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화리트 씨를 데려가. 어쩌면 네가 아메탄에서 가져오는 정보가 수도에서 내려오는 공문보다 더 빠를 수도 있겠군. 전쟁은 확실히 끝난 게 맞는지도 좀 알아 와.”
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셰가 식사를 끝내고 에타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다시 오겠다며 뛰쳐나간 후, 집사인 벤이 한숨을 쉬며 혼자 남아 생각에 잠긴 켄에게 말했다.
“전쟁은 확실히 끝난 게 맞지요.”
“……그렇죠.”
“전사자 명단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니까 이렇게 혼담이 쏟아지는 것 아닙니까. 보통 거의 다 남편을 전쟁에서 잃은 여자들이더군요……. 새로운 공화국에서 작게나마 전쟁의 비극을 보상한다며, 한 달 안에 영주가 혼인을 올리면 지참금까지 지원한다던데요.”
벤은 구석에 쌓여 있던 양피지 한 무더기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1년 전 영지를 뒤흔든 그 사건 이후 켄에게 쏟아지던 혼담은 잠시 멈췄다. 캐넌 영지는 외지고 가난한데다가 성도 작았다. 늙은 영주가 끝까지 친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스물다섯에 후계자로 간택 받은 청소부의 아들은 심지어 한 살 어린 양어머니를 겁탈하고 낙태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켄의 외모가 훌륭하고 혼기가 꽉 찼어도 캐넌에 딸을 보낼 영주는 없었다. 그를 힐끔거리던 영지의 아가씨들도, 아셰가 멀쩡하게 영지에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감히 그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켄과 아셰의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고 난 뒤, 영지의 주민들은 그들 둘의 행복을 빌어 준다며 남들의 시선이야 개에게나 던져 주라고 했지만 아셰는 조용히 성을 나가는 것을 택했다. 처음엔 길길이 뛰던 사람들도, 점차 시간이 지나자 그 관계의 복잡함을 인정하고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 1년 만에, 전쟁이 끝나자 켄에게 혼담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주님.”
벤은 천천히 말했다.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 영주님의 의무입니다.”
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혼담이 들어오더라도 격이 떨어지고 난폭한 여자가 들어올 수도 있지요. 영지의 안주인 자리는 중요합니다. 미망인들의 마음이 급해 선택지가 많을 때 얼른 골라야 합니다.”
“……예.”
“여자는 여자가 안다고, 작은 마님께 부탁드릴까요? 분명 현명하게 잘 고르실 겁니다.”
“아닙니다.”
켄은 다소 슬픔이 배어 있는 녹색 눈을 들어 웃었다.
“제가 그러고 싶지 않군요. 최대한 빠르게, 제가 결정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메탄은 3년 전 다니엘의 결혼식이 있었을 때 아주 잠깐 방문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아메니티는 신세계처럼 변해 있었다. 항구에서 리젠이 아이를 안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가 밝게 웃었다.
“왕녀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와! 얘가 엘라구나! 반가워, 아빠를 많이 닮았네.”
검은 머리의 작은 여자아이를 어르며 아셰는 폴짝 뛰어내렸다. 화리트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배를 대러 다른 곳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2년 전인가요, 제가 캐넌에 놀러 갔던 게?”
“거의 4년 전이야. 네가 그 다음 해에 임신했잖아. 그 해에 다니엘의 결혼식 때문에 내가 왔었고.”
“점점 기억력이 떨어지나 봐요. 큰일인데요.”
리젠이 착잡하게 말했다. 아셰는 그녀를 따라 거리를 걸으며 신기한 듯 주위를 살폈다.
“있잖아, 캐넌은 내가 오고 나서 한결같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거든. 여전히 촛불을 쓴단 말이지? 그런데 이곳은 거의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아.”
“제가 냉정하게 분석하자면…….”
리젠은 한숨을 쉬었다.
“캐넌은 마법이 발달하지 않아서, 마력이 떨어져도 별 영향이 없으니 변화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아메니티는 마법 기반 도시였기 때문에 마력이 떨어지면서 급격한 변화가 필요했고요. 저희가 캐넌처럼 다시 촛불을 켜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익숙해지면 뭐, 나쁘지는 않은데.”
아셰는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리젠은 아이를 안은 채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캐넌에서는 마력의 흐름을 살필 필요도 없었지요?”
“그, 그렇지?”
아셰가 민망한 듯 말했다. 실제로 캐넌에서는 마법 아이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력의 흐름이야 잊고 살았다. 이단이 말했듯이 마력은 공기 같은 것이어서, 정신을 집중해 흐름을 살피지 않으면 그새 잊을 수밖에 없었다. 리젠의 손바닥에 아주 작은 불이 붙었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마력이 이 정도로 줄었답니다. 왕녀님, 저는 가끔 마법사들이 왜 그렇게 마력증폭약에 목을 매달았는지 알 것 같아요. 제가 마법이 선택과목이었던 것은 아시지요?”
