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청혼서를 읽은 아셰의 표정에는 이미 열기가 없었다. 만일 정말로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청혼서를 받았더라면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셰는 결국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가슴이 조일 때까지 자신을 혼자 둔 이단에게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두 달이 훨씬 넘게 흘렀고 그 시간은 아셰에겐 1년보다도 더 길었다. 어쨌든 그는 바로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한번 상처 입은 마음은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불신과 믿음 사이에서 체념이 자리 잡아 비참함에 휩싸여 갈 곳이 없다며 중얼거릴 때에 도작한 청혼서였다. 오히려 ‘갈 곳이 없다’는 말에 아셰의 아이를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라고 한 켄의 담담한 말이 떠올라 더욱 울컥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벼랑 끝까지 버려두었다.
그녀의 무표정을 보며 벤은 한숨을 쉬었다.
“청혼서와 혼담의 차이는 아시지요? 고민할 시간 없이 직접 데리러 올 테니 빠르게 대답을 결정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에곤 영주님이 아메탄에 간 것처럼 말이죠. 내일 아침, 폴라리아 공화국에서 사람이 온다고 되어 있어요.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네요. 생각할 시간도 없겠어요.”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벤이 허둥대며 재차 말했다.
“서신이 이토록 느린데, 날짜를 이렇게 빠르게 잡다니…… 마님, 이게 어찌 된 일이고, 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아셰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이단은 그녀를 전쟁이 끝나고 이렇게나 방치했지만, 그녀는 자존심을 챙길 여력조차 없었다.
“켄이 혼인하니까요. 제가 정말로 여기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시죠? 오히려 리디아가 오기 전에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실제로 켄과 리디아의 혼인이 결정되고 나서 온 영지의 사람들이 아셰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가, 가실 겁니까? 내일 그 대리인을 따라서?”
게다가, 아셰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 대리인을 따라나서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네. 여기에 총독이 직접 보내는 대리인도 적혀 있네요.”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스터의 영주, 사브르 키렐.”
8. 황제와 통령
“엄마, 나 저렇게 예쁜 말 처음 봐!”
“쉿, 조용히 해. 안 들리잖아.”
“저 나무 막대기 같은 건 뭐야?”
“엄마도 몰라.”
작은 캐넌 영지는 아침부터 북적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길 건너편에 선 사람들은 딴청을 부리며 모두 아스의 언덕에 도달한 손님을 보고 있었다.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온 행렬은 상당히 화려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렸다.
아셰는 자신의 작은 벽돌집 앞에 서서 가만히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곁을 지키던 집사 벤은 싸늘한 그녀의 표정에 말조차 걸지 못했다. 그는 처음엔 켄이 이 자리에 없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했지만, 캐넌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외국인들의 행렬이 이어지자 차라리 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도망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대 영주의 부인이자 명목상으로는 영주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아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어서 그 속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헤라와 한나가 속삭였다.
“뭐 이렇게 갑자기 청혼이야? 그것도 통령이면, 왕 아니야? 왕이 왜 우리 영지의 미망인을 데려가?”
“왕은 아니고, 그냥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래.”
“그게 그거지.”
“그런가? 그런데 마님의 표정을 보면 뭔가 심상치 않아. 저렇게 무서운 얼굴은 처음 봐.”
“청혼을 받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진짜 뭐지? 설마 거절하시는 거 아냐?”
“혼담도 아니고 청혼인데…… 거절하면 후폭풍이 있을걸. 내가 알기로 청혼은 혼담과 달라서 성사되지 않았을 때 부담이 좀 커. 사람이 직접 오잖아.”
“그러면 거의 납치 수준 아니야? 저렇게 큰 나라에서 청혼을 넣는 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헤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영주님도 안 계신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윤기가 나는 검은 말을 타고, 검 대신 이상하게 생긴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옆에 찬 남자가 뒤에 행렬을 두고 아셰의 앞에 섰다. 선홍빛 머리의 젊은 사내가 훌쩍 뛰어내려 아셰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손에 살짝 입을 맞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폴라리아 공화국 우스터의 영주, 사브르 키렐입니다. 듣던 대로 몹시 아름다우시군요.”
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렇게 좋은 옷을 입고 군인과 시종들을 열 명이나 데려온 사람이 아셰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캐넌에서는 영주도 영주민과 마찬가지로 면으로 된 옷을 입고 마을 사람들과 격 없이 술을 마셨다. 제대로 된 예법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불과 3일 전만 해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밤새 과실주를 마시던 아셰의 표정에는 전혀 당혹감이 없었다. 그녀는 살짝 무릎을 굽히고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우아하게 대답했다.
