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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69화 (69/112)

69화.

화덕에 불을 붙이고 에타가 준 수프를 데우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야, 켄.”

익숙한 목소리에 아셰는 문을 열었다. 켄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바구니를 내밀었다.

“오늘 에타가 양고기 요리를 했는데, 굳이 네게 전해야 한다고.”

“아…… 고맙다고 전해 줘. 이렇게 자주 챙겨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가 활짝 웃으며 바구니를 받았다.

“같이 먹고 갈래? 너무 많은데.”

“그럴까.”

켄은 조용히 웃으며 편안하게 들어왔다. 종종 그는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가 익숙하게 상차림을 돕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지난 번 수리해 준 울타리는 멀쩡해?”

“응.”

“지붕에 물 새는 곳은 없고? 화분 같은 건 안 갈아 줘도 돼?”

“다 괜찮아. 네가 자주 손봐 주잖아.”

작은 식탁에 양고기와 따뜻한 빵, 묽은 수프와 샐러드가 소박하게 차려졌다. 어제 술집에서 가져온 과실주까지 따른 그녀가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장작은 충분한가? 굴뚝에 공기는 잘 빠져?”

“응, 정말로 다 괜찮아.”

아셰의 작은 집은 켄이 직접 설계하고 한참 동안이나 공들여 지었다. 그녀가 아스의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하여 창문을 크게 달고, 흰색 삼각 지붕을 얹었다. 각종 마법 아이템과 시녀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살았을 그녀를 위해 켄은 자주 찾아와 이것저것 살림을 살펴 주곤 했다. 물론 켄이 살뜰하게 보살펴 주지 않아도, 화리트 형제는 항상 장작을 넘치도록 가져다주었으며 에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음식을 날랐다.

켄은 이 집에 아셰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집이 완성되고 나서야 들었지만, 만일 에곤의 후계자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집을 짓고 소박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셰.”

그는 식사를 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아셰는 싱긋 웃으며 반문했다.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켄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긴장해 있었다.

“……성에 혼담이 들어왔어.”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면 그녀에게 청혼을 넣겠다던 이단의 말이 떠올랐다. 기다리라고, 청혼을 하면 받아들이라고,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혼담이라니? 혼담이라는 것은 조금 더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보라는 제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장 배우자를 데려가겠다는 청혼과는 조금 개념이 달랐다. 켄이 그녀를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

아셰의 손이 떨렸다. 그녀가 포크를 툭, 하고 내려놓자, 그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벤과 그동안 잘 의논해서, 그중 하나를 받아들였어.”

“……어?”

아셰는 자신이 예상했던 혼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녀가 아니라면, 성에 혼담을 받을 사람은 단 하나였다.

“붉은 오리 섬의 리디아 엔젠이라고…… 나이는 나보다 세 살 많고, 아버지와 약혼자가 제국에 파병을 나갔다가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는군. 그녀가 이곳에 오면 영주는 남동생이 맡을 예정인가 봐. 파병 보상금에 혼인 지원금까지 많이 받아 지참금이 상당할 예정이래.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해.”

“뭐?”

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몸이 조금 약한 것 빼고는 착하고 덕이 깊대. 아버지 대신 영지를 잠시 다스렸는데 현명하고 공정했다고 들었어.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눌 줄도 알고. 나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벤은 아무래도 몸이 허약하고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을 조금 걸려 했지만…….”

“켄.”

아셰는 포크를 내려놓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른 혼담은 없어? 물론 벤과 네가 잘 결정했겠지만…….”

“전쟁 때문에 남편을 잃은 여자들의 혼담이 많이 들어왔어. 폴라리아에서 대놓고 재취를 지원한다고 했으니. 하지만 나이가 나보다 지나치게 많거나, 서신이 너무 무례하거나, 오히려 대가를 요구하는 혼담도 많았지. 사망자 명단이 발표되고 정말 아찔할 정도로 많은 혼담이 들어 왔는데…….”

그녀는 전혀 모르던 내용이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게 보여 주지 그랬어? 나도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벤도 그런 말을 했었어. 하지만 내가 거절했어.”

“…….”

“리디아는 내가 선택한 여자야. 캐넌은 넉넉하지 않은 영지라서 함께 어울리고 베풀 줄 아는 안주인이 필요해. 그리고 그녀가 여기에 오면…… 나는 정말로 리디아에게 충실할 거야. 너도 알겠지만.”

“너는…… 너는 그렇겠지.”

아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셰.”

“…….”

“나는 너와 지금 저녁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면, 붉은 오리 섬에 혼인 날짜를 잡기 위한 서신을 보낼 거야.”

일렁이는 촛불이 켄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초록색 눈이 그녀를 가득 담았다.

“마지막으로, 정말, 아셰, 정말로 지겹겠지만, 진정 마지막으로…….”

그가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한 번만 잡아 주면…….”

