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리-65화 (65/112)

65화.

“……몰라서 미안해…….”

몇 년 동안 참았던 그녀의 눈물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이단 몰래 혼자서 키우겠다고, 자신만의 아이라고 생각하여 바다를 건넜어도…… 아무리 켄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었어도……. 심지어는 아이가 이단이 아닌 켄을 닮았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고 해도…… 어쨌든 아이의 아버지는 이단이었고, 아이를 잃고 나서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은 이단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절망을 느끼고 삶의 밑바닥에서 헤맬 때에 그녀를 붙잡아 줄 수 있었던 사람은 결국엔 지금 그녀의 앞에 선 이 남자였다. 켄과 에곤이 아무리 그녀를 위로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이단뿐이었다. 그동안은 그저 이성이 그녀의 유약함을 찍어 누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울면서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감정과 상황이 얽혀서 진심이 흐릿해졌다 생각했는데, 정말로 이단에게 초연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가 어떤 모습이라고 해도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의 등을 쓸어 주다가,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널 사랑해.”

“…….”

“한 번만 내게 다시 기회를 줘. 그 어떤 아셰 아메탄이라고 해도 좋아. 내 곁에 있어 줘. 내가 너와 앞으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우리의 아이를 지킬 수 있도록. 제발.”

그러나 아침이 오기 전에 그는 또 떠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네게 무릎 꿇고 사정하고 싶어. 아무리 네 자유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나는 이제 너를 정말 못 보내 줄 것 같으니까.”

그녀를 끌어안은 이 뜨거운 체온만을 남기고.

켄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리트와가 그의 부은 다리에서 피를 뽑고 각목을 덧대어 붕대를 감은 뒤 알맞은 목발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켄은 흐릿한 기억에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리트와가 면목이 없다는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마님이 응급 처치를 잘 해 두어, 다리가 잘릴 뻔한 위기는 넘겼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부상을 입으면…… 최대한 빠르게 의원에게 보여야 합니다.”

켄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이마를 짚었다. 일단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멀쩡하게 누워 있는지도 궁금했거니와, 리트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걷기에 불편하실 겁니다. 회복될 때까지 목발을 짚으시고, 약을 처방해 둘 테니 끼니마다 꼬박꼬박 챙겨 드시지요.”

리트와는 켄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안경을 쓰고 머리가 꽤 벗겨진 50대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마을을……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날 술에 너무 많이 취했고…… 하루 종일 사람들이 저를 작은 마님에 비교하며 괴롭혀서…….”

“의원의 덕목 중 하나가 비밀 유지 아니던가요.”

켄은 조용히 말했다.

“의원이 비밀을 부탁받은 진료 사실을 술에 취해 떠벌린다면, 누가 그 의원을 믿고 병을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켄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집사인 벤이 간단한 끼니를 들고 들어오려다가, 리트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치료가 안 끝났습니까?”

벤의 뒤로 화리트 형제와 에타, 그리고 마굿간지기 후퍼까지 보였다. 모두 그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푹 주무셨으니 됐습니다.”

“지금 몇 시죠?”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작은 마님이 어제 진통제와 수면제를 먹이고 재웠다던데, 과연 세상모르고 주무시더군요.”

그는 바보가 된 것 같아 눈을 깜빡였다. 분명 성문 앞에서 괴한에게 공격을 당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가 차분하게 물었다.

“다 언제 들어오셨어요?”

“어제 새벽이지요. 동이 틀 때까지 먹고 마셔서, 저희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셰는?”

“난 멀쩡해.”

맞은편 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아셰가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명랑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제와 다른 옅은 푸른색의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벽에 기대어 말했다. 어차피 다섯 명의 하인들이 문을 가득 막고 서 있었기 때문에 방 안은 보이지 않았다.

“널 부축하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널 눕히고, 응급 처치를 하고, 수면제와 진통제를 먹였던 건 기억나지? 넌 그대로 곯아떨어졌고, 난 그길로 내 방에 들어와 쉬었어. 아, 밖이 너무 시끄러워 잠이 오지 않아 주방에서 술 두 잔 정도를 데워 마셨어요. 괜찮지, 에타?”

“열두 잔을 드셔도 됩니다. 빌어먹을 양고기도 드시지 그러셨어요?”

“안 그래도 오늘 점심을 차려 줄 것 같지 않기에, 이미 혼자 데워 먹었어.”

아셰의 말에 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거짓말에 능숙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저렇게 자세하게 얘기하는 것을 봐서 어제 그가 괴한에게 공격당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다리만 다치지 않았어도 그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의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나중에 아셰와 단둘이 있을 때 묻기로 한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치료는 끝났고, 나는 괜찮아. 다들 나가 보세요.”

