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단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녀를 끌어안고 천천히 말했다.
“아셰.”
“…….”
“네가 내게 화를 낸 건 오늘이 처음이야. 너는 항상 가면을 쓰고 나를 대했어. 한 번도 진실을 모두 털어놓지 않았지. 널 억지로 가뒀다고 그놈한테 화를 내는 것조차도 부럽더군.”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원할지 몰라도 서로를 믿고 있지 않아. 그러니 네가 내게 3년 전에도 그런 말을 못한 거고, 나는 3년 내내 네 마음이 변할까 노심초사했겠지.”
“우린 처음부터 그렇게 맺어진 관계잖아. 교환하고, 대가를 주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가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 말했다.
“……네가 저놈을 믿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가 네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야. 너는 사실 저놈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 그 옛날, 네 궁에서 네가 내게 아무 대가 없이 사랑을 말한 것도 떠나는 마당에 내게 원하는 것이 없어서였겠지. 아셰, 너는…….”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바닷물 같아. 아무리 가져도, 아니, 몸을 섞을수록 더 커지는 공허감을 어쩌지 못해. 네가 아무리 나를 보고 웃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언제라도 우리 관계가 끝날까 봐 두려워. 쾌락에 달뜬 네 얼굴을 보고 아무리 사랑한다는 말을 시켜도…… 너는 언제나 내게 틈을 만들지.”
“……네 말대로, 서로 줄 것이 없는 사이에서나 믿을 수 있는 거야. 나도, 너도 지금은 스스로 궁을 떠났지만 그 끔찍한 곳에서 20년 가까이 자랐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니 어느새 감정이 차가워져, 그가 그녀를 잊지 못하도록 달콤한 유혹의 밤을 보내겠다던 다짐은 이미 사라진 채였다.
“사랑 같은 것에 모든 걸 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미 너와 나는 4년 전 그날 아메탄의 왕궁에서 도망쳐 이런 외딴 영지에서 소를 키우며 살았을 거야. 피차 알면서 사랑에 기대어 서로를 기다리라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지. 네가 하는 생각을 나는 안 할 것 같아? 네게 혼담이 쏟아질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는 안 불안했을 것 같아?”
“……그럼 넌 왜 나를 기다렸는데. 저 소영주의 방과 고작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방에서.”
그가 그녀의 몸에 올라타, 팔다리를 꼼짝 못 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도리어 차갑게 물었다.
“그럼 넌 왜 이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엔 나를 찾아오는데.”
“사랑하니까. 내가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그가 거칠게 입을 맞춰 왔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낱낱이 휘저었고, 집요하게 빨아들여 자극했다. 그의 이가 맞붙은 아랫입술이 얼얼했다. 숨이 막혀서 아셰가 그의 등을 퍽퍽 치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입술을 뗐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눈에 초점 없이 웃었다. 아, 대체 왜 이렇게 대화가 빙빙 겉돌고 있을까. 달빛에 그녀의 흐트러진 금발 머리가 빛나고, 내리깐 푸른 눈에 허탈함이 감돌았다.
그가 가만히 정적 속에서 그녀의 헛웃음을 듣고 있다가, 낮게 말했다.
“내가 황제,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를 죽이러 침소에 들어갔을 때…… 황제는 마약에 취해 있으면서도 거대한 힘으로 공격하고, 나는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마법으로 피해 다니기 급급했어. 단둘이 마주하는 전무후무한 기회였는데.”
그녀는 그의 품에서 옴짝달싹 못 하며 가만히 숨을 쉬었다. 아직도 창문 밖으로는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란스레 울려 퍼졌다.
“죽을 각오를 하고 황제에게 물었어.”
“…….”
“대체 왜…… 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냐고.”
그의 표정을 차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왜 어머니를 죽이고, 시녀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죽이고, 자꾸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냐고. 나는 진심으로 어린 시절부터 너무 궁금했거든.”
아셰는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 옛날, 비밀 하나에 비밀 하나로 갚기로 했지? 네가 끝까지 숨기려던, 나의 아이에 대해 말해 주었으니 나도 네게 끝까지 숨기려던 것을 말해 주지.”
이것도 4년 전, 그 작은 궁에서 서로 했던 약속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는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멈추지를 않는다더군. 그 생각을 멈추기 위해 마약을 하고, 미향을 피우고, 성을 새로 짓고, 온갖 술을 퍼부어도……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보다 허술하고 간단한 대답에, 그녀는 눈을 깜빡거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떨리는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물었지.”
“…….”