“폴라리아 공화정부의 건국을 축하드립니다.”
한나와 헤라는 둘이서 소곤거리던 것도 잊고 멍하니 아셰를 바라보았다. 그녀들과 숨넘어갈 듯이 크게 웃고 떠들던 순진한 얼굴이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아셰의 자세는 당당하고 미소는 계산한 것같이 아름다웠다. 그들이 5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과 눈빛과 자세로 아셰는 작은 집 앞에 서 있었는데, 아무리 머리카락이 짧고 리스의 평민들이 입는 옷을 걸쳤더라도 숨길 수 없는 고고함이 드러났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멋진 옷을 입은 사브르와 함께 아셰가 작은 집으로 들어가자, 사브르가 데리고 온 시종들과 군인들은 작은 집을 둘러싸고 각을 지어 섰다. 아셰가 타고 갈 것이 분명한 화려한 마차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대문 앞에 놓였다.
“차는 괜찮습니다.”
작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사브르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아셰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금세 싱긋 웃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벤은 어쩔 줄 모르며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아셰가 웃는 눈으로 말했다.
“이곳은 아메탄과 달라서 차를 마시지 않아요.”
캐넌의 사람들은 아셰가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아셰는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고 별다른 경계심도 없이 켄에게 말했지만, 켄은 아셰가 비밀이라고 덧붙이지도 않았는데도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캐넌 사람들은 아셰가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몰랐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차를 마셔도 되었지만, 아셰는 이미 캐넌의 문화를 따라 차를 마시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저도 이제 캐넌 사람이라 차를 우린 지도 한참이 되었습니다.”
“잘 되었군요.”
사브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은 이 대화에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으나, 아셰는 이 남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자신에게 경고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물론 다시 누군가를 죽일 때, 윌리엄에게 했던 것처럼 비상과 해독제를 이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래도 사브르와 친해져 함께 차를 마시며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이는 것도 여러 계획 중 하나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남자의 용의주도함을 보았을 때, 절대 그렇게 쉽게 복수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청혼서가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오시니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셰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알아챌 심산으로 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
“게다가 이렇게 외진 곳의 홀로된 여인에게. 모두 놀랐어요.”
그의 대답에 따라, 이단이 자신을 데려가는 태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의 손이 초조하게 테이블 아래에서 떨렸다. 적어도 늦어서 죄송하다느니 이단 총독님이 많이 생각했다느니 원래부터 오래된 인연이라 알고 있었다느니 하는 아부성 발언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청년은 처음 들어오자마자 차는 안 마신다느니 하는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단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그 역시 아셰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묘하게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아셰는 긴장감을 느꼈다. 여러모로 그녀가 예상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고 바로 이단이 직접 달려와 다급하게 그녀를 데려갈 줄 알았는데, 전쟁이 끝나고도 두 달 뒤에야 기 싸움을 거는 수족을 보내 영광인 줄 알라는 듯한 눈빛을 받게 하다니.
오직 사랑이었기 때문에 상처 입는 마음이 있었다. 사랑이 개입되었기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자존심이 있었다. 복수심이 커서 청혼을 받으면 안도할 줄로만 알았는데, 이상하게 원망하는 마음이 커다랗게 자리 잡았다. 아셰는 사브르가 자신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는 것에 이상하게 이단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서러울 정도로 슬픈 것은, 시원하게 청혼을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켄의 결혼은 그녀에게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캐넌의 사람이 아니지요.”
사브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옆자리의 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메탄의 유일한 왕녀이자, 다니엘 왕의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하는 청혼입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은 예상한 방향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감정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아직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모르시나 본데.”
아셰는 표정을 굳힌 채로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을 신중하게 들었다.
“아메탄은 스타람 외에 대륙에서 유일하게 전기 기술을 보유한 국가이지만…….”
그녀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단 통령이 가장 먼저 아카날 총통과 다니엘 전하께 요구한 건 바로 전기 기술이에요. 전하께서는 단번에 거절했지만.’
사실상 혁명이 완성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향후에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된 사안 아닐까. 사랑 같은 건 당연히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력에 밀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저 순서상으로 밀린 것뿐일까? 아셰는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저희에겐 아메탄의 국왕에게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