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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66화 (66/112)

66화.

“비밀을 말할까 봐 그 전에 죽이고, 비밀을 말하면 죽이고. 그리고 그 사실로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그게 너희 나라 왕족의 방식이야?”

“……두려움이 없으면 통제할 수 없어. 네 양어머니를 사랑하는 표정조차 주민들에게 숨기지 못하는 네가 배울 만한 방식은 아니지만.”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지만, 타인을 통치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약점을 어떻게든 숨겨야 해. 역으로 인간의 입을 가장 빠르게 다물게 하는 건 제 약점에 대한 두려움이지.”

“아버님은 영주민들과 융화되어 자연스럽게 소통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어.”

“캐넌 같은 작은 영지에는 그게 맞을 수도 있지. 그러니 어젯밤, 양어머니를 범했다는데도 네 영주민들이 모두 네 편을 들고 나서지 않았니. 하지만.”

아셰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날 밤, 리트와에게, 이 일을 조금이라도 발설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부터 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하, 참. 추방이라니. 자신이 생각한 가장 가혹한 벌이 그거야? 네가 얼마나 무른 영주인지는 그것만 보면 알 수 있어.”

“…….”

“물론, 두려움이 통치의 전부는 아니야. 누가 뭐래도 너는 훌륭한 영주니까. 누군가의 위에 선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왕관을 쓴 자는 그래서 외로운 법이야. 두려움과 친근함, 강인함과 부드러움, 권위와 소통 사이에서 힘든 외줄을 타야 하니까.”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원래 두려움과 자비로움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두려움이 권위를 세우는 데에 정답이라고 생각했어. 이 정도로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내가 예전에 귀족 영애들에게 화를 냈던 걸 봤더라면 너는 내게 말도 안 걸겠구나. 네가 부족하다고 하는 건 아냐, 이곳에서 생각이 좀 바뀌었으니까. 이건 진심이야.”

“……뭐가?”

“양어머니를 범하고 그 아이를 지운, 심지어 청소부의 아들인 사람을 변함없이 영주로 섬기고 그 행복을 빌어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그걸 너는 해낸 거야. 이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과 공포 정치 하나 없이.”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럼 쉬어.”

정말로 문을 닫으려는 그녀에게 켄이 급히 말했다.

“……그 남자지?”

“…….”

“네가 기다린다던 그 남자.”

“…….”

“다리가 다쳤다고 해도 나는 영주에서 가장 빠르고 싸움을 잘해. 그렇게 한 번에 뻗은 걸 보면 전문적인 훈련을 오랫동안 받은 남자고,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으려면 상당히 높은 신분이어야 하겠지. 그 남자가 걸친 후드도 아주 좋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어.”

“……추론 능력이 많이 늘었네.”

“너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절대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거지?”

“…….”

“나도 끊임없이 생각했어. 너는 고귀한 혈통의 왕족이고, 나는 무식한 청소부의 아들이지. 혹시 그 사실을 잊고 내가 너무 과분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있어?”

“내가 청소부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두려움과 친근함 사이에서 줄을 타지 않는 사람이라서.”

아셰는 조용히 침묵했다. 뭐라고 대답할지 말을 고르기 어려웠다.

“무언가를 숨기는 법에 능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켄.”

“협박을 할 줄 모르는 무른 남자라서.”

그녀는 방문을 닫고, 그 방문에 기대어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켄, 물론 네가 완벽한 남자라는 건 아냐. 너 역시 내가 연관되면 이성을 좀 잃는 것 같아. 악의가 없는 것 같아 그동안 별달리 문제 삼지 않았지만.”

방 안에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너와 같은 남자를 꿈꿔 왔어. 난 어젯밤 사람들 앞에서의 네 거짓말에, 아니라고 하지도 못할 만큼 이기적이라…….”

괜한 희망을 줄까 봐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그녀는 한숨을 섞어 독백하듯 말했다.

“사랑이나 행복같이 따뜻한 건 내게 애초부터 멀리 있던 단어고, 네 그늘 안에서 어영부영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았어.”

그녀가 정말로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더라면, 켄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왜곡된 내면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켄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복 오빠를 독살한 끔찍하고 어두운 삶이 내 인생의 본질이고, 그 남자와 나 사이에는 그 어두움과 어울리는……. 아예 다른 종류의 감정이 삶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

그녀는 켄의 방문에 기대어 그녀의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밤에 이단이 미친 듯이 그녀를 안았던 순간과, 그녀가 오열을 하며 안겨 울었던 순간의 잔상이 눈에 훤했다.