“괜찮은 거 맞아요?”

화리트가 킬킬대며 물었다.

“리트와는 돌팔이…….”

켄이 미간을 찌푸리자, 화리트는 즉시 입을 다물었지만 뒤에서 벤이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오히려 잘 됐습니다. 한 번은 터트려야 할 일이었지요. 아무 일도 없는데 뒤에서 수군대는 것보다야 백번 낫습니다.”

에타 역시 팔짱을 끼고 말했다.

“저희는 해가 지면 2층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뭐, 참고하시고요.”

“영주님,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가요, 다들.”

아셰가 짜증을 내며 뒤에서 소리쳤다. 다섯 명의 하인들이 일제히 키득거리며 슬금슬금 방을 나가기 시작하자, 바들바들 떨고 있던 리트와가 그대로 그녀의 발밑에 엎드렸다.

“마, 마님…… 죄송합니다. 제가 미쳤나 봐요…… 술도 너무 많이 취하고…….”

“…….”

그녀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님이…… 저랑 얼마나 친했는데…… 제게 정말 잘해 주셨는데……. 아마도 제가 술에 취해 정말 미쳤나 봅니다…….”

“리트와 씨, 일어나세요.”

“영주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마을을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겠습니다.”

그녀가 켄을 바라보았다. 켄은 그녀의 파란색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네가 결정해.”

“제가…… 제가 정말 미쳤나 봅니다……. 마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다섯 명의 하인들은 자신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서로의 얼굴을 민망하게 바라보다가 우르르 계단을 내려갔다. 아셰는 여전히 그녀의 발밑에 엎드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 달라는 부탁의 엎드림이 아니라, 진정한 사죄의 엎드림이라는 것을 알아챈 그녀가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켄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해해요.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이 외진 곳에서 30년간 최선을 다하신 것도 알아요. 당연히 의원도 아닌, 이곳에 온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외국인에게 의원을 넘기라고 하니 배신감이 들었겠지요. 하루 종일 영지 사람들이 너무하긴 했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의원을 넘기라는 건 진심은 아니고 농담이었을 거예요. 너무 오랜 시간 친하고 편하게 지냈으니까요. 그래도 리트와 씨가 화가 나신 건 인간이라면 당연해요.”

“그, 그렇지요……. 마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3년 동안, 리트와 씨는 단 한 번도 저에게조차 그날 밤 일을 언급하신 일이 없지요. 대륙 어디를 가나 의원의 덕목은 비슷하니까요. 환자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은 철저히 잊는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게 배신감이 엄청나시겠지요.”

“리트와 씨는 일부러 말한 것도 아니고, 의원으로서의 윤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쫓겨 술김과 홧김에 말한 것뿐이에요. 리트와 씨가 아닌 그 어떤 인간이라도 그럴 수 있지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하자, 리트와는 왠지 부끄러워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서늘하고 냉정한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래서, 아메탄 왕국에서는 의료국의 윤리를 바로 세우기 이전에 왕족을 비밀리에 치료한 의원들을 모두 죽였다고 들었어요. 의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상황을 믿지 못해서요. 저는 배신감 같은 건 들지 않아요. 이 사건을 초래한 건 리트와 씨가 아니라, 리트와 씨를 그때 죽이지 못한 저의 무능력 때문이니까.”

켄은 끼어들지 않은 채, 가만히 그녀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밝게 웃으며 망아지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던 시골 처녀의 얼굴이 아닌, 냉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내는 것에 익숙한 왕족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평범한 옷을 입고 있어도 본성은 숨길 수 없었다. 켄은 그녀가 이곳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나는 의원이 아니고, 켄의 다리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영지에 당신뿐이죠. 내가 자비를 베풀어 당신을 영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캐넌의 의원이 당신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용서하는 것뿐이에요. 만일 이곳이 아메탄이었다면 당신이 제게 빌어야 할 사죄의 대가는 추방이 아니라 목숨이었을 겁니다. 기껏 생각한 게 추방이라니, 이 영지는 얼마나 평화로운지.”

그녀가 차갑게 웃었다. 짧은 웃음소리가 났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리트와는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캐넌에 애정을 갖고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포도열도 모르는 의원이지만 캐넌에는 당신이 필요하니까. 치료가 다 끝났으면 이만 가 보시고요.”

리트와는 떨면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성을 빠져 나갔다. 켄은 아주 다른 사람을 본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박한 그의 방에 놓여 있는 침대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아셰는 팔짱을 끼고 한동안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찬찬히 그의 방문을 닫으려고 다가왔다.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옆의 종을 치고. 최대한 움직이지 마.”

그녀가 그의 방문을 닫으려는 때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셰.”

“……응?”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게 왕족의 방식이야?”

“…….”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