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는 캐시를 비롯하여 저를 위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아셰는 다를 것이었다. 보답 받지 못하는 켄의 진심이 그녀에게 어떻게 남아 있을지, 자신이 캐시를 대하는 마음과는 완전히 다를 그 차이가 이단은 두려웠다. 아셰는 켄을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절대 그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이므로.
아셰는 저와 떨어져 있던 시간을 온전히 그 남자와 함께 있었다. 캐넌으로 대표되는 그 시간의 무게가 그녀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을지, 그리고 그 흔적을 그가 견딜 수 있을지 두려웠다.
노을이 지고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었다. 사브르의 손을 잡고 함께 마차에서 내리는 아셰를 이단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영락없는 명랑한 시골 처녀였으나,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아름답게 차려입고 흠잡을 데 없는 자세와 표정으로 사뿐사뿐 사브르의 에스코트를 능숙하게 받으며 황궁에 들어오고 있었다.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고급스러운 실크로 두 겹을 두른 남색 드레스 차림의 그녀를 보며 이단은 이상하게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생각이 났다.
그녀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하고 도망쳤을 때, 열다섯의 그는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지붕에서 내려가 연회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연회장 먼발치에서 본 그녀는 벌써 자신과 꼭 닮은 오라비의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열심히 속삭이고 있었다. 그 때 이단은 그녀가 그토록 아름다운지 그제야 알았다. 고급스럽고 몸에 딱 맞는 드레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장신구, 어릴 때부터 교정 받아 온 기품 있는 자세,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온화한 표정까지.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일 연회장에서 그녀를 만나서 춤이라도 몇 번 추었다면, 그녀는 절대 지붕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진심을 보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녀는 자신이 볼 때마다 이렇게 생경한지. 돌고 돌아 그녀는 또, 정말로 벗어나고 싶은 곳에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진실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눈으로 그의 앞으로 오고 있었다.
아셰는 부드럽게 웃으며 황궁의 앞에서 다른 영주들과 함께 서 있는 이단에게 다가가 차분히 무릎을 굽히고 예의에 맞게 인사했다.
“폴라리아 공화정부의 건국을 축하드립니다. 통령님과 열두 분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듣던 대로 아름다우십니다. 캐넌에 계셨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분이시군요.”
이단의 오른쪽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셰는 부끄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그가 욕설을 지껄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사브르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처럼.
“긴 여행이 힘드셨을 텐데 오늘은 들어가 쉬시지요. 결혼식은 내일 천천히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단에게 가슴을 숙여 인사하고, 사브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황궁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 황궁에 다시 오기 싫어서 윌리엄을 독살했는데, 운명은 어이없게도 또 그녀를 이 자리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들어 저 멀리 넓은 황궁의 연회장 지붕 위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저 지붕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열여섯의 치기로 황궁의 비밀 통로를 향해 신나게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그 발걸음이 자신을 결국 이곳으로 다시 데려온 셈이었다.
“예전처럼 황궁에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통령님은 자신의 몸은 자신이 챙겨야 한다는 주의셔서, 일하는 사람들도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혼자 살았어요. 그런 건 걱정 마세요.”
“통령님께서 아까 환영의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심려치 마십시오. 통령님은 황궁에 오셔서…… 조금, 아니 많이 어두워지셨습니다.”
아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말도 안 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황궁의 위압감에 긴장하고, 난생처음 보는 열두 영주들의 분위기를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잠시 들리겠습니다. 명분은 드레스와 장신구의 배달이지만, 이곳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열둘의 영주들은 이단 통령님의 전우였으나 현재는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브르.”
그녀가 낮게 말했다.
“왜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건가요? 당신과 나는 어제 처음 봤어요.”
“아마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혼인으로 통령님을 묶어 두려던 다른 사람들은 지금 왕녀님의 등장으로 상대의 실수를 눈이 뒤집힐 정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선거가 5년 뒤니까.”
같은 목표? 의심에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그녀의 방문을 열며 씩 웃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방 안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작은 집보다도 넓은 방이었다.
“……차차 더 말씀드리지요. 쉬세요. 저는 교역 허가가 내려오자마자 왕녀님께 투표권을 드리기 위해 동분서주할 테니까요. 투표권이 생기면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지요.”
