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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64화 (64/112)

64화.

“열다섯,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네 생각이 멈추지 않았듯이 나는 평생을, 결국에는, 네게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너를 어떻게든 내 인생에 붙잡아 둘 거야. 그 과정에서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네가 결국엔 불행해질지도 몰라.”

“이단.”

그녀는 속삭였다. 결심한 이상 망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망설이지 않고 괜찮다고 해 주었다. 친오라비를 죽여도 괜찮다고, 잘한 거라고, 그대로 제국에 갔으면 황제의 손에 죽었을 거라고. 투정을 부리고 속상해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서 아무도 그녀에게 해 주지 않았던 말.

그리고 무엇보다, 샤틴조차 마시지 않았던 그녀의 차를 망설임 없이 마셔 주었던 남자였다.

“괜찮아.”

뒤조차 돌아보지 못하는 그의 잔뜩 굳어 있는 몸을 끌어안고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너도…… 내가 내 오라비를 죽인 여자여도 괜찮다고 해 줬잖아. 내 고국의 사람들 앞에서 내 편을 들어주었잖아.”

이런 말들로 갑자기 이 모든 감정들이 예쁜 사랑으로 포장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이와 복수를 떠나 진심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 모든 내적인 갈등을 억누르고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기에 해 줄 수 있는 말.

“따뜻하고 밝은 감정만 사랑이라는 법도 없잖아.”

10년 동안 그녀의 앞에서 숨겨 왔을 그 마음이 새삼 안타까워 그녀는 점점 더 열심히 말했다.

“나는…… 나는 괜찮아. 네가 조금 정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아니, 그 정상의 기준조차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약속을 지키면, 넌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지?”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더 꼭 끌어안았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자 생각이 쏟아졌다. 이 영지의 누구나 켄이 선량하고 좋은 남자라고 말했다. 물론 캐넌 사람으로서 그건 그녀도 인정했다. 그러나 켄이 정말로 이단보다 자신의 의견을 따라 준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널 이해한다는 말을 해 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있어. 넌 너를 잘 참잖아. 나를 여기에 두고, 켄을 죽이지 않고, 내게 끝까지 선택권을 주고.”

누구나 이단이 켄보다 더 위험한 남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그녀의 뜻에 모든 것을 따라 준 남자는 오히려 이단 아닐까.

“……온갖 기록을 다 봤어. 역대 황제들이 집착하던 여자들은 모두 다 끝이 안 좋았어.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비극을…….”

그녀는 꽉 잠긴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말을 빠르게 끊었다.

“난 네가 황제와 조금 닮았어도 괜찮아. 그런 게 두려운 거라면 신경 쓰지 마. 너도 내가 아메탄의 왕녀든 캐넌의 미망인이든 상관없다며. 너 역시 내게 황자도 아니고 총독도 아니고 그저 이단 엔리히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단이 무너지듯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해결은 되지 않아도 위안이 되겠지. 그 옛날 자신도 이단에게 위로받았듯이. 말조차 잇지 못하는 그를 그녀는 더 꽉 끌어안은 채 단숨에 말했다.

“널 사랑하고, 기다리고, 또 너와 결혼할게.”

그녀가 싱긋 웃으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이단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아셰는 재빨리 어조를 바꾸어 철없는 소녀처럼 종알거렸다.

“나는 여전히 네게 줄 것이 없어. 캐넌은 너무 가난한 영지고, 아메탄에서 가져온 것들은 모두 팔아 곡식으로 바꿨거든. 나의 어머니는 내게 빼앗아 가면 빼앗아 갔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새 치맛단을 잘라 줄게. 지금의 것은 너무 너덜거리고…… 사실 좀 비위생적인 것 같아.”

그녀는 혼자 이어 가고 있는 발랄한 어조를 바꾸지 않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조금 필사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이런 무거운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3년 동안 세탁은 했니?”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풋, 하고 웃었다. 별로 재미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긴장을 풀어 상황을 가볍게 만들고 싶다는 아셰의 시도가 귀여웠는지 그는 오랫동안 작게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 즈음 그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그녀의 팔을 감싸며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아셰.”

“……왜.”

“햇살이 좋으면 너와 산책을 하고…….”

그녀는 그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았다.

“같이 살며 식사를 함께 하고…… 언덕을 오르며…….”

그가 테이블을 짚으며 우울하게 말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웃고…… 가끔은 사냥도 나가고…… 나는 그러고 싶어.”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쓸쓸함에 동요되어 살짝 슬퍼졌다.

“욕망을 어쩌지 못하고 너를 짐승처럼 안는 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는 아냐. 이런 것밖에 못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도 정상적으로 너와 지내고 싶어. 저 영주처럼.”

그의 침울한 말이 이어졌다.

