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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72화 (72/112)

72화.

그녀는 사브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뒤에서 편안히 그의 사랑만 받으며 누워 있기에는 신생 공화국은 너무 위험하니까요.”

사브르는 그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괜히 통령님의 약점이 되시지 말고,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에 눈이 먼 순진해 빠진 여자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직접 만나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곳이 아메탄이고, 그녀의 신분이 여전히 왕녀였다면 지금 즉시 그의 뺨을 치고 주제넘은 소리에 대해 사과를 받았을 것이다. 감히 스타람의 한낱 군인이 대놓고 자신을 골칫덩이 취급하다니…….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스스럼없음에서 그녀는 공화국에서의 제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혁명과 그 어떤 관계도 없었고, 이단과 혼인한다고 해도 쉽게 권위를 인정받을 리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 이단에게 충성하는 거죠?”

분명 이단이 예전에, 사브르는 이단이 아니라 공화정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셰의 미심쩍다는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통령은 현재 초기 공화정을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입니다. 권력을 지닌 자지만 탐욕스럽지 않으니까. 오히려 일반인보다도 ‘옳은 것’에 대해 칼같이 결정하십니다. 혁명군에게 큰 타격이 되더라도 약속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리한 카드민을 보내 줬을 때, 저는 격렬히 반대했지만 내심 이런 사람이 통령에 올라야 공화국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죠.”

“권력을 주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데요?”

“공화정의 권력은 투표권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슬프게도 지금 구성원들은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훌륭한 이념가는 아니기 때문에, 벌써부터 권력에 대한 싸움질을 시작했죠.”

“그럼…….”

그녀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거기서 어떤 역할인가요?”

“저는 본디 누군가를 이끌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탐욕스럽지 않은 자를 골라내어 어떻게든 위에 올리는 역할입니다. 저는 새로운 땅에서 제 이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평생 동안 냉정한 눈으로 뒤에서 권력자를 감시할 겁니다.”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셰를 향해 사브르가 씩 웃었다.

“왕녀님은 이 정치판에 딱 맞는 사람이군요. 사실 예전부터 알았지요. 친오라비를 독살한 여자가 순진하게 사랑만 믿고 있을 리가.”

그가 몸을 숙인 채 속삭였다.

“저와 비슷한 부류시지요?”

슬프게도 그녀는 그 말에 내심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메탄에 있었을 적, 그녀는 누군가를 이끌고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니엘의 자리를 지켜 주고 다독여 주기 위해 수없이 영혼 없는 말들을 속삭였던 것이다. 사브르는 그녀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씩 웃었다.

“저와 함께 이단 통령님께 유리한 패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조건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영특하신 왕녀님이 어떻게든 이용 가능한 다니엘 국왕과 사이를 나쁘게 만들었을 리 없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또 다른 전쟁터에 가는 겁니다.”

마차는 이미 한참 전에 캐넌을 지나 리스의 수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벌써 번영한 도시 특유의 냄새와 시끄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보기만 해도 발걸음이 멈추는 넓은 잔디밭과 순진한 표정의 소, 천천히 창틀의 꽃에게 물을 주는 사람들 같은 건 없었다. 아셰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했다.

‘왕녀님은 어디론가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계속해서 이방인으로 남으실 거예요.’

결국엔 떠날 수밖에 없었구나.

‘왕녀님의 마음이 끝내 정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비밀을 숨기고, 모든 표정과 속내를 감춘 채 윌리엄의 차에 비상을 넣었던 그 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아셰가 고고하게 턱을 들고 말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1년 전의 이단이 맞다면, 그는 나를 다니엘보다 더 깊숙하게 감금시켰으면 감금시켰지 절대 남들 앞에 세우지 않을 겁니다.”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아까 분명 전기 기술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속마음을 숨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사브르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홀로 외국인인 황궁에서 통령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생각보다 힘겨울 겁니다. 특히나 왕족이시니, 더욱이 뒷방에서 그림자처럼 사시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또다시 가난한 영지로 끌려가야만 했던 힘없는 왕녀로 사실 겁니까? 평생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모친처럼 살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 손을 잡으셔야 할 겁니다.”

“…….”