“이단이 허가할까요?”
“통령은 황제가 아니라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단 통령 역시 잘못 행동하면 법에 준하는 벌을 받지요. 그의 허가가 필요 없는 길이 아주 많답니다. 공화국은 왕국과 다릅니다. 왕녀님께서도 익숙해지셔야 할 새로운 체제니 방에 놓아둔 ‘나의 공화주의’를 읽어 보세요.”
“…….”
“혹시나 심심하실까 ‘제국의 역사’라는 열 권짜리 서적 역시 넣어 두었습니다. 혹시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종을 울리시지요. 하지만 왕녀님께 배정된 시녀는 없습니다. 그때그때 시간 나는 사람이 올 겁니다. 말했다시피 통령님은 궁에서 일하는 사람을 최소로 줄였어요.”
사브르가 떠나자, 그녀는 차분히 홀로 몸을 씻고, 옷장을 뒤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그대로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들고 침대에 쓰러졌다. 그제 청혼서를 받고 나서부터 이곳에 올 때까지 이틀 밤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뿐인가, 캐넌을 떠나면서 계속해서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활자를 차분히 읽어 나가던 그녀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맴돌았다.
켄은 이제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녀는 부디 리디아가 좋은 사람이기를 기도했다. 켄이 그녀를 잊고 자유로워지기를, 리디아와 평온하게 캐넌을 보살피며 그를 닮은 아이들과 함께 그 작고 아름다운 영지에서 그저 행복하기를.
어찌 되었든 켄에게 심리적인 빚이 있었다. 그녀가 딱히 부탁하지 않았어도, 별로 바라지 않았어도. 그녀가 태어난 아메탄에서조차 그 누구도 그녀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다. 켄은 그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단 한 사람이었다.
‘이 성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바람을 지녔을 겁니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 에타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영주님과 마님이 참된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기를, 그래서 영주님과 마님을 닮은 후계자를 대를 이어 섬길 수 있기를…… 지금처럼 서로 웃고 떠들며 평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기를 말입니다. 결국 이리 될 줄 알았기에 에곤 영주님도 그토록 힘겹게 눈을 감으셨나 봅니다.’
그녀는 ‘나의 공화주의’를 절반쯤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제 모두 떠나왔다. 다시는 캐넌에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언젠가는 캐넌을 떠날 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언제든 준비된 이별이었다. 에곤과 켄, 에타와 벤, 화리트 형제와 후퍼, 에소트와 스미스, 헤라와 한나, 그리고 리트와까지도…… 진정으로 마음을 주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했던 사람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한 번씩 생각해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셰가 흠칫하여 눈을 떴을 땐 이미 밤이 캄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덮지 않은 채로 쓰러졌었는데 이미 그녀의 몸에는 이불이 감겨 있었다. 위화감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자, 어둠 속에서 달빛을 등에 지고 의자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단이 보였다.
“……왜 안 깨웠어?”
그녀의 말에 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계속 안 깨면, 아침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
“안 자? 내일도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낮게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아.”
“응?”
“황궁이 끔찍해서.”
그제야 아셰는 완전히 잠이 깨어, 그를 감싼 분위기가 상당히 어둡게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황폐했고 눈빛은 꼭 누구에게 쫓기는 것처럼 번득였다. 그녀의 눈에 연민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아메탄에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지 못해 편두통으로 깨질 듯한 머리를 붙들고 눈을 감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만 떠오르곤 했다.
“공화정부고 뭐고 이 미친 황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야. 이곳에서 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어머니가 죽었으며, 형제들이 모두 죽었어.”
그가 암살에 실패한 후 황제는 후계자인 1황자를 제외한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고 들었다. 그녀는 그가 황궁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커다란 정신적 타격이 된 것을 알았다. 황궁은 그에게 거대한 트라우마의 장소였다. 아셰는 이 와중에 왜 당장 데리러 오지 않았냐며 투정을 부릴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나는 이 황궁에서 미친 망령들에게 매일 시달려. 이제는 마약도 미향도 없고, 이유 없이 쌓이는 시체들도 없지만 그때는 여전히 내 눈에 생생하지. 이곳에서 내가 직접 아버지와 형을 죽이던 기억까지.”
[다음 편에 계속....]