“고백할게, 켄.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난 네게 감정적으로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고 그래서 실망할 것도 없었어. 왜냐하면 나는 정말 오래 전부터, 이미 그 남자와 진흙탕 속에서 얽혀 있었거든.”

제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아셰는 한동안 그대로 그의 방문에 기대어 있었다.

“나도 완벽하지 않은데, 네가 부족하다 하여 트집을 잡아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냐.”

그녀가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켄, 이제 정말로 나를 놓는 게 좋겠어.”

어젯밤 그녀를 감싸겠다고 자신을 희생하며 거짓을 말한 그에게 너무나 잔인한 말이었지만, 아셰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당연히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녀는 애초에 그런 희생을 그에게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어제 그렇게 울었는데도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날 위해 많은 것을 해 준 네게 좋은 말을 해 주고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 따위야 내게 어려운 일은 아냐. 믿을 수 없겠지만 너랑 몸을 섞는 것도 난 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그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야.”

어젯밤 그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감싸던, 오로지 켄만을 위한 눈물이었다.

“부탁이야. 나를 놔.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내 친오빠에게도 이렇게 진심으로 조언을 한 적이 없어.”

여전히 방문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녀는 노을이 내려 앉아 그녀의 침대 시트까지 붉게 물들일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방문에 기대어 있었다.

* * *

캐넌은 소식이 느렸다. 폴라리아 점령 후 1년이 지나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아셰는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사람들마다 말이 너무 심하게 달랐다. 정확한 것은 캐넌의 영주인 켄에게 직접 내려오는 군주의 정식 문서일 터였지만 양자 허가증도 5년 만에 나오는 판에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었다.

“켄, 나 말 한 필만 빌려줘.”

아침 식사 중 찾아온 그녀를 반색하며 에타가 식사부터 하라고 이끌었다. 1년 전부터 아셰는 성에서 나와 아스의 언덕에 새롭게 지은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벽돌집은 혼자 살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처음에 그녀가 다른 집들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창틀에 알록달록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말을 탈 줄은 알아?”

아셰는 익숙하게 화리트의 앞에 앉아 에타가 구워 온 따뜻한 빵을 베어 물었다. 마굿간지기 후퍼가 뒤통수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마님, 순하고 작은 말은 없어요. 차라리 노새는 어떻습니까?”

“노새는 느리잖아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맞은편의 후퍼에게 말했다. 처음 이 성에 왔을 때는, 하인들과 다 같이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에 몹시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식사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아셰는 캐넌에 적응했다.

“전쟁 소식을 듣고 싶은 거라면, 조금만 기다려. 지금도 사람들이 충분히 얘기해 주고 있어.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있으니 곧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공통적인 건 결국 혁명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밖에 없잖아.”

그녀가 산양유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말했다. 형 화리트가 끼어들었다.

“이단 임시 총독이 폴라리아 대전투에서 황제와 1황자의 목을 그었답니다. 그가 울면서 말했다는군요. ‘아버님, 이제 제가 황제입니다.’”

동생 화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이단 임시 총독은 황제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던데. 마법으로 모두 날려 버렸대요.”

“나는 반대로 들었어.”

후퍼가 말했다.

“황제가 이단 임시 총독과 함께 자살했대. 황궁에서.”

“제가 들은 말과 다른데요. 리한 카드민이 황제를 죽이고 이단 임시 총독과 마지막 결투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누가 이겼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고요.”

뜬소문에 불과할지라도 이단의 죽음을 듣는 건 불쾌한 일이라 아셰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표정을 지우고 지금의 상황을 보라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켄을 바라보았다. 켄은 헛기침을 하고 포크를 내려놓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이 성의 모든 것에 대하여 너는 나와 같은 권리가 있어. 내게 빌려 달라고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말을 타고 어디에 갈 셈인데?”

“수도.”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도 정보가 가장 많겠지.”

“정보는 여기에도 많아. 정확하지 않아서 문제지.”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하기야 워낙 작은 리스 공국이니 수도나 캐넌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거였다. 여전히 그녀의 눈에 리스 공국은 너무나도 후진국이었다. 문서의 행정 처리는 끔찍하게 느리고, 모든 학문이 뒤떨어지며, 마법구도 몇 개 없어 성에서조차도 밤에는 촛불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배를 좀 쓸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아니더라도, 가장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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