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리-73화 (73/112)

73화.

“조금 더 신뢰가 쌓여야겠군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공화국에서는 권력이 투표권에서 나옵니다. 만일 교역이 허가된다면 제가 그 사실을 발판으로 어떻게든 왕녀님에게 투표권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지겠죠.”

대체 이 남자가 원하는 건 뭐지? 아셰는 사브르의 의도가 파악이 되지 않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단을 지지하지만, 이단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는 남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을 시험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와 한배를 탈 만한 이용 가치가 있는지. 대체 전기 기술 외에 그가 그녀에게 원하고 있는, 투표권이 필요한 공동의 목표란 무엇일까.

“좋은 생각 같지 않군요. 저는 공화주의자도 아니고 전쟁을 함께한 혁명 동지도 아닙니다. 혼인으로 인해 갑자기 생긴 권력은 사람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데…….”

“그건 왕녀님이 알아서 해결하셔야지요. 저는 제가 인정하는 사람만 친구로 둔답니다. 지금껏 제 우정을 가지셨던 분은 이단 통령과 리한 장군님뿐이셨습니다.”

사브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캐넌에서 지낸 몇 년의 시간들이 무색하게, 아무 배경도 없이 권리만 지니고 있게 된 모양새가 아메탄 왕궁에서 지낸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힘이 없으면 오랫동안 숨죽인 채 기다려야 하고, 남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답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정치판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도 버틸 수 없을 테니까.

* * *

켄이 영지의 새 안주인인 리디아와 돌아왔을 때, 이미 아셰의 작은 집은 비어 있었고, 그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셰는 에곤의 부인이었고, 원칙적으로 아들인 그의 허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여독에 지친 아내에게 성의 길을 안내해 주고, 저녁 식사를 도와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낯선 곳으로 따라온 그녀가 안쓰러워 켄은 시종일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다 보니 그녀는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도 조심스러워했고, 그는 그녀의 옆에서 친절하고 인내심 있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안내했다.

그녀가 잠들고 나서야 켄은 벤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벤이 절반은 혼이 나간 채로 아셰를 향한 안타까움에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쏟아 낼 때에도 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영지를 비웠을 때 너무 큰 짐을 지워서 미안하다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을 뿐이었다. 벤은 그의 맑은 초록색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켄?”

다음 날 새벽, 리디아는 제 옆자리에서 잠들었던 그가 이미 일어나 있음을 알았다. 더듬거리며 일어나는 그녀를 켄이 조심스럽게 다시 눕혔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어요. 더 자요.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어디 가세요?”

리디아는 작고 마른 데다가 목소리마저 가느다랗고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선하고 남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여자였다. 켄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 뒤 다정하게 속삭였다.

“잠시, 사냥을 다녀올게요. 점심 먹기 전에는 돌아올 거예요. 푹 자요.”

그는 그길로, 활을 들고 날래게 산을 올랐다. 5년 전 영지에 먹을 것이 없었을 때,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힘겹게 짐승을 잡아 오고 나무껍질을 벗겨 내었던, 최후의 보루 같았던 영지의 단 하나뿐인 산. 풀을 캐고 싶어 한번 가 보고 싶다며 그를 졸랐던 그 여자와 함께 올랐던 그 산. 혹시라도 그녀가 다칠까 무서워 산의 입구까지밖에 가지 않았으나 그 짧은 길이 얼마나 설렜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동굴 안에서 자신의 아이가 켄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그는 정말로 그녀와, 그녀의 아이,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이 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를 갖지 못해도 그들을 지켜 줄 수 있으면, 그의 눈앞에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없이 혼자 이 산을 올랐을 때도 있었다. 갑갑하고 먹먹한 마음을 자신도 어쩌지 못해 온몸이 들끓는 듯했을 때. 양어머니와 양아들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굴레 속에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욕망이 그를 채우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의 사랑이 갈 곳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었을 때. 그는 이곳에서 자기파괴적 행위로 살생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때의 그 동굴 안에서 머리를 감싸며 그때처럼 포효했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영지의 영주였고, 남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산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는 동굴 안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한참 동안 괴성을 질렀다. 아침의 고요한 산에서 작은 새떼가 푸드득 날았다.

‘그게 어떻게 청혼입니까, 제가 보기엔 협박이었습니다.’

천천히 다시 일어난 켄이 먼 곳을 노려보며 활시위를 당겼다.

‘아메탄 왕국에게 뭘 요구하라는데…… 한번 왕족으로 태어나면 그저 평화롭게 살 자격도 없나 봅니다.’