“네가 아이를 잃어서 슬프고 힘들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나를…… 나를 이해해 줘. 나는 내 아이가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어. 네가 기대한 만큼 분노해 주는 척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래 봤자 불신만 더 늘겠지.”

“……알았어.”

“나는 아이를 죽인 것이 네 오라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거야.”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아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숨죽여 물었다.

“그래? 왜?”

“첫째, 네가 철저히 숨겼을 임신을 알고 있으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이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미 아이를 죽인 배후를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내게 원한이 있지. 그는 내게 자비를 베풀었는데, 정작 나는 아메니티를 그렇게 들쑤시고 도주했으니. 네가 내 아이를 밴 것을 알았다면 나를 찢어 죽이고 싶어 했을걸. 그 분노가 아이에게 갈 수도 있을 테고.”

“다니엘은 그럴 사람이 아냐.”

“말하면서도 알겠지? 너는 친오라비를 독살할 사람이었는지.”

사실 그녀 역시 배후를 홀로 추적할 때 다니엘을 떠올렸기 때문에, 더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셋째, 그 아이의 존재를 황제가 알게 된다면 너는 그대로 죽었을 거야. 네 오라비는 아이를 없애는 게 너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지.”

“그랬다면 아메탄 왕궁에서 아이를 없앴을 거야. 이렇게 번거롭게 나를 보내지 않고.”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 막상 네가 눈앞에 없으니 마음먹기 쉬웠을 수 있고.”

그가 뒤를 돌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라고 분노하지 않는 게 아냐. 하지만 나는 나를 잘 알아. 나 역시 네가 연관된 일에는 내가 무서우니까…….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면 애초에 알지 못하는 게 나아. 말했잖아. 내가 처음에 아이에 대해 묻지 않았던 건 정말로 상관이 없어서가 아니라, 저 자식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어.”

이단이 낮게 속삭였다.

“배후가 네 오라비일 때에, 혹시라도 내가 참지 못하고 그를 죽이면 너와 나의 관계가 이상해질까 봐, 그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묻고 가겠다는 거야. 나는 네가 최우선이야.”

그녀는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가만히 앉아 그에게 사브르를 죽이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모르는 새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녀가 직접 행할 것이었다. 대륙의 역사가 달린 그의 길을 방해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건 모두 도운 뒤에.

지금은 사브르가 없다면 이단이 패배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이단이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다니엘도 죽일까 봐 겁난다는 그가 진실을 알면 즉시 사브르를 죽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단은 대륙의 역사를 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녀는 문득 그들을 둘러싼 시대가 서러워졌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가 시대의 희생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일 단순히 시대의 희생이라고 생각했다면 이토록 복수심에 이를 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악의가 없는 행동에 대한 결과는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윌리엄을 독살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궁에 돌던 소문대로 소름끼치도록 독한 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를 고발한 리젠도 그 마음을 알아서 받아들였고, 켄이 자신과 합의 없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선언해 버렸지만 그 마음을 짐작했기 때문에 고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연히 그 애를 죽인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름도 못 붙였어.”

그녀는 그를 붙잡고 숨죽여 울었다.

“……첫 숨도 못 내쉬고, 내 품에 안아 보지도 못 했어…….”

“아셰.”

그동안 참아 왔던 모든 슬픔이 터져 나와, 그녀는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을 떨며 울었다. 어쩌면 이단 앞에서 그 아이의 얘기를 꺼내지 못한 것은, 너무나 약한 자신의 진심을 들켜 복수의 기회마저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직접 옷을 지어 주려고 했어…….”

“…….”

“이 방에 아이 침대를 놓을 곳까지 생각했어. 켄은 아주 일찍부터 아이는 추위에 약하다며 가죽을 모았어. 숙부님은 오랜만에 아이 웃는 소리를 듣겠다며 웃으셨고……. 너는, 너는 몰라.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다를 건너왔는지 너는 아무것도 몰라…….”

“미안…… 미안해.”

숨도 못 쉬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 내는 아셰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몰라서 미안……. 너 혼자,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서 미안…….”

“그 아이가 사라졌을 때 이 방이 얼마나 넓게 느껴졌는지, 새로 맞춘 커다란 치마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심정이 어땠는지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내가 놓친 많은 시간들이…… 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괴로워.”

그의 목소리에 슬픔이 짙게 묻어났다.

“함께 이름을 지어 주고, 첫 숨을 내쉴 때까지 내 목숨을 걸고 너와 아이를 지키며, 대륙에서 가장 튼튼한 아이 침대를 네 곁에 두고, 온갖 좋은 것들로 창고를 채웠다면…… 그럴 수만 있었다면…… 남들에게는 당연한 그 시간들을…… 우리가 함께 할 수만 있었다면…….”

그가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고 말했다. 그가 고개를 묻은 곳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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