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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43화 (143/144)

#143화

“백작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응.”

“이것도요! 이거 엄청 맛있어요!”

“으응.”

“이것도!”

로레이나는 제 앞에 내밀어지는 음식을 족족 받아먹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단번에 로레이나의 정체를 알아본 메리와 한바탕 감동의 재회를 마친 후, 계속 이런 식이었다.

메리는 그동안 제가 모시던 이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 번에 해결하겠다는 듯 온갖 디저트를 다 늘여놓고 그녀에게 먹이고 있었다.

벌써 꽤 먹은 탓에 배가 불러 고통스럽긴 했지만, 로레이나는 즐거워서 웃음이 났다.

길버트 몰래 메리가 간식을 가져다주던 옛날이 생각나서.

레오나드 때문에 우울했던 마음이 싹……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사라졌다.

“메리, 나 이제 배불러서 못 먹겠어.”

“에이, 그래도 조금만 더…….”

“정말이야. 더 먹으면 진짜 탈 날 거 같은데?”

로레이나의 말에 메리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로레이나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다른 곳을 놔두고 아멜리오 백작가에 오기를 잘한 것 같았다.

“너무 내 옆에만 붙어있는 거 아니야? 메리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백작님이 제일 중요한걸요. 해야 할 일 따위…….”

“그렇지만 빨래가 저렇게 나뒹구는 건 조금 심각한 거 같은데?”

로레이나가 저만치에서 바닥에 구르고 있는 빨랫거리들을 가리켰다.

아까 로레이나를 알아본 메리가 내팽개친 것들이었다.

어느새 다시 더러워진 빨래들을 본 메리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거, 급한 거 아니야? 보아하니 수건들과 하녀들 옷 같은데.”

“……그, 그렇긴 한데요.”

로레이나와 빨래를 번갈아 보던 메리가 우물쭈물했다.

지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어지간하면 티를 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일이었다.

“그럼 어서 빨래하자. 내가 도와줄게.”

“네? 백작님이 무슨 빨래를 해요!”

소매를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레이나의 모습에 메리가 기겁하며 말렸다.

원래의 로레이나는 아멜리오 백작, 이 세계에 몇 남지 않은 이종족이었다.

지금은 로레이나가 인간이라고는 하나, 그녀가 메리에게 귀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괜찮아! 나 빨래 많이 해봤어.”

로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로레이나가 셀리아로 살아간 곳은 귀족가도 아닌 평범한 평민의 집이었다.

일반 평민치고는 나름 여유로운 집이라고는 하나, 빨래를 하는 하녀를 따로 둘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제 몫은 지금까지 직접 했다.

물론 메리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 돼요. 적어도 제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만…….”

“그냥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아니, 열도 높으시잖아! 왜 말 안 하셨어요?”

빨래 쪽으로 가려는 로레이나를 밀어내던 메리가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피부에 눈을 크게 떴다.

아까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정신이 없었던 터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로레이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눈은 힘이 없는 듯 살짝 풀려 있었고, 열이 점점 오르는 모양인지 볼이 불그스름했다.

“이, 이런 몸으로 뭘 돕는다고 그러세요! 어서 빨리 가서 쉬세요! 제가 방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거 없어. 나 혼자 갈게!”

로레이나가 괜찮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내저었다.

메리랑 있는 게 좋아서 지금껏 말을 안 하고 있었던 거지,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으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감기도 마법으로 치료가 되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외상이면 모를까, 마법으로는 이런 종류의 질병은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레오나드라면 또 모를까.

“나 정말 혼자 갈 수 있어! 가서 바로 쉴 테니까 메리는 일해! 예전에 내가 쓰던 방으로 가면 되는 거지?”

“……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마음이 안 놓인다는 듯 돌아보는 메리의 얼굴에 로레이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메리는 그러고도 한참을 물은 뒤에야 빨래를 가지러 뒤로 물러났다.

로레이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백작저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일이 늦어졌는데 더 고생시킬 수는 없지.’

많이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순간 이동까지 한 몸이다. 방까지 걸어가는 것쯤이야.

‘그나저나 여기는 그대로네.’

나름 갖출 것을 다 갖춘 홀에, 저 복도 쪽에 있는 다락방. 맛있는 냄새가 풍기던 부엌. 그리고 옛날 서적들이 가득한 서재까지.

‘……서재라.’

방으로 올라가려던 로레이나는 불쑥 든 생각에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말을 그렇게 하고 나오긴 했지만, 정말로 레오나드를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지금 꼴도 보기 싫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주를 풀 능력을 갖고도 계속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혹시 직접 접촉하지 않고도 저주를 풀 방법이 있으려나?’

