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녀는 아프도록 심장이 꽉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사브르는 자신에게 청혼과 동시에 요구를 하고 있었다. 정치적 의도가 있는 청혼이니 받아들일 때 그 무게를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저는 공화주의자도 아니고, 폴라리아 공화국과 그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제가 왜 아메탄의 협조를 이끌어 내려고 통령과 혼인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전기가 필요하다면 스타람의 여인을 데려가세요.”
“아메니티의 기술력은 스타람을 뛰어넘었습니다. 왕녀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아메니티의 산하기관은 정말 체계적으로 사람을 갈아 넣기로 유명하지요.”
“그럼 공화국에서도 체계적으로 사람을 똑같이 갈아 넣으시지요.”
“어느 방식이든, 저희에게는 아메탄의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이상하게, 청혼이 아니라 협박 같군요.”
“자, 그래서.”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지만 사브르가 몸을 기울이며 정중하게 물었다.
“청혼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죽이고 싶다. 저 남자의 죽어 가는 눈을 보며 말하고 싶다. 왜 내 아이를 죽였냐고, 내가 복수를 하기 위해 기다렸던 세월을 짐작이나 하냐고, 시간에 잊지 않기 위해 아픔을 되뇌어야 했던 그 많은 밤을 아냐고.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를 죽일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받아들이신다면, 지금 저를 따라 폴라리아의 수도, 엔리히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제국은 무너졌지만, 수도명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단은 엔리히의 이름을 가진 마지막 황족이자 초대 통령이었다. 남의 입에서 엔리히라는 말을 듣자 아셰는 새삼 그녀에게 주어진 청혼서의 무게가 느껴져서 마른침을 삼켰다.
윌리엄의 장례식 날, 그녀는 로즈리의 눈물을 닦아 주며 함께 울었다. 그와 같이 그가 모든 사실을 숨기고 제게 손을 내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은 벤뿐이었다. 벤은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은 주세요.”
아셰는 생긋 웃었다. 그녀는 찻주전자에 비상을 넣고 함께 차를 마셨을 뿐이다. 윌리엄이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도 못했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미 닫힌 그의 관 밖에서 울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났다. 그녀가 윌리엄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깊게 상처로 남아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 같은 것은 없었다.
“특히 성에서 함께 지내던 이들은 제 가족과 같았어요.”
그 역시 아무런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했을 뿐이고, 그대로 잊으면 끝날 일이었다. 윌리엄을 독살한 아셰마저도 문득문득 그 사실을 잊고 사는데,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여자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전쟁터에서 수도 없는 살생을 한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홀로 마차를 타고 갈 줄 알았는데, 모든 예상을 깨고 사브르가 마차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셰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일단은 생긋 웃었다.
“말 타는 것이 피곤하셨나 봐요. 마차에 함께 타실 줄은 몰랐는데.”
“캐넌 영지 사람들이 모두 구경을 올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오는 길엔 좀 있어 보이려고 말을 탄 겁니다. 전쟁터도 아니고, 직접 말을 달릴 필요는 없지요. 마차가 훨씬 더 편한데요.”
사브르는 별로 민망해하지도 않은 채 물 흐르듯이 말했다. 사브르는 곱슬거리는 연한 선홍빛 머리에 옅은 갈색 눈을 가진 남자로 콧잔등에 주근깨가 소년처럼 퍼져 있었다. 군인다운 다부진 체격과 다르게 말이 꽤 많았다. 그러나 아셰는 그의 말들이 모두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아메니티의 사교계에 온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기를 꺾거나, 아니면 동맹을 맺거나 둘 중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백 가지도 넘는 의미 없는 말들을 하는 것들이.
작은 캐넌 영지를 모두 통과하는 데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 흘렀다. 끝까지 마차에 붙어 울먹이는 사람들을 보던 사브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시골짝에서 인덕이 깊으셨나 봅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입고 살던 왕족 여자가 이렇게 잘 적응하기도 힘든 일인데 말입니다.”
“저는 어디든 잘 적응해요.”
그녀가 차분히 대답했다. 사브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비결이라도 있나요? 저희 영지 사람들은 대륙이 불편하다고 난리거든요. 아, 저희 영지 사람들은 모두 스타람인들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너무 어릴 적부터 눈치를 보고 살아서, 무력함을 인정하는 데에 익숙할 뿐이죠. 그래도 최선을 다해 몸을 낮춰 천천히 기어가면 어찌어찌 살아지던데요.”