“마법 과목에서 늘 1등을 했던 것도 알지.”
“지난 2년간 마력은 정말 미친 듯이 줄었어요. 그동안 줄어 왔던 변화 폭보다 훨씬 더. 5년 전만 해도, 저는 동굴 하나 정도 밝힐 불빛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는데…… 마법을 잘하던 사람들은 지금 저와 같은 무력감에 휩싸여 있어요.”
“카이든도 의기소침하겠네?”
“수사국이야 더하죠.”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이브나 왕비님의 고대마법이 수사국 비기로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마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편이기는 해요. 곧 고대마법만 남게 될 것이라는 게 주류 의견이죠. 그조차 서서히 사라질 날이 결국엔 오겠지만. 정보국에서는 고대마법이라고 해도 아마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사라질 거라고 예측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아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00년 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은 허물어지고, 다시 그 옛날로 회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마력의 감소는 자연 재해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라지만.”
마력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엔리히 황조도 지저분하게 끝나고 있다던 이단의 말이 떠올랐다. 이단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정말 엔리히 황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리젠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거대한 기계의 스위치를 눌렀는데, 집이 환하게 밝아져서 아셰는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마법 아이템은 아닌데.”
“전등이라고, 기술국에서 개발해 냈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카이든과 제가 사는 집에 전기용품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워낙에 마력이 없어져서 말이에요. 하지만 저 기계는 너무 커서 집이 너무 좁아졌어요.”
각종 거대한 전기용품이 들어와 있어 가용할 수 있는 면적이 좁은데다가, 리젠의 정리 정돈을 못하는 성격과 아이의 장난감까지 가세하여 리젠의 집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아셰는 어떻게 식탁 앞 의자에 자리를 찾아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미리 여관을 예약해 두라고 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리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나마 아메니티니까 이 정도 생활이 유지가 가능한 거예요. 아메니티를 벗어나면……. 왕녀님, 다들 캐넌 영지같이 살고 있어요. 밤에는 촛불을 켜고, 화덕에 요리를 하고, 직접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어요. 기술국에서 아무리 기계를 만들어 내도 가격이 너무 비싸고 집에 두기에는 너무 커요.”
“그래서…….”
아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소식이 이렇게 느리구나. 리스의 행정은 정말 끔찍하거든.”
“네. 모든 연락 체계가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편지도 사람이 직접 배달하는 시대잖아요. 특히나 제국, 아니 이제 공화국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는 영토도 넓은데다가 행정구역도 다시 배치해야 하고,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하니 대혼란일 거예요. 다니엘 전하가 발 빠르게 대처한 아메니티가 이 정도이면…….”
“내가 왜 왔는지는 알지?”
그녀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그녀는 애초에 전기니 마법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리젠은 살짝 웃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의 웃음에 그녀는 드디어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캐넌에 돌던 백 가지도 넘는 소문들 중에서는 이단의 죽음을 확신하는 내용도 많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단이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 싶어 그녀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몇 년 전 리젠이 캐넌에 놀러 왔을 때, 아셰는 리젠에게 자신이 이단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단이 자신에게 청혼할 것이라고 했다는 내용까지 말했었다. 왕궁의 비밀 통로와 한 달간의 밀회 이야기를 듣던 리젠은 아셰의 차 우리는 솜씨가 사달을 낼 줄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런 식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다.
“이미 어젯밤에 카이든에게 열심히 졸랐죠. 뭐 하나라도 더 얘기해 내라고 말이에요. 뭐가 제일 궁금하세요?”
“이단은 살아 있어?”
“당연하죠. 1황자와 황제를 직접 쏘아 죽였답니다.”
“……쏘아 죽였다고?”
“예. 총으로요.”
아셰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이라면 스타람에서 만들었다는, 누르기만 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무기일 것이다. 그런 소문은 캐넌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제일 비슷한 거라고는 화리트가 말하던 목을 그었다는 말이었다.
“설마 마지막에, ‘아버님, 제가 이제 황제입니다’라며 울지는 않았겠지?”
“그렇게까지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근데 확실히 아닌 건 맞아요. 황제가 아니라 투표에 따라 통령에 오른다고 했으니까요.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열셋의 장군들 간에 투표가 이루어졌고, 단일 후보로서 만장일치로 통령 자리에 올랐대요.”
“아.”
아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인데 현실감이 없었다.
“폴라리아에서 마지막 전투가 이루어졌기에, 폴라리아 공화국이라고 명명한다고 들었어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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