원권을 쓰면 혹시 로레이나가 건강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하지만 레오나드가 충격받을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기가 던진 거 마지막 선물이라고 전해달래요.”

그제야 레오나드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크루시아’라고 새겨진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깊은 절망감이 레오나드를 집어삼켰다.

“……찾아.”

“네?”

“기사들을 다 풀어서라도 찾아!”

레오나드는 제 측근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안 된다. 이런 건 말이 안 된다.

설사 로레이나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끝을 낼 수는 없었다.

이게 끝이어서는 안 되었다.

절대로.

* * *

“……흠.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나는 황실 기사들을 피해 골목으로 몸을 숨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나오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수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낼 곳을 찾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온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기사들이 수도 전역을 휩쓸고 다닐 줄이야.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아니지. 황제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으니, 이것도 범죄이려나.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레오나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정말 황제에게 꿀밤을 먹인 죄로 쫓기고 있는 것이라면, 내 집까지 찾아갈지도 모르고.

‘혹시 모르니 부모님께는 보호 마법을 걸어놓자.’

나는 재빨리 정신을 집중해 집 안에 걸어놓았던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다행히도 두 분 다 집에 계셨던 모양인지, 보호 마법이 제대로 걸렸다.

이제 기사들이 부모님을 해치거나 인질로 잡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튕겨 나갈 테니까.

‘그럼 이제 내가 문제인데.’

어디로 가면 좋으려나.

사실, 갈 곳이야 많았다. 이대로 카일룸 제국 밖으로 나가 외국을 여행해도 괜찮고.

정 귀찮으면 그냥 여기 드러누워 누가 오든 마법으로 날려버리면 된다.

레오나드가 직접 온다면 누가 이길지 그건 모르겠지만.

‘……사실 가고 싶은 곳이 있기는 했는데.’

레오나드를 만나러 올라오는 길에도 들를까 말까 망설였던 곳. 지금의 내가 가도 되는 걸까 확신이 잘 들지 않는 곳.

바로 아멜리오 백작가였다.

‘제럴드한테 듣기로는 그동안 황궁에서 관리해왔다고 했는데.’

사실, 레오나드가 나를 찾지 못할 곳을 꼽으라면 아멜리오 백작가가 제일 최적이기는 했다.

레오나드는 내가 로레이나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이미 알고 있는 제럴드나 다이아나가 굳이 기사들에게 이를 알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좋아, 가보자. 메리도 보고 싶고.’

내가 그렇게 되어버린 뒤, 메리는 다시 아멜리오 백작가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30년이 지났으니 길버트는…… 아마 이 세상에 없겠고, 메리가 주로 관리하고 있겠지.

나는 눈을 감고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시야가 점멸할 듯 눈이 부신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눈을 뜨니 제법 익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달라진 곳이 있지만, 분명 아멜리오 백작가였다.

……맞게 왔구나.

‘자, 그러면 들어가 볼까? 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

호기롭게 걷던 나는 불쑥 든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 그러고 보니 뭐라고 하면서 들어가야 하지?’

아멜리오 백작가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핑계를 댈 말을 생각하지 못했다.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데 그녀와 똑같은, 심지어 죽을 때의 나이와 비슷한 여자가 백작가에 찾아온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잖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누군가한테 들키기 전에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지금 내 근처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까 잘만 하면 들키지 않고 나갈 수…….

“누구세요?”

……있지 않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그냥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지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게 말을 건 중년의 여성 목소리에서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하.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자, 빨랫거리를 한가득 안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익숙한 이를 찾아내었다.

그럴 수밖에.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눈앞의 여자는 ‘로레이나 아멜리오’로 있을 적에 늘 내 옆에 있던 메리였으니 말이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우선, 어떻게 살아났는지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그다음 황궁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메리에게 할 말을 정리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나를 마주한 순간부터 멍하니 있던 메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백작님?”

그 부름 한 번에, 머릿속에 가득하던 고민이 일순간 사라졌다.

말을 잃은 나를 보던 메리가 빨랫거리를 내팽개치더니 곧장 내게로 달려왔다.