아셰의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이 남자는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렇게 한결같은가.

“전쟁이 끝나고 두 달이 지나도 그 남자의 서신 한 장 오지 않았어. 네가 아메니티에 간 것은 공식적으로 공화국에서 발표한 사망자 명단을 보러 간 것 아니야? 혹시…… 그 남자가 죽었다면…… 마지막으로 청할게. 불편하다면 너는 이 집에서 지내도 돼. 후계는 양자를 들이면 될 일이야.”

“켄…….”

“양자를 일찍부터 들일 거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데리고 다니며 내가 하나하나 가르칠 거고. 그리고 그 애가 성년이 되면, 나는 영주 자리에서 물러나 이 집에서 너와 함께 살게. 이 집은 벽돌 하나도 내가 골라 가며 튼튼하게 지었어. 너와 이렇게 소박한 저녁을 먹고, 가끔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밤새도록 웃고 떠들자. 그때가 되면 나는 책임감에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지도 않을 테고, 온갖 마을의 대소사를 살피지 않고 너만 바라보며 살 거야.”

아셰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의 눈에 어둠이 가라앉았다. 이단은 전쟁이 끝나고도 그녀를 바로 찾지 않고 있었다. 이 외진 곳에 그녀를 두고, 마치 까맣게 잊었다는 듯 혼담은커녕 서신 한 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항상 있었던 남자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가 리디아와 혼인하면…….”

“…….”

“이렇게…… 오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아내에게 충실할 테고, 너를 보는 이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정말로 영원히 너와 말을 섞지 않을 수도 있어. 리디아는 날 믿고 여기까지 오는 사람이니, 상처를 줄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숨겨진 여자로 살라는 제의를 한다면 이렇게까지 거절이 슬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켄.”

아셰가 낮게 말했다.

“대체 나 같은 게 왜 좋아? 내가 말했잖아. 내가 더 높은 신분의 피를 타고났을지 몰라도,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사랑할 여자가 못 돼. 영리하다 할지라도 이기적이고, 아름답다고 해도 겉과 속이 달라.”

“나도 몰라.”

그가 술잔을 비우고 말했다.

“네가 좋은 이유를 백 가지도 넘게 세던 밤이 있었어. 그걸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포기하는 것조차 포기했어. 네게 친오빠 같은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었지만, 끝끝내 나는 그게 안 됐어. 네 뜻대로 해 주지 못해 미안해.”

“멍청아, 이 바보야.”

그녀가 눈을 감고 숨을 내뱉었다.

“그게 왜 미안해? 마음이라는 게 노력한다고 해서 없어지니? 그게 되었다면, 애초부터 나는 저 성을 나오지도 않았어. 왜 네가 나한테 미안한데?”

“……그래서, 아셰.”

그녀는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그가 평온하게 말했다.

“아직도……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어?”

그녀의 어깨가 훌쩍임으로 흔들렸다. 아무 대답도 없이 우는 그녀의 어깨를 그가 다독여 주었다. 그는 그걸로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낮게 말했다.

“갈게. 저녁 잘 먹었어. 근데 난 아무래도…….”

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결국 평생 너를 피할 것 같아.”

아셰와 에곤의 혼인은 아메탄에서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식 기록으로 남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지만, 켄과 리디아의 혼인 허가증은 공화국의 지원금 때문인지 몰라도 빠르게 영지로 하달되었다. 켄은 허가증을 받자마자 붉은 오리 섬으로 떠나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있던 그 날 밤, 아셰는 진정으로 혼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미래가 막막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단이 자신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많이 해 봤지만, 적어도 1년 전 마지막 만남 때 이후에는 무조건적으로 믿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는데.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사랑보다는 그의 광기를 믿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자신을 잊었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까. 리디아라는 새로운 여자 역시 켄과 그녀에 얽힌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켄이 장애를 가진 여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 추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테니까. 켄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 영지를 떠나 주는 것이 가장 깔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디로……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아메탄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며 누가 뭐래도 그녀의 고향이었지만, 자꾸만 그녀가 죽인 윌리엄이 생각나 그곳에만 가면 잠을 편히 이룰 수 없었다. 고향을 잃은 것은 그녀가 윌리엄을 죽인 데에 대한 또 하나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나마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운 좋게 왕족으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은 것뿐이니, 어디 캐넌과 비슷한 분위기의 영지에 가서 가정교사라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그 깊은 밤에 벤이 급하게 아셰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마님! 작은 마님!”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벌떡 일어나 망토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횃불을 들고 한밤중에 찾아온 성의 집사, 벤은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이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처, 청혼서입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여 받자마자 달려왔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기에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요.”

아셰는 담담하게 그가 내민 고급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벤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폴라리아 공화국의 이단 엔리히 통령…… 맞아요? 직인을 찍은 사람이 아니라, 청혼을 넣은 그 당사자 말이에요. 제가 잘못 본 것은 아니지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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