그녀를 바라보는 사브르의 표정에 더욱더 흥미가 어렸다. 그녀는 왕이 될 태자를 죽인 여자였고 이단이 몇 년째 집착하고 있는 대상이었다. 아셰는 그가 그녀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고 어느 정도는 그 호기심을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희 영지 사람들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타람인들은 마력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왕녀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조금 더 버텨 보라고 해야겠군요.”
아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왜 스타람으로 돌아가지 않지요? 아무리 마력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해도, 스타람인들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닐 텐데.”
“저희는 스타람인이 아니라, 공화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
“스타람의 공화정은 아무래도 실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로 결정한 겁니다.”
“왜…… 실패했는데요?”
“권력을 지닌 자들은 탐욕스럽고, 권력을 주는 자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아카날 총통이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라 그 자리에 오른 줄 아십니까? 그저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가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총통이 된 겁니다. 리한 카드민이라고, 이제 아메탄 왕국의 사람이니 아시겠지요.”
아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일 파티에 노래를 부른 기가 막히게 잘생겼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니엘이 한눈에 반해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어 안달했을 정도로 대단한 가수였다. 켄이나 이단, 다니엘이나 카이든이 잘생기고 체격이 큰 남자라면, 리한 카드민은 그 경계를 뛰어넘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 저자 아닌가요? 혁명군의 사상적 토대라던.”
“그렇죠. 리한과 저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두 이해해서 공화주의자가 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에게 실망했죠. 스타람의 대중들은 리한의 선택이면 옳은 줄 알고 우르르 아카날을 선택했고, 이젠 아카날이 장기집권을 선언하고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해도 그러려니 하고 있지요.”
“음…… 공화정은 세습을 부정하는 정치 형태 아닌가요? 그런데 아들이 후계자라뇨?”
“세습을 부정하지만, 아들이 후계자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거죠. 말장난 같지만, 이 말장난이 놀랍게도 대중에게는 통합니다. 정치를 좀 해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아셰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이 남자가 몹시 가볍고 말이 많아 보이지만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노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마차에 올라탄 건 아닐 것이다. 분명히 폴라리아에 가는 길에 그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저는 스타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새로운 공화정을 세울 겁니다. 저는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진정한 공화주의자이니까, 스타람의 실패를 발판 삼아.”
“그 몇 안 되는 진정한 공화주의자에 리한 카드민과 이단 엔리히도 들어가나요?”
“리한은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떠났습니다. 지독한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린 바람에 아마 은둔의 삶을 살지 않을까 싶어요. 이단 통령님은 조금 애매하죠.”
사브르는 이단의 이름이 나오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분은 태생이 황족입니다. 능력뿐만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게 다…….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남자예요. 그는 능력 있는 독재자가 어울리지 시끄러운 공화정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섬기나요?”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끊어 냅니다. 그 거대한 마법의 힘을 스스로 포기한 남자입니다. 제게 그런 힘이 주어졌다면, 저는 과연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런 면에서 이단 통령은 대단한 사람이죠.”
“……그럼 이제…… 전혀 마법을 못 쓰나요?”
“쓰긴 하지만 예전같이 압도적이지는 않죠.”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보여 주던 거대한 마법이 생각났다. 그녀의 궁에 치던 촘촘하고 거대한 방음마법과, 온 바다의 파도를 멈추던 밤, 어렵지 않게 마력으로 사람들을 기절시키던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는 건국 신화에 따라 엔리히 황족의 모든 힘을 끊어 버리고 그 모든 능력을 스스로 포기한 평범한 남자가 된 것이다.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정의를 아는 이성이 타고난 파괴적 본능을 결국엔 이기더군요. 하지만 가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시던데, 단 하나.”
그가 눈을 번득였다.
“당신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엔리히 통령에게는 공화정보다 당신이 우선순위거든요.”
그녀는 예상치 못한 대화의 전개에 몸을 바로 세웠다. 앞의 말들은 그저 변죽을 울리기 위한 서론이었고, 이제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시작될 터였다.
“총독이 전쟁터에서 두 번이나 홀로 위치를 이탈해서 한 여자를 보러 달려갔습니다. 정상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 틈을 만들기 위해 이단 통령은 혁명의 기본적 신념도 너무나 쉽게 무너트리더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적이 사라진 걸까요? 천만에, 공화정의 적은 언제나 혁명 동지들입니다.”
“그래서요?”
“새로운 공화정부에 쓸모 있는 여자가 되어 주십사 간청 드립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