곧 따듯한 품에 몸이 푹 안겼다. 나는 그 온기를 느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없다고?”

로레이나를 찾지 못했다는 제럴드의 보고에 레오나드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로레이나가 그렇게 나간 뒤로, 곧장 그녀를 찾기 시작한 레오나드는 얼마 가지 않아 ‘셀리아’의 집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찾는 것도 흔적을 쫓아가면서 하는 거 아니겠는가? 황궁에서 순간 이동을 해 사라진 사람을 무슨 수로 찾는다는 말인가?

“네. 셀리아의 부모가 확인해 주었습니다. 집 안에 없다고요.”

“부모가 확인을 해주었다고? 직접 집 안에 들어가 본 게 아니고?”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지, 부모 근처에만 가려고 하면 다들 태풍이라도 부는 양 날아가 버리는데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하.”

그 말에 레오나드는 그녀가 로레이나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제럴드에게 계약서를 들이밀지 않았던가.

로레이나는 무른 것 같으면서도 꼼꼼하고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하나 알아낸 건 있어.’

제 부모에게 이런 마법을 걸고 갔다는 건, 그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즉, 로레이나는 지금 그들 곁에 없다는 소리겠지.

제국 전체를, 아니 전 세계를 뒤져야 할 상황에 레오나드는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어떻게든 찾는다고 해도 문제였다. 발견한 순간, 또 순간 이동을 해버리면 끝이었으니까.

지금 이 세계에는 로레이나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레오나드가 머리를 짚으며 낙담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측근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읽은 소설 속 남자주인공들은 아무리 여주인공 모습이 변해도 단번에 알아보던데.”

“심지어 로레이나는 얼굴도 똑같았는데 이 무슨…….”

“진짜 로레이나가 너무 불쌍해요.”

레오나드는 그날 처음으로, 말도 사람에게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다 찢길 구석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지, 공격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지금 감기 때문에 몸도 안 좋은데. 누구 때문에 밤새 그 추운 데서 눈을 맞아서.”

“게다가 로레이나는 파티 준비한다고 무리했었지.”

“그것 때문에 거의 며칠 동안 밤을 새웠잖아요. 방도 직접 꾸미고 음식도 다 만들고.”

이어지는 말들에 레오나드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럴드.”

“네.”

“언제부터 그녀를 로레이나라고 불렀어?”

“……지금 그게 중요하십니까?”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주군의 표정에 제럴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를 노려보던 레오나드 역시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나한테 말을 해줬으면 좋았잖아.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

“말해도 안 믿으셨을 거잖아요.”

“…….”

“셀리아가 로레이나라는 말을 했다면, 폐하께서 믿으셨을까요? 마법으로 저희를 홀렸다면서 로레이나만 더 구박했겠죠.”

“구박이라니…….”

나름의 반박을 해보았지만, 레오나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좋게 말해서 구박이지, 그는 로레이나가 제 곁에 있는 내내 무시하고 차갑게 굴었다. 할 수 있는 안 좋은 행동은 다 하지 않았는가.

그뿐인가? 분명 로레이나를 사칭하는 여자라고 생각해 내쫓으려 일부러 거짓말도 했었지.

‘천만에. 그런 여자 잊은 지 오래야.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니라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는지.’

……미친 새끼. 이대로 그냥 죽어버려도 싼 새끼. 머저리 등신.

분명 그날, 로레이나가 깊게 절망하는 것이 느껴졌었다. 저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그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로레이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테니 다시 만나자는 말도 지켰고, 돌아오면 계속 신호를 보내겠다는 것도 지켰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측근들을 탓할 것도 없었다. 그 많은 신호를 못 알아챈 것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었다.

다시 살아나 제게 찾아오기까지 분명 순탄치 않았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제발, 로레이나…….’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용서를 빌 기회라도.

‘다시 생각해보자. 로레이나가 어디로 갔을까.’

정말 로레이나라면, 다시 살아난 다음에 갈 곳이라면…….

잠시 생각하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