그녀는 사브르가 지금 자신과 이단을 동시에 속였음을 깨달았다. 아까 아메탄의 핏줄 어쩌고 했던 것들은 모두 사브르의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전기 기술을 원하고 있는 건 이단이 아니라 사브르일 것이다. 아셰는 그 사실에 새삼 흠칫 놀랐다. 이단이 보낸 사람이지만, 이단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윗사람에 대한 충성이라는 개념이 없고 모두가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체제가 공화정이라면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상식’이 쓸모없어진다. 습관처럼 그녀를 데리러 온 사브르의 태도로 이단의 감정을 가늠하려고 했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생각보다 신중하게 움직여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녀님께서 적절한 능력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이단 통령보다 저를 먼저 만나신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제게 왕녀님의 가치를 보여 주시면…….”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맨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성의 없게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깊게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저의 우정을 드리지요. 저는 굉장히 유용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우정이라는 말이 단순한 친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알았다. 어린 시절 아메탄의 왕궁에 있었을 때, 루벤과 윌리엄이 각자의 귀족 세력들을 등에 업고 벌이는 치열한 정치 싸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모습은 흔했다.

이 남자는 지난날 아셰를 방해물이라고 판단해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없앴으면서, 이제는 그녀에게 한배를 타자고 제의했다. 그는 그녀의 권력욕을 자극하면서 핏줄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아셰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반응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파악한 사브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타고난 왕족의 기개는 빼어나십니다만, 아시다시피 이제는 공화국에서 핏줄만으로 위압감을 주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아셰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작은 도시지만, 리스에서는 수도만큼 번영한 곳이 없습니다. 이곳에 잠시 내리지요. 옛 제국의 땅에 들어서면 전쟁 이후라 혼란스러울 것 아닙니까. 돈을 주시면 가장 좋은 옷과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를 사고, 머리를 손질하여 두 시간 이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핏줄이 주는 알량한 권리뿐이었다. 그 권리를 뒷받침해 줄 배경이 없기 때문에 납작 엎드려야 하는 것쯤이야 익숙했다. 아무리 죽이고 싶은 남자라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모든 것을 망치기 마련이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이단에게 그를 죽여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셰는 이단을 기다리는 두 달 동안 자신의 무력함을 넘치도록 체감한 터였다. 이단만 믿고 마음을 놓았던 결과는 끔찍한 기다림이었다. 그녀는 이미 어릴 때에 윌리엄을 믿고 맹목적으로 그의 편에 서다가 결국 배신당한 기억이 있었다. 한 명에게 의존하다가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그 길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단의 괜한 약점이 되지 말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라는 사브르의 말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가장 강렬하게 마음속에 박혔다.

“그리고 여기서 다니엘에게 서신을 한 장 보내지요.”

사브르가 감탄한다는 눈으로 웃었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기 기술을 부탁할 테지만 아마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교역 정도는 제안할 수 있겠죠. 스타람의 물건만 구매하기에는 독과점 문제가 생겨 새 공화국에 큰 부담이 될 겁니다. 아메탄의 전기용품이 들어온다면 가격 경쟁이 붙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요.”

“아메탄의 국왕이 교역을 받아들일까요?”

“아메탄 왕국에서도 교역 정도야 허가할 겁니다. 이득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단 엔리히의 민폐를 잊지 않고 있어서 자존심에 거절했겠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이 부탁하면 그 정도 해 줄 명분은 서겠지요.”

“확실합니까?”

“첫째, 지금은 체제가 잡혀 있지 않은 공화국의 초기라 자존심을 세울 수 있어도, 아메탄은 결국 거대한 공화국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다는 걸 다니엘이 더 잘 알 겁니다.”

“흠.”

“둘째, 공화국은 넓어서 포기하기엔 아까운 시장이죠. 다니엘은 공화주의가 아메탄을 휩쓰는 걸 바라지 않아요. 전 국민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오랜 전쟁 때문에 제국에 공물을 너무 많이 보내 지금은 한 푼이 아쉬울 겁니다.”

아셰는 싱긋 웃으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셋째, 과거 아메니티의 돈이 스타람에게 흘러간 적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스타람의 독과점을 막아 스타람에 큰 해를 끼칠 수도 있겠죠. 다니엘은 원한을 잊지 않는 사람이에요. 아마 시간은 좀 걸릴지 몰라도 확실합니다.”

그녀는 대번에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 정도면 당신의 우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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