화살이 빠르게 날아 까마귀 한 마리를 정확하게 맞췄다. 켄은 쉬지 않고 다른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새들이 연달아 켄의 화살을 맞고 후두둑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남들은 수군거렸더라도, 저는 마님과 영주님이 함께 성에 사셨을 때 좋았습니다. 마님은 밝고 불평불만이 없으신 데다가 아는 것도 많고, 셈도 빠르시고, 뭐든지 잘 하셨습니다. 후계 문제만 없었다면 저는 뒤에서 뭐라고 하든 그대로 두 분이 사시라고 조언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마님은 에곤 영주님의 부인이셨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은 결과가 나왔겠지요. 어쩌면 마님은 이미 모든 걸 알고, 그렇게 저희가 말렸는데도 성 밖으로 나가셨는지도 몰라요.’

그가 팔이 아플 정도로 오랫동안 활시위를 당겼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저 멀리 언덕을 뛰어가던 토끼에게 맞았다.

“이렇게 보낼 줄 알았다면.”

5년에 가까운 시간을 매일같이 함께 보냈다. 그러나 혼인을 하고 온 그 잠깐 사이에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녀는 외국으로 떠나 버렸다.

“마지막에 그런 얘기는 안 했을 텐데.”

그가 팔을 들어 거세게 눈을 문질렀다.

“평생을 널 피하겠다고……. 그게 내 마지막 말이라니…….”

켄은 화살통을 더듬다가, 모든 화살을 다 쓴 것을 알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에겐 자꾸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짓만 하게 되었다. 정작 그녀는 그에게 언제나 영리하고 담담한 모습만 보여 주었건만.

이제 정말로 접어야 하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나만 널 사랑했다는 뜻이겠지.”

* * *

“아메탄의 왕녀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단은 캐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오후쯤에는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어지는 것 같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했다.

원래라면 그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캐시가 이단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면서도 이단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캐시는 영주 자리를 얻은 열둘의 혁명 동지들 중에서 가장 어렸지만 심지가 누구보다도 굳고 강인하며 검을 이단보다도 잘 썼다. 그러나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움츠러들기만 했다.

“아메탄 국왕의 협력을 이끌어 내고 싶은 거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굳이 통령님이 이런 정략혼을 할 이유가…….”

“누가 정략혼이라고 했지? 아메탄의 국왕 이야기는 여기서 왜 나오고?”

이단이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캐시를 돌아보았다. 이단의 매서운 눈매에 캐시가 숨을 참았다. 황궁에 자리를 잡고 나서 이단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어두워졌다. 예전의 호탕한 쾌남이 아니라 가만히만 있어도 음울한 광기를 내뿜는 남자가 된 것이다. 친족을 죽인 트라우마가 황궁에서 몇 배나 증폭되어, 말수는 급격히 줄고 표정은 굳었으며 검은 눈은 불안하게 번득였다. 물론 캐시는 그런 그의 모습조차도 사랑했다.

“오래 전부터 사랑을 약속했던 사이니 오해하지 마.”

이질적으로 들릴 만큼 눅눅한 목소리였다. 이단의 모든 몸짓에는 예전과는 다른 퍼석퍼석한 공허함이 감돌았다.

“……오래 전이요? 전쟁 이전인가요?”

그동안 겪은 그 어떤 전쟁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던 캐시가 바들바들 떨면서 반문했다. 이단은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화가 끝났다는 뜻으로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셰를 데리고 올 사브르의 행렬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캐시는 그의 여자가 오고 있다는 사실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저와 통령님은 5년에 가까운 시간을 전우로 함께 했습니다. 역경을 함께한 시간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겁기 마련입니다. 저는…… 옛사랑의 약속이 그 시간만큼의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단은 캐시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셰와 그가 함께 한 시간을 모두 합쳐 봐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결혼하자고 그녀의 궁에서 속삭인 뒤 철저히 떨어진 시간이 5년에 가까웠다.

“나무에도 시간의 흔적인 나이테가 새겨지는데, 사람에게도 함께 한 사람의 흔적은 시간만큼 남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저는 통령님이 그 여자와…….”

“캐시, 나가 줘.”

만일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줘’ 같은 말은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부탁형의 어조를 쓰지 않았으니까. 황자인 그 역시 이 궁에서 그 누구에게도 ‘줘’ 따위의 어미를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통령 자리에 오르고 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형이 아닌 부탁형의 말을 썼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이단은 낮게 말했고, 캐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결국 나가 버렸다.

“……전 언제나 통령님의 편입니다. 언제나요. 보답 받지 못한다 해도.”

이단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약 올리듯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다시 홀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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