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리-68화 (68/112)

68화.

“국명까지 전해졌어? 그런데 왜 캐넌에 아무런 공문이 안 왔을까.”

“아직 국경이 정해지지 않았거든요. 이단 통령이 참 대단한 게, 공화정이 싫은 영지는 왕국을 세우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했대요. 뭐든지 억지로 강요하는 건 공화정의 정신이 아니라나.”

“……황제와 싸우긴 했지만, 정말로 공화정을 선택한 영지끼리만 연합하겠다는 뜻이구나. 하지만 그런 건 쉽지 않을 텐데. 정복자의 자비는 언제나 문제를 만드는 법이야.”

리젠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조심스럽게 웃었다.

“글쎄요. 이단 통령은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자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요?”

해방자라니. 아셰는 리젠이 단 한 번도 이단을 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국경 정리가 전혀 안 되고 있어요. 또, 영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도 모두 달라요. 통령이 아무리 제국군에 협력했어도 공화주의자라면 폴라리아 공화국에 망명하라고 했대요. 그렇게 큰 땅에 공화정이 세워졌으니 모든 것이 처음이에요. 마력이 거의 사라져 마법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사람이 다 처리해야 하니 일이 보통이 아닐걸요. 아마…….”

리젠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지요. 국경을 정리하고, 체제를 정비하고, 위계를 세우고, 법을 제정해야 해요. 왕정이 아니니 통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회의로 결정해야 하고, 그러면 시간은 배로 들어요.”

“가장 힘들고, 바쁠 때라는 거지.”

아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젠의 의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약속대로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바로 데려오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리젠, 그리고…….”

이단의 생사를 확인했다면, 그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눈치가 빠른 리젠이 신중하게 말했다.

“사브르 키렐은 여전히 이단 통령이 가장 가깝게 두는 정보원이자, 개국공신임을 인정받아 우스터 영지의 영주에 올랐어요. 아, 우스터는 황제가 파괴한 황무지인데 스타람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스타람인들이 머물기로 했어요. 즉 사브르 역시 투표권을 가진 영주라는 뜻이죠. 폴라리아 공화국의 새로운 체계에 따르면, 통령을 결정하는 투표권은 영주만 가지니까.”

“살아 있는 거구나.”

“예. 이제 마력이 형편없이 줄어서, 스타람인들도 대륙에서 살기 나쁘지 않을 거예요. 이단 통령이 가장 먼저 아카날 총통과 다니엘 전하께 요구한 건 바로 전기 기술이에요. 전하께서는 단번에 거절했지만, 아카날 총통은 금화 300궤와 기술자 몇 명을 교환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희 기술이 더…… 나을 거예요. 아예 다른 방식을 써서 발전소가 필요 없거든요. 왕녀님께서는 관심 없으실 테지만.”

“……그렇구나.”

아셰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사실 이단이 가장 먼저 캐넌에 자신을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전기 기술이라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며, 사랑이라고 믿는다며 끝까지 그녀를 안아 주고 간 사람이, 반드시 청혼을 받아 달라고 그렇게까지 외우게 시켰던 사람이 어떻게 그녀와 켄을 두고 전기부터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1년 전, 떠나면서까지 켄의 방문을 노려보고, 부디 같이 살지 않을 수는 없냐며 짜증을 냈었다. 그녀는 성을 나가겠다고 말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지금 이단은 반드시 그녀를 데려오겠다고 했으면서 오지 않고 있었다.

“음, 통치는 바쁘고 힘든 일이니까요. 그렇죠? 정신없을 거예요.”

“……청혼서를 쓰는 건 눈 깜짝할 새에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대리인을 보내도 돼.”

아셰는 울컥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리젠이 달래듯 말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사망자 명단이 발표됐어요. 미망인들의 재취를 장려하고 영주의 혼인에는 지참금까지 지원하겠다는 공식 의견까지도. 이단 통령은 잊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히 적절한 때에 청혼서를 보내지 않을까요.”

왜 리젠이 그녀가 묻기까지 이단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리젠이라면 밤새 카이든에게서 이단의 사랑의 흔적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리젠이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지요.’ 같은 것이라면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물어도 소용없었다.

아셰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단은 지금, 스타람과 아메탄에게 전기 기술을 요구하고 사망자 명단을 만들어 배포할 시간은 있어도 그녀에게 작은 서신 하나 보낼 시간은 없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기다리고 있을 아셰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청혼서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서신이라도 보내야 했다.

“자주 오세요, 왕녀님.”

리젠은 그녀의 상실감을 이해하는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메탄은 왕녀님의 고향이고, 이곳엔 언제나 제가 있어요. 왕녀님은 혼자가 아니에요. 리스가 불편하고 외로우시다면 언제든 돌아오세요. 전하도 기다리실 거예요.”