“배우자를 고를 때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를 말하면 참고하시겠다고.”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참담하여, 그녀는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세 가지를 신중하게 대답했더니 어머니는 웃으며, 그렇다면 세 가지를 모두 똑같이 만족하는 여자 둘이 있다고 했을 때 둘 중 그 세 가지 말고 어느 차이점이 있는 여자를 고를 것이냐고 물으셨는데.”
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그때에는 이렇게 정서적으로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 조건이 바로, 이성과 계산이 아닌 본능과 진심이 원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언제나 그 조건을 조심하라고. 그 앞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약해져 정신을 잃게 될 수 있다고 하셨지.”
아셰는 그동안 같은 질문을 세 번 했고, 그는 언제나 핑계를 대어 ‘다음번에’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얼마나 이상하고 어이없는 조건이기에 이토록 숨기나 싶어 이제는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열 살이었던 나는…… 아무 고민 없이 가볍게 대답했어. 어린 시절이었어도 내게는 너무 쉬운 질문이었으니까.”
“……이단…….”
“그 둘 중에, 생각이 멈추지 않는 여자를 택하겠다고.”
“…….”
“아셰.”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존재감이 이 방을 꽉 채우는 것만 같았다. 그가 무너지듯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네 생각이 멈추지 않아.”
그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버지는 미쳤어. 가장 가까이 있는 내가 잘 알아. 나는 그의 핏줄을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약속을 지키고, 서로 존중하고, 불필요한 살인은 하지 않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의 속삭임을 들었다.
“너를 지금이라도 내 막사에 가두고 싶지만……. 그때 나는 네가 왕궁에 남겠다고 하니 홀로 떠났고, 이곳이 좋다 하니 배를 돌렸어. 영주와 너를 이어 주자고 연설을 하던 그놈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지만 참았고, 네가 저 영주와 몸을 섞었을 수 있다고 상상했지만 그를 업고 침대에 순순히 내려놓기까지 했지.”
“…….”
“나는 아버지와 달라……. 어떻게든 미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언제나 네가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아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생각해. 이건 광기나 집착이 아니라 사랑일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와 처음 입을 맞춘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를 곁에 두고, 가두고, 갖고 싶었거든. 넌 나의 첫 욕망의 대상이었어. 마치 짐승이 처음 눈독들인 사냥감을 잊지 않듯이,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아셰는 본능적으로 그가 사랑을 말할 때마다 위협감을 느꼈다. 멀리까지 찾아온, 그토록 기다려 왔던 그가 막상 등장하자 대체 왜 로맨틱한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두려운지 궁금했다. 그 모든 것이 이런 비정상적인 광기에 기반하고 있다면……. 아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나를 무서워하고…… 또 징그럽다 여겨 떠날까 봐 말하지 못했지. 집착이나 광기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끝까지 너를 속이고, 나도 속이려고 했어.”
“…….”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네가 나를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아이까지 숨긴 거라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져.”
그가 천천히 일어나, 셔츠에 단추를 꿰어 입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남들이 나를 모두 미친 황제의 폭정에서 대륙을 구하는 남자라고 찬양해도, 넌 최선을 다해 나를 피해야 하는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어.”
아셰는 조금 전 자신이 벗겼던 옷을 입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대로 내가 영영 네 삶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면, 반지를 돌려줘. 어머니는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었고, 나는 내 핏줄에 흐르는 절반의 선한 영향력을 믿어야 해.”
아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반쯤은 충동적으로 그를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옷을 적셨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게 이 말을 했으니, 나는 끝없이 후회할 거야. 넌 내 아버지가 두려워 죽음을 무릅쓰고 친오라비를 죽였으니까. 네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네가 날 끔찍하게 여기지 않을까, 저 안전하고 건강한 남자에게 가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고…… 네가 내 곁에 와도 평생을 불안해하겠지. 내가 사랑을 말할 때마다 넌 광기라고 의심할까 봐 두려울 거야.”
“…….”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불안한 것은 더 싫으니.”
그의 담담한 말은 서럽게 아셰의 마음에 박혔다. 평생을 불안해할 것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불행을 감수하면서 그는 아셰에게 약점과 진심을 털어놓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제 광기가 자신을 가두고 해칠 수도 있다고. 저 가진 것이 없는 소영주에게 열등감마저 느끼는 표정으로.
“지금…… 지금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대체,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녀는 그에게 도저히 징그러우니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말할 수가 없다. 리젠의 말대로, 몸을 섞는 것 이후에 남은 감정들…… 어쩌지 못해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이 모든 알 수 없는 마음이 사랑이겠지. 그가 자신을 찾는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과 별개로 그녀는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네게 올 거야.”
그는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