지금까지 저주를 풀지 못했던 이유는, 레오나드와 접촉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제 몸에 대고 무언가 마법을 쓰려고 하는데, 레오나드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으음. 저기는 옛날 서적이 많았으니까 정말 관련 내용이 있을지도 몰라.’

레오나드의 일기장이 이 시간쯤도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래를 모르니까 이 고생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로레이나는 곧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메리가 이를 보면 난리를 치겠지만, 잠깐만 보고 나오면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로레이나를 안으로 들여보낸 메리는 재빨리 빨래를 주워 빨래터로 향하고 있었다.

빨리 일을 끝내야 다시 로레이나의 곁으로 갈 테니까.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 괜찮을지…….”

전처럼 신의 축복이 있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로레이나는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되었다. 서둘러 일을 끝내고 돌아가서 따뜻한 수프라도 가져다드려야겠다.

저런 몸으로 의원까지 가게 할 수는 없으니 의사도 부르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중, 메리는 앞을 가로막은 무언가에 부딪혀 뒤로 살짝 밀려났다.

하마터면 기껏 주운 빨래를 다시 바닥에 흘릴 뻔했다.

“도대체 뭐…….”

고개를 살짝 옆으로 내밀어 빨래 더미에서 시선을 돌린 메리의 눈에 제 앞을 가로막은 것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녀에게도 제법 익숙한 남자가.

“어?”

바보같이 멍하니 서 있는 메리를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초조하게, 애타는 얼굴로.

“로레이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 * *

“……흐음. 잘 안 보이네.”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꽤 뒤져 보았는데 마법의 ‘마’ 자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엘레노아, 그러니까 어머니의 서재에 옛날 서적이 많아서 혹시나 했는데.

대충 이론에 관련된 것만 몇 개 있을 뿐 내가 필요한 정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역시 직접 접촉하는 방법뿐인가…….”

하지만 레오나드가 허락할 리가 없는데.

어떻게 다시 얻은 삶인데 이렇게 기회를 날려버리게 생겼다.

“설마 나 죽을 때까지도 저러는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애써 불안감을 억눌렀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진짜 그러면 어떡하지?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레오나드가 저주를 풀지 않겠다고 하면?

아무리 제 후손을 위한 일이라고 한들 생명의 신이 또 기회를 줄까?

아마 안 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내게 기회를 준 것도 삶이 어그러진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했잖아.

‘이거 큰일 났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오나드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한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원하는 것은 없으니 메리가 돌아오기 전에 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어?’

서재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빛이 반사되는 탓에 실루엣만 보였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누구지? 백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메리와만 안면을 텄을 뿐, 아직 백작가에서 지내는 이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어느새 시녀장이 된 메리가 주변을 무른 덕분이었다.

백작가의 주인이 없는 이상, 메리가 여기서는 최고 권력자일 테니까.

‘뭐라고 하고 나가야 하지?’

아무래도 메리에게 말을 전달받지 못한 시종인 모양이었다.

이를 어쩐다. 여기서 내가 로레이나라고. 이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답할 수는 없는데.

‘설사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믿지도 않을 테고.’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지만, 잠시 뒤 나는 그것이 다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점점 빠르게 내게 다가오는 이는, 내가 여기서 볼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였으니까.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붉은 눈. 별이 뜬 밤하늘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런 외양의 가진 이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내가 아까까지 하던 생각의 주인공, 레오나드가 내 양어깨를 다급히 잡으며 물었다.

어쩐지 초조함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죽어?”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물었으나 레오나드는 뭐라 답할 정신이 없는 듯했다.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그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나는 그제야 내가 방금 뱉은 말에 대해 떠올렸다.

아, 맞다. 나 죽을 때까지도 저러는 거 아니냐고 했었지. 그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하도 급히 다가온 덕에 놀랄 타이밍도 놓쳤다. 나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왜 물어보냐니…….”

“막상 저주를 못 풀게 되니까 아쉬우신가요?”

말이 다소 뾰족하게 나갔다.

아무래도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면전에서 ‘너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껏 쌓아오던 의욕이 사라질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헨티슨 공작님이 말해주셨나요?”

일국의 황제에게 하는 것 치고는 건방진 태도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레오나드 역시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 눈이 나에게, 정확히는 내 머리칼에 꽂혀 있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말했다.

“……그냥, 너라면 여기 있을 것 같았어.”

“…….”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로레이나.”

“그냥 예상하신 거라고요? 참 대단…….”

다시 비꼬려던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잠깐만.

……방금 로레이나라고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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