아셰는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젠은 이미 그녀가 느꼈을 배신감을 충분히 안 셈이었다. 만일 이단이 그녀를 찾지 않아도 기운 잃지 말고 외로우면 언제든 아메탄으로 오라……. 분명 다정한 제안이었지만, 아셰는 고개를 저었다.

“리젠.”

그녀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아메탄에서는 잠이 오지 않아.”

“예?”

“꿈에서 자꾸 윌리엄이 나와. 캐넌에서도…… 1년이 더 지나서야 악몽에서 해방되었어. 그런데 아메탄에 돌아오면 무조건이야.”

“……왕녀님…….”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야, 리젠.”

아셰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성은 아메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메탄만큼 불편한 곳이 또 없어. 한때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안달하던 시절도 있었지. 그토록 아메탄에 있고 싶었는데 친오라비를 죽인 순간 내겐 가장 피하고 싶은 곳이 되었어. 원래 아주 예전부터, 이곳엔 나의 자리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내 인생에 행복, 사랑, 뭐 이런 것들은 날 때부터 없었나 봐.”

“왕녀님.”

“…….”

“윌리엄 태자님을 죽이시고 제게 무조건 살아남겠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시겠다고.”

리젠은 그녀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슬픈 눈으로 말했다.

“그거…… 진심 아니셨죠? 제 마음 편하라고 하신 말씀이신 거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어요. 무조건 살아남겠다는 말은, 오히려 죽음을 가까이 생각해야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

“왜 옛날 얘기를 하고 그래? 벌써 몇 년 전이야. 너도 이제 잊어. 난 어쨌든 정말로 살아남았잖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왕녀님은 제게 좋은 사람이에요. 앞과 뒤가 달라도, 어릴 때부터 영악하다고 남들이 뭐라고 해도, 태자님을 살해하셨어도. 그러니 저는 왕녀님의 행복을 빌고, 사랑을 응원할 거예요.”

“…….”

“아시죠? 저는 감이 좋고, 솔직히 말하면 왕녀님보다 똑똑하답니다. 이단 통령은 왕녀님을 잊지 않으셨을 것이고, 왕녀님께서는 결국 행복해지실 거예요.”

리젠이 그저 단순한 바람을 기원 삼아 말한 것일지라도, 아셰는 눈물이 살짝 고일 정도로 위로받았다.

아셰가 다시 캐넌에 돌아온 건 일주일 뒤였다. 그녀는 전쟁은 확실히 끝났으며, 이단 총독은 총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친형을 쏘아 죽였다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선술집에서 밤새 주목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잔을 돌리지 않는 캐넌의 사람들은 아셰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헛소문을 읊었던 서로를 비난해 가며 유쾌하게 웃었다.

“폴라리아 공화국이라고 명명한다고 하더라고요.”

“에이, 뭔가 멋이 없네.”

스미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은 이름이 없이 그저 ‘제국’만으로도 참 멋있었는데, 그 이름이 사라진다니 말이야.”

“……그래도 제국의 국민들은 꽤나 고통 받았는데요. 당장 제국 때문에 어려우셨으면서 아쉬우세요?”

아셰가 조심스럽게 묻자, 미용실의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긴 하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황족은 마치 전설 같았는걸요. 이단 총독님이 마법으로 시카 성의 벽을 무너트릴 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라면……. 하…… 이제 더 이상 대륙에 그런 힘을 가진 인간은 없는 거잖아요.”

“대신 독재도 없지요.”

“에이, 우리 같은 사람은 누가 위에 있으나 비슷해요. 심지어 외국이잖아요? 사실 황제나, 통령이나.”

아셰는 조용히 술을 마시며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보다 평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 더 세게 물었다.

“폴라리아 공화국은 모든 공화주의자들의 망명을 받는다는데, 혹시 공화국으로 가시고 싶으시지는 않으세요?”

“예?”

에소트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저는 우리 영주님께 만족합니다. 왜 외국의 다른 영주 밑으로 기어 들어갑니까?”

“영주여도…… 투표권이 있는…….”

아셰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외국의 평민들에게 영주의 위에 있는 사람이 왕인지 통령인지 군주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이제야 체감한 그녀는 생각보다 폴라리아 공화국이 혁명군이 꿈꾸던 아주 새로운 세계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리젠의 말대로 혁명의 끝은 더 복잡한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밤새 술을 실컷 마시고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집 정리를 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문득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이단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급하게 아메니티에 가서 시간을 보낸 것도, 그녀답지 않게 사람들 속에서 밤새 술을 마신 것도 모두 혼자 이단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였다. 신기한 것이, 전쟁 기간 동안 그녀는 그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기도 하며 살았는데 막상 전쟁이 끝나자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가 기다려졌다.

[다음 편에